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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2

녹취문: 참 구원은 내 육체에서 나를 건지기_태승철 (로마서 7:14~2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4.18|조회수59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참구원은 내 육체에서 나를 건지기>의 줄거리:

나는 내 육체에 빠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자기 육체에 빠진 것이 바로 죄에 빠진 실제 이유입니다. 자기 자신의 육체로부터 건짐이 없는 죄 사함이나 죄로부터의 구원 등은 다 헛되고 추상적인 화석화 된 교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육체에 빠져서 영이신 하나님과 끊어지면 이제부터 나의 모든 행위는 죄가 내 육체를 움직인 결과입니다.

 

참 구원은 내 육체에서 나를 건지기

(로마서 7:14~25)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참 구원은 내 육체에서 나를 건지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참 구원은 내 육체에서 나를 건지기”

우리는 죄로부터 건짐 받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맞습니다. 다만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이 말은 너무나 추상적으로 돼버릴 수 있습니다. 교리 속에 나오기에 앵무새처럼 외우지만 실제와는 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구원을 이야기하면서도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언급하는 구체성을 갖지 못했는지 궁금증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4절을 보면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육신에 속한 상태로부터 건짐을 받아야 합니다. 죄가 우리를 지배하게 된 이유는 육체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24절을 보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하였습니다. 곤고하다는 말은 비참하고 극심하게 불행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는 것을 구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죄로부터의 해방을 말하고 “나 구원받았네, 너 구원받았네, 우리 구원받았네.”라고 노래를 부르기 전에 육체로부터 건짐을 받았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육체에 빠져있는 상태로부터 건짐 받은 것을 말하지 않거나, 내가 육체에 빠져있던 상태로부터 건짐 받았다는 생각과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죄에 대해 이야기하고 죄로부터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모든 일은 헛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해 모르기에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이 엄청남에도 불구하고 돈 잘 벌었다는 말이나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말보다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본래대로 말하자면 죄로부터의 구원은 어떤 일보다 큰 기쁨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건강한 상태로 회복되는 것보다도 더 기뻐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죄로부터 구원을 받았고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람들이 전혀 기쁨이 없는 이유는 진짜 죄로부터 해방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로부터 해방된 적이 없다는 것은 곧 육체로부터 해방된 적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육체에 빠진 상태에서 건짐을 받아 본 적이 없기에 기쁨도 없습니다.

14절의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라는 말씀은 육신에 속하지 않았다면 죄 아래에 팔릴 일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24절에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질문에 대해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건져내시는 곳은 나의 육체입니다. 여기서 나란 인격의 핵심인 의식과 마음을 의미합니다.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빠져있는지 건짐을 받았는지에 따라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는 내용과 결이 결정됩니다.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은 인격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빠져있는 상태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죄는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빠져있을 때 나오는 결과물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에서 건짐을 받으면 죄는 저절로 없어집니다. 육체에 대비되는 대상은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빠졌다면 영이신 하나님과 끊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에서 빠져나와 영이신 하나님께 빠지는 것이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은 육체에 빠지듯이 영이신 하나님께도 빠질 수 있습니다.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빠지면 육체로 만나는 이 세상 것들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고 열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를 세상에 속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대로 의식과 마음은 영이신 하나님께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는 곧 의식과 마음이 영이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만을 느끼고 추구하는 상태입니다.

