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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성령께 행위를 빚지는 것이 나의 공로>의 줄거리: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부자 관계라는 사실에 대해서 내놓으신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행위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 되었음을 어떻게 증명할 것입니까? 바로 우리의 행위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이 복사되신 성령께서 이루시는 것이라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성령께 행위를 빚지는 것이 나의 공로
(로마서 8:12~17)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성령께 행위를 빚지는 것이 나의 공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성령께 행위를 빚지는 것이 나의 공로”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안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십자가 복음방송에 홈페이지가 있고 유튜브 채널이 있습니다. 유튜브 채널을 보면 2014년부터 시즌2에서 진행 중인 설교가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을 창세기부터 순서대로 모아서 설교 동영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여러분께서 듣고 싶으신 설교가 있으면 재생목록으로 들어가시면 해당되는 영상을 쉽게 들으실 수 있습니다. 현재 구약까지의 재생목록 정리는 끝났고 신약의 재생목록을 정리 중에 있습니다. 지금부터 참고하시면 이용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공로 사상은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하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에 대해서 상충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공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공로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일 중에 행위와 연관되어서 공로가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제목을 “성령께 행위를 빚지는 것이 나의 공로”라고 정해보았습니다. 말하자면 공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로가 있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공로는 바로 성령께 행위를 빚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 행위를 빚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유일한 공로입니다. 이 공로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자면 “성령께 행위를 빚짐으로 공로를 쌓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13절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빚진 자”라는 말이 참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선 1장 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로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이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해야 될 사명을 빚진 자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이라는 빚을 진 사람처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본문에서 나온 “빚진 자”라는 표현은 사도 바울의 사명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빚지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앞선 6장, 7장, 8장 앞부분에서 본 내용들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주석에서 전해지는 신학자들의 견해들을 정리해보자면 우리의 빚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이루어진 구원, 축복,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뜻 생각해보기에는 이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빚졌다고 한다면 받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고, 영생을 받고, 축복을 받았기에 상응하는 의무감을 가져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받아들이면 “구원은 은혜로 주어진다.”라는 내용은 틀어져 버리고 맙니다. 사도 바울은 특별히 누구에게 무엇을 빚졌다고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받은 것을 염두에 두며 빚졌다는 말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부터 진행되어온 사도 바울의 말씀 속에서 행위에 대한 이해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나온 결론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로마서는 믿음에 관한 책이면서 동시에 행위에 관한 책입니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로마서는 은혜에 관한 책이면서 동시에 공로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균형을 잃어버리면 로마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시 12절을 보면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무엇에 빚졌는지를 알 수 있는 힌트가 있습니다. 육신대로 사는 것은 육신을 따라 행위하며 사는 것입니다. 삶은 어차피 관계와 관계에 따르는 행위로 채워지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염두에 두고 12절 말씀을 풀어보자면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행위 할 것이 아니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빚진다는 말은 결국 행위를 빚졌음을 의미합니다.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사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 한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죄와 사망은 그리스도 예수 바깥에 있는 상태이기에 정죄를 받아야 하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의식과 마음은 육체에 달라붙게 됩니다. 육체는 오감을 통하여 이 세상 것들을 포착하게 되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것들 중에서 있음과 좋음의 대상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발동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돈을 좋다고 느낀 사람은 돈에 의해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고 실제로 돈을 갖기 위해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의식과 마음이 육신에게 정복당해 끌려가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육신이 포착하는 것을 따라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느끼며 행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태에 대해 앞선 7장 19~20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으면서 정죄함의 상태에 살고 있으면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게 됩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내 속에 거하는 죄가 내 몸을 움직여 행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것은 육신에게 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간 죄의 상태를 이룬 것뿐입니다. 그럴 때 죄가 나를 속이는 사망의 법이 나오게 됩니다. 7장 11절에서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죄가 나를 속여서 “스스로 움직이는 행위를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내용이 사망의 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통해 실험적으로 확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바깥에서 육신에게 져서 육신을 따라 사는 상태에서는 모든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을 빗나감의 죄가 몸을 움직여서 나타난다.”라는 결론을 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는 자기가 한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는 빚을 지는 것입니다. 내가 육체로 행위 한 만큼 빚을 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바깥에 있을 때는 죄에게 빚을 지는 것이었습니다. 죄가 나를 움직여 행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정죄함이 없어집니다. 나의 의식과 마음이 몸에 지지 않고 육체에 끌려 들어가지 않습니다. 의식과 마음이 나의 몸에 달라붙지 않고 예수님의 몸에 달라붙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통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생명의 상태입니다. 이러한 생명의 상태가 되면 하나님 생각의 복사판 영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내 몸을 움직여 행위를 하십니다. 이때에도 행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내 몸을 움직여 행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행위는 성령께 빚지게 됩니다.
