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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성령님은 살아계신 나의 행동규칙>의 줄거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상태가 유지되면 나타나는 일이 바로 생명입니다. 또한 이 생명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이 바로 성령의 법입니다. 마치 그리스도 밖에서 나타나는 일이 죄이고 또한 그 죄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이 사망의 법인 것과 같습니다. 정죄함이 없는 상태가 확신이나 주장이 아니라 실제가 되면 성령의 법이 몸을 움직입니다.
성령님은 살아계신 나의 행동 규칙
(로마서 8:1~11)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성령님은 살아계신 나의 행동 규칙>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성령님은 살아계신 나의 행동 규칙”
1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정죄함이 없기에 성령님께서 살아계신 행동 규칙이 되어주십니다. 살아 계신 행동 규칙이 되어주신다는 것은 곧 성령님께서 나의 행동을 주장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성령님께서 몸을 움직이시지 않는다면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지 않은 9절의 하반부를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님을 말합니다. 성령님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성령님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행동이 증거가 되어 나타납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 성령님이 움직이셔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성령 받는 것을 특별한 사명자에게만 주어지는 일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큰 사명을 받고 수행하기 위한 조건처럼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사소한 일상의 행동일지라도 그것이 몸을 움직여서 나타나는 것인 한 성령께서 움직이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무조건 성령님이 살아계신 행동 규칙이 되셔서 내 몸을 움직이셔서 나타나는 일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대단한 일 같고, 어려운 일 같고, 불가능해 보이고, 이상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전에 내가 내 몸을 움직이면서 사는 일보다 훨씬 쉽습니다. 성령님에 대한 무지가 죄이고 오해가 죄입니다. 이러한 무지와 오해가 죄인 이유는 세상에 대한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무지의 상태를 선호하고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좋기 때문에 모든 성경 말씀을 곡해하게 됩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상태에 성경 말씀을 맞추느라 오해하고 곡해하고 무지를 선택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대로 알고 있으면 실제로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다시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정죄함이 없는 이유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죄와 사망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다른 무엇인가가 들어섰음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청년이 사귀던 아가씨와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완전한 결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아가씨의 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야만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죄와 사망의 법이 차지하고 있던 그 자리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들어와야만 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주어집니다. 그리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완전히 해방되었기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방법이 문제가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만 하면 되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의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유지하고 있으면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정죄 받는 상태가 없어집니다.
우리는 그동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반복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정죄 받는 일이 실제로 없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정죄함이 없음을 주장하라는 것도 아니며 선언하라는 것도 아니며 우기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면 죄를 판단하고 규정할 수 있는 상태 자체가 봄바람에 눈 녹듯이 없어집니다. 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실제적인 상황이나 이유가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정죄함이 없는 이유는 정죄 받을 상태에서 실제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 정죄 받은 상태에서 나타나는 죄와 사망의 법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 이전에 있었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죄는 빗나감입니다.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간 상태입니다. 아내 앞에서 아내의 존재감이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우선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이미 빗나간 죄악입니다. 돈 문제가 발생했다고 해서 돈 문제를 하나님의 있음보다 더 먼저 있는 것이라고 느낀다면 이 또한 빗나간 죄악입니다. 이처럼 빗나감은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달라붙어서 생겨난 일입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육체로 만나는 세상 것에 대해서 먼저 반응하는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요 주권자이십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너무나 억울하게도 우리의 의식과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해 반응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빗나감의 상태가 바로 죄입니다.
그리고 이 빗나감의 죄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끊어짐입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반응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끊어진 것입니다. 이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가 사망입니다. 성경에서는 단순히 육체의 죽음을 사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와 사망의 상태가 내 속에서 유지될 때에 나오는 법이 있습니다. 나의 육체의 행동 규칙을 따라서 움직여야만 행위가 이루어진다고 믿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이것을 죄의 속임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에 “육체를 움직여 행위 해야만 한다. 육체를 움직여 행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육체로 행위 하지 않으면 무엇도 주어지지 않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끊어짐의 상태에서 발생한 사망의 법입니다. 평생 이 의무감과 책임감과 부담감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사망의 법으로부터 모든 수고와 탈진과 두려움과 불안감이 나타납니다. 사망의 법은 우리를 평생 부담감과 강박감에 짓눌려 살게 합니다. 그리고 육체가 죽은 뒤에는 영원한 멸망으로 이끌고 갑니다.