죄라는 말이 없어도 실제 죄의 상태로부터의 해방은 육체로부터 건짐을 받음으로 일어납니다. 따라서 육체에 빠짐과 건짐을 받음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면 죄에 대한 이야기는 소용이 없습니다. 죄에서 해방 받았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아무리 말하더라도 그것은 추상적인 헛소리입니다. 육체에서 건짐을 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만 진짜 죄로부터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죄 사함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시 14절의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라는 말씀과 24절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말씀으로 돌아가 봅니다. 이 말씀은 앞서 나온 이야기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로마서 6장 11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하였는데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라는 이야기를 뒤늦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어지는 12~13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불의의 무기와 의의 무기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라고 하였고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다른 내용이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6장의 말씀은 십자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내 속에서 살아 유지되고 있는 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이는 곧 십자가가 나의 의식 안에서 늘 기억되는 상태입니다. 십자가가 의식 안에서 기억되고 있는 한 죄가 우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한편 7장 앞부분은 의식으로 십자가 예수님을 붙잡아야만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6장의 주제는 “우리는 죄로부터 죽고 해방이 되었다. 그러므로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였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어지는 7장에서는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늘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늘 기억하고 바라볼 수 있겠는가?”라는 내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7장의 7~13절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할 이유로서 우리의 죽음의 상태를 깨달아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죽음의 상태는 곧 인격의 죽음을 말합니다. 인격의 죽음은 나의 마음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최고로 좋아하는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상태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있음이자 유일한 좋음은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리고 이러하신 하나님과 끊어진 것을 인격의 죽음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사람은 가장 좋아하는 대상과 마음이 끊어질 때 자신의 몸조차 죽이고 싶어 하게 됩니다. 우리는 유일한 있음과 좋음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를 그 정도로 싫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의 끊어짐이야말로 죽음임을 깨달을 수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가장 좋고 유일하게 있는 하나님께서 내 의식과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상태에 대한 죽음을 죽이는 것입니다. 로미오가 줄리엣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심정으로 내가 하나님과 끊어진 것을 한탄할 수 있을 때만 우리는 지속적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율법이 이 죽음을 우리에게 깨우쳐주는 역할을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행동 규칙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지키려 한다고 해서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행동 규칙을 지키지 못한다는 좌절 속에서 하나님과 끊어져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까지 살펴본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유일한 있음과 좋음이신 하나님과의 단절은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깨달은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의 죽음을 죽이고 싶어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의 죽음과 관련해서 실제로 삶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문제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과 끊어져 있다는 죽음 속에서 머물고 있을 때 이 세상 삶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이야기해줍니다. 이를 통해서 죽음을 바라볼 때 어떤 관점에서 죽음을 바라봐야 하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할 당위성과 필요성을 강화시키는 의도에서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죽음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알아야 십자가를 늘 잊지 않고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곧 나의 죽음의 상태가 행위로 표현됨을 의미합니다. 로마서는 믿음에 관한 책이면서 동시에 행위에 관한 책이기도 합니다. 잘못된 행위와 올바른 행위가 무엇인지를 제시합니다. 올바른 행위는 올바른 믿음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으며, 믿음 없이 살 때 나타나는 행위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잘 이해할 수 있으면 믿음의 박사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행위의 박사가 될 수 있습니다. 행위의 박사 됨이 없다면 믿음의 박사도 될 수 없습니다. 또 믿음의 박사가 되었다면 반드시 그 사람은 행위의 박사가 된 상태입니다. 믿음만큼이나 우리는 행위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행위로 구원받지 않는다고 해서 행위가 쓸데없는 것은 아닙니다. 행위에서 죄가 확증되고, 행위에서 의가 확증되며, 행위에서 믿음이 확증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만큼 행위는 중요합니다. 본문의 내용이 방대하여 아침 시간에 다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온라인교회 모임 시간에 더 자세하고 깊은 이야기를 나눌 것입니다.

 

14절의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라는 말씀은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나의 죽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은 내가 죽었다는 의식을 깨우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율법 자체는 죄도 아니며 악도 아닙니다. 문제는 단절된 죽음의 상태에 있는 나에게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 죄악입니다.

단절된 죽음의 상태는 곧 의식과 마음이 영이신 하나님께 빠져있지 못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지 못합니다.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빠지고 또한 줄리엣이 로미오에게 빠졌을 때의 상태로부터 하나님께 빠진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에 빠지기도 하고 도박에 빠지고 중독에 빠지기도 합니다. 다만 영이신 하나님께 빠지지 않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육신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14절에서 언급된 육에 속하여 죄에 팔린 상태입니다. 영이신 하나님 대신 육체에 빠지지 않는다면 죄에 팔릴 일도 없습니다. 로미오가 줄리엣에게 빠지듯이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께 빠진다면 죄는 꼼짝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죄가 발을 들여놓을 틈이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의식과 마음은 육체에 빠지게 되었고 그 결과 죄 아래에 팔리게 되었습니다.

육체에 빠져있는 상태에서도 사람은 생각할 수 있고 의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과 계명과 말씀이라는 행동 규칙 또한 몸을 움직여서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의지를 작동합니다. 다만 이상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행동 규칙에 대해서는 몸이 생각과 의지와는 별개의 것처럼 움직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육체에 빠져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육체로 만나는 것에 대해서 육체 스스로가 반응하며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율법과 계명과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규칙입니다. 내가 이것을 기억하여 그대로 몸을 움직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마치 나의 행위를 중간에서 누가 가로채는 것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선한 규칙을 따라 생각하고 의지하려고 하는데도 몸에서는 의도한 행위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움직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이 이상한 현상에 대해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합니다. 내 속에 있는 죄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을 움직여간다는 것입니다. 나의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빠져있는 동안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서 단절된 것이 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단절된 죄를 의인화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생각과 의지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고 해도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으므로 나의 몸을 움직여서 선한 율법과 계명과 말씀과는 상관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사도 바울은 중요한 규칙을 하나 발견합니다. 이 규칙이 우리에게 주시는 핵심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몸을 움직여서 하는 행위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체에 빠져서 영이신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가 죄입니다. 이 죄의 상태에서 내가 아무리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몸을 움직여 행위 하려고 해도 몸은 나의 생각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입니다. 나의 몸을 움직이는 것은 죄입니다. 육체에 빠져있기에 육체는 오감으로 접하는 세상에 대해서 반응합니다. 이 육체의 반응이 죄의 움직임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대로 육체는 반응합니다. 인격은 선한 율법과 계명과 말씀에 따라 몸이 움직이기를 바랄지라도 이미 몸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멋대로 행위를 해나간다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하나님께 빠졌을 때도 똑같은 방식의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행위는 나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본문의 핵심 주제입니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행위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행위는 자기가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가 되는 것이 율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율법을 지켜보려고 했지만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죄가 움직여서 행위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애초에 선한 율법을 지켜보려는 의지를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죄가 움직여서 하는 행위를 자기가 움직여서 하는 행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는 의지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죄 속에 빠져있을 때 의지를 동원해 보았으나 의지와 상관없이 행위가 나타남을 깨달았습니다. 한편 죄가 아닌 하나님께 빠질 때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행위가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가 죄이기에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는 의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는 죄가 아닌 의로움이 나를 움직여가게 됩니다. 앞서 6장 13절에서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의지로 행위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하기에 행위가 잘못되면 벌을 주거나 책임을 묻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내용을 들여다보면 행위는 나의 의지의 여부가 아닌 육체가 어디에 속해있느냐에 따라서 정해집니다. 나의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빠져있는지 영이신 하나님께 빠져있는지가 행위의 주체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육체에 빠져있으면 영이신 하나님과 단절되었기에 죄가 나를 움직이지만 영이신 하나님께 빠져있으면 의로움이 나를 움직여가게 됩니다. 의지가 나를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기에 스스로 행위 한다고 착각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을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예쁜 몸매를 위해 다이어트를 계획하는 아가씨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은행을 털어 돈을 훔치려는 강도입니다. 이들의 삶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지만 공통점도 있고 차이점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비교로부터 본문의 주제를 확실하게 부각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온라인교회 모임에서 살을 붙여서 추가로 설명할 것입니다.

먼저 이 세 사람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계명과 말씀만이 인간에게 선한 행동 규칙임을 믿고 지키려고 생각하고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아가씨는 예쁜 몸매가 자기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일이라 믿어서 다이어트 계획을 세우고 행하고 있습니다. 이 아가씨에게는 다이어트가 스스로 정한 선한 행동 규칙입니다. 그렇기에 강한 의지로 다이어트라는 규칙을 지켜나가려 하고 있습니다. 셋째, 은행 강도는 하나님이 주신 행동 규칙들을 지키려는 의지도 없고 자신에게 선하다고 여겨지는 행동 규칙을 만들어 지키려는 생각과 의지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죄악 된 욕구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차이 나는 삶을 살아가는 세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계명과 말씀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선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율법과 계명과 말씀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육체를 움직여서 행위 하게 만드는 것은 사도 바울 속에 거하는 죄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의 상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상태를 이야기함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할 당위성과 절대적인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알기 전에도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선한 율법을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의지와는 상관없이 율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게 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행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의 죄가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 아가씨는 예쁜 몸매가 선이라고 생각하여 다이어트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다이어트에 실패하게 되었다고 해보겠습니다. 다이어트 실패라는 행위가 나타난 이유는 의지가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가씨 속에 있는 죄 때문입니다. 죄가 아가씨의 몸을 이끌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과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행동 규칙을 지키려고 했으나 육체에 빠져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된 죄의 상태가 몸을 움직여 행위 하게 되었습니다. 아가씨는 자기에게 선하다고 생각하는 다이어트라는 행동 규칙을 세워서 실천하려고 강한 의지를 보였으나 마찬가지로 몸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된 죄의 상태가 행위를 하게 하였습니다.