그렇다면 이 죄와 사망의 법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란 무엇일까요?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간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에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보다 피조물들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고 반응하였습니다. 그 결과 죄가 일어났고 하나님과 끊어져서 사망의 법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게 되면 사망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빗나감과 사망의 상태에 있던 나를 죽이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빗나간 나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머무는 동안 의식과 마음에서 빗나감의 상태는 없어집니다. 이는 곧 의식과 마음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서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께로 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로 갔으니 하나님과 연결이 됩니다. 이것이 생명의 상태입니다.
의식과 마음은 인격의 핵심입니다. 이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면 천국에서의 존재감이 확인됩니다. 천국에서 존재가 없는 상태가 사망입니다. 하나님과 끊어졌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나의 존재감이 없는 상태입니다. 생명은 이와 반대입니다. 천국에서 존재감이 생겨났고, 하나님의 마음 안에 나의 존재감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식과 마음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께로 가면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끊어짐이 없는 생명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앞서 빗나감의 죄와 끊어짐의 사망의 상태에서 법이 나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육체를 움직여 행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생명의 상태에서는 성령의 법이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의 상태가 이루어지면 사망의 법 대신 성령의 법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성령의 법은 사망의 법과 다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내 육체를 움직이기 위해서 행동 규칙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행동 규칙에 나의 육체를 맞추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살아계신 행동 규칙입니다.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의 육체를 직접 움직여 가십니다. 세상의 행동 규칙은 죽은 행동 규칙이기에 내가 나의 육체를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살아계신 행동 규칙이기에 스스로 나의 육체를 움직여 가십니다. 성령님이 나의 육체를 움직이시는 동안 나의 행위는 하나님의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3절을 보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육신 때문에 약해졌다는 내용입니다.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붙어있는 한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육체를 통해 절대로 지켜질 수 없습니다. 율법이 연약하다는 것은 내 안에서 활발하게 작용하고 있는 죄의 힘과 사망의 법을 무릅쓰고 극복하고 이길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나의 육체에서 성취되지 못하게 합니다.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는 약화됩니다. 율법은 아무런 힘이 없고 맥을 못 추게 됩니다.
의식과 마음은 나의 인격의 핵심이기에 실제 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달라붙자 육체의 힘에 의해서 율법은 맥을 못 추게 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요구를 하지만 그 요구를 관철시킬 수 없게 약화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육체 때문에 약해집니다. 육체를 통해서 율법이 나타나야 하는데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달라붙은 바람에 도무지 육체로 인해 빚어지는 죄와 사망의 법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3절의 하반부를 보면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행동 규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달라붙어 있으면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행동 규칙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을 통해 마치 예수님의 몸이 죄로 가득 차 있는 통이라도 된 듯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가하십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안으로 들어가면 율법이 맥을 못 추게 약화시켰던 그 육체로부터 우리의 의식과 마음은 분리됩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7장 24~25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모든 악한 죄를 다 짊어지시고 참혹한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할 때에 우리는 사망의 몸에서 건져냄을 받게 됩니다.
사망의 몸에서 건져냄을 받았기에 의식과 마음이 더는 육체를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따라 세상 것들에서 있음과 좋음을 바라면서 스스로 행위를 한답시고 육체를 움직여왔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율법을 하나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의식과 마음이 육체와 분리되었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0절을 보면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육체가 죽었다는 것은 목숨이 끊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의식과 마음이 육체를 붙들고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육체가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육체를 붙잡고 있던 의식과 마음이 떨어져 나왔으니 육체는 죽은 것처럼 되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육체를 장악하시면서 육체조차도 다시 살아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생각의 복사판 영이십니다. 아버지의 생각이 외출하신 분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 성령님께서 내 몸을 장악하십니다. 4절을 보면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생각이 이 세상에 표현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하나님 생각의 복사판 영이시기에 성령님이 오시면 율법의 요구는 비로소 지켜지게 됩니다.
나의 의식과 마음이 몸에 달라붙어서 행위 하고자 할 때는 몸이 살아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연합하여 의식과 마음이 나의 몸으로부터 떨어져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달라붙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의 몸은 임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임자가 없게 된 내 몸은 결코 마귀가 차지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기 이전의 상태는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가 주인 노릇을 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 상태가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마귀는 더 이상 주인 노릇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성령님께서 오셔서 나의 육체를 붙잡고 움직여가시게 됩니다.