은행 강도는 하나님이 주신 선한 행동 규칙이나 자신이 생각하는 선한 행동 규칙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행동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또한 행위의 원인이 사도 바울이나 아가씨와 동일합니다. 은행 강도라는 행위를 하게 하는 것은 육체에 빠져있기 때문에 나타난 하나님과 단절된 죄의 상태에서 몸을 움직인 것입니다.

세 사람은 각자 의지를 통해서 자기 몸을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율법을 지키려고 했던 사도 바울의 의지, 예쁜 몸매를 선하다고 여겨서 스스로 다이어트를 하려고 했던 아가씨의 의지, 선함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탐심과 욕구대로 움직이려고 했던 은행 강도의 의지는 모두 자기 의지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동일하게 죄가 세 사람의 몸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깨달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앞선 11절을 보면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전부 자신의 의지로 몸을 움직이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의지한 대로 잘 되지 않을 때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근원적인 문제는 행위 하려는 의지에 있지 않습니다. 본래 행위는 인간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지로 몸을 움직이려는 성질은 하나님과 단절된 죄악의 특징입니다.

단절은 곧 죽음입니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이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고 느끼지 못하게 가립니다. 사탄은 “너의 의지로 행동하며 살 수 있다.”고 우리를 속입니다. 이 속아 넘어감이 우리의 체질이 되어버렸지만 본래 그렇게 지어진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죄에 속았다고 해서 나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행위 자체는 내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지만 나타난 행위가 불법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육체에 빠져있기 때문에 죄가 내 몸을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내가 육체에 빠져있지 않았다면 하나님과 단절된 죄의 상태는 나타날 리도 없었고, 죄의 상태가 나의 몸을 움직여갈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빠져있다면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의의 상태가 나의 몸을 움직여나가게 됩니다.

 

행위는 나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내가 할 일은 육체에 빠져있을 것인가 영이신 하나님께 빠져있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뿐입니다. 행위는 저절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다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죄의 속임수입니다. 죄는 사람이 육체에 빠질 때 죄의 상태에 있고 죽어있다는 사실을 속입니다. “너의 의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다.”라고 여기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살아있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육체에 빠져있는 상태가 잘못된 것임을 가립니다.

행위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일이 될 수도 있고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육체에 빠져있는 상태에서는 모든 행위가 죄악이기 때문에 24절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비참함과 불행함을 토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 해결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서 빠져나가는 구원을 이루면 행위는 의로움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결코 내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삶은 비참함의 반대입니다. 의로움이 나를 움직이고 행위 하게 하니 행복합니다. 이어지는 25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십자가 사건 외에는 나를 육체에서 건져낼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 의미를 깨달았음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몸에서 의식과 마음을 건져내는 것입니다. 구원이 이루어지면 여러분의 행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육체에서 빠져나와 하나님께 빠진 의로움의 상태에서 몸을 움직이는 행위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선한 행위가 이루어지는 삶은 신나고 재미있는 놀이가 됩니다.

우리는 행위를 보며 죽음의 상태를 분명히 자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봐야 될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육체에서 나를 건져내기 위해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육체에서 건짐 받지 못한 상태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는 죄악입니다. 내가 어떤 선한 의지를 갖고 있어도 육체에서 건짐 받을 수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행위는 내 의지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육체로부터의 구원을 받는 것이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여러분의 행위가 기쁨이 되고 놀이가 되고 행복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봐야 할 당위성을 깨달았습니다. 이 당위성을 뼛속까지 받아들여 십자가를 잊지 않음으로써 나의 육체로부터 건짐을 받은 상태가 유지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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