이전에는 나의 의식과 마음이 몸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밖에서 주어진 행동 규칙이든지 스스로 만들어낸 행동 규칙에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내 몸을 움직이실 때는 이와는 다릅니다. 성령님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시고 하나님 생각의 복사판 영이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내 몸에 담아서 행동하게끔 하시기에 율법의 요구는 이루어집니다. 성령님이 오시기 전에는 율법은 육체 때문에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율법은 하나님의 생각임에도 우리의 몸에서 관철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생각의 복사판 영이신 성령님이 오시자 율법의 요구는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율법을 기억하며 행동하려고 했던 것은 사망의 법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사망의 법을 따랐기에 율법을 지키고자 했으나 지킬 수 없었습니다. 이 상태에서 벗어나서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생명의 상태가 유지되면서 살아계신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생각을 끝없이 복사하시는 분으로서 나의 육체를 붙잡으시고 하나님의 생각이 온전히 표현될 수 있는 행동을 하게 하십니다.
5~6절을 보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육신을 따른다는 것은 육체로 만나는 물리적인 차원을 따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육체와 육체의 연관성을 현실로 느끼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되지 않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영적 차원을 현실로 느끼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 맞습니다.
이 구절에서 영을 따른다는 표현은 꼭 성령님을 따르는 것이라 한정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5~6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생각은 현실에 관한 우리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5절의 말씀은 “육신과 육신의 관련성을 현실로 느끼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 영적 세계를 현실로 느끼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일을 현실로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과의 끊어짐이기에 사망이고 멸망입니다. 그러나 영적 차원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습니다. 천국과 천국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면서 영의 세계에 대해 생각한다면 생명의 상태가 유지되면서 평안이 다가오게 됩니다.
사망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육체로 만나는 세상을 현실로 느껴서 이 세상 현실에 몰입하면 그 자체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특징으로 하는 사망이 주어집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 영적인 세계를 현실로 느껴서 몰입하면 그 생각만으로 평안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7절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육신의 생각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이유는 앞서 살펴보았던 율법과 사망의 법과 연관됩니다. 의식과 마음이 육신에 달라붙어서 육신으로 만나는 세상을 현실로 느끼면 세상을 생각하고 몰입하게 됩니다. 그럴 때 이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신 모든 생각에 반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대해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을 하는 동안에는 단 하나의 생각도 하나님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계속 반항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돈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면 육체가 만나는 돈 문제를 현실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돈 문제가 육체의 일이기에 몰입하는 것 자체가 사망이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돈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내가 생각하면 무조건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육신과 육신에 관련된 일들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현실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현실로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진정한 있음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있음으로 느끼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있음으로 느끼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됩니다.
본래 이 세상 삶에 대한 모든 생각은 완전히 수입되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 벤츠는 독일에서 만들어진 차를 수입해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생각이 이와 같습니다. 세상일에 대한 생각은 내 안에서 만들어져서는 안 됩니다. 자발적으로 만들어지는 내 생각은 오직 하늘의 영적인 세계를 현실로 느끼며 머물러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임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생각을 복사하듯이 담고 계신 성령님께서 필요한 대로 내 몸을 움직이시며 삶을 살아가십니다.
내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모든 일상의 삶 전체에 해당되는 일입니다. 밥 짓고 빨래하고 직장에 나가 일하는 것까지도 포함됩니다. 일상의 삶 전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음으로써 성령의 법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법에 의해 나의 행동이 움직여지고 있어야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위해서는 늘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다는 생각을 통해 의식과 마음이 육체와 분리된 상태가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분리되었기에 육체로 만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육체로 만나는 일들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 자체로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그 자체로 사망이고 멸망입니다. 그 자체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만을 하고 있다면 나의 삶에 대한 생각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벤츠라면 우리는 그것을 수입해야만 합니다. 수입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생각을 가지고 내 삶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십자가 예수님의 사건이 복음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이 세상의 삶을 위해 하나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전부 하나님의 생각과 성령의 법칙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메꿔집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심을 기억하면서 아버지만을 구하는 일에 주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등지고 아버지만을 구하고 있으면 내가 등진 세상은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생각과 몸을 움직이시는 행동으로 메꿔지게 됩니다.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의 몸을 움직이시는 행동 규칙이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 안에 머무는 것이 분명하게 되도록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나의 의식과 마음이 하늘에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생명의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땅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과 땅에 내려오셔서 나의 몸을 움직이시는 살아계신 행동 규칙이신 성령님을 통해서만 삶이 메워지고 채워지고 진행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