“우리가 빚진 자로되”라는 말은 우리가 몸을 입고 사는 가운데 행위로 살 수밖에 없으며 행위는 빚이라는 의미입니다. 죄에게 빚을 지든지 성령께 빚을 지든지 빚을 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빚을 질 것이라면 죄에게 빚을 질 이유는 없습니다. 육신에 져서 육신을 따라가면서 하나님과 끊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간 죄는 나에게 행위를 하게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죄에게 행위라는 빚을 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행위를 빚져야 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누구에게 빚지느냐가 중요합니다. 죄에게 속아서 그리스도 바깥에 있을 때는 내가 내 몸을 움직여 행위를 한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는 그 착각 자체가 죄에게 속은 것이고 죄가 행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에게 빚진 삶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12~13절 말씀을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행위를 함에 있어서는 언제나 빚을 지고 있다. 내 육체가 움직이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니 비유컨대 행위는 일종의 빚이다. 죄가 행하여 죄에게 빚지든지 성령께서 행위를 하심으로 성령께 빚지든지 내 육체가 움직이는 행위는 내게 빚이다. 그러나 어차피 행위를 빚질 바에는 사망의 법 안에서 육신을 따름으로써 죄에게 빚을 질 필요가 없다. 의식도 마음도 육신에 매여서 육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대로 행위를 하면 그 행위는 죄가 행하는 것이기에 죄에게 빚지는 일을 그대로 놔두어서는 안 된다. 죄에게 행위를 빚지면 우리는 영원한 지옥의 삶으로 그 빚을 갚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 즉 성령께서 내 육체로 행위를 하시도록 함으로써 죄가 내 육체를 통해 하려는 행위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해야만 한다. 성령이 나에게서 행위를 하시도록 하면 그 빚에 대해서 오히려 영생의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뜻은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이 빚이라는 표현을 한 이유는 행위에 대한 갚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행위는 빚질 수밖에 없으며 행위에는 반드시 대가가 치러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고 하였습니다. 이 죽음은 삶에서도 하나님과 끊어진 단절의 상태이며 또한 육체가 죽은 다음에 영원한 멸망을 의미합니다. 죄에게 빚을 지면 살아서는 가장 좋으신 하나님을 잃는 대가를 치러야 하며 죽어서는 지옥의 삶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고리대금업자에게 사채를 썼는데 갚을 수가 없게 되자 장기를 적출해야 하는 상황까지 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될 것입니다. 마치 먹고 살려면 돈이 있어야 되듯이 살기 위해서는 행위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기 위해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죄에게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빚을 졌으니 이제 빚을 갚아야만 합니다. 육신대로 행위를 하여 죄에게 빚을 졌으면 사는 동안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공허함과 두려움으로 갚아야 하고 죽은 뒤에는 영원한 지옥의 삶으로 갚아야 합니다.
한편 13절의 하반부를 보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께 행위의 빚을 지면 산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산다는 것은 영생이고 하나님의 양자 됨이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똑같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빚을 진 대가가 은혜라니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살려면 행위를 해야만 합니다. 그 행위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빚을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께 행위의 빚을 지면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께 빚을 지는 것을 공로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설날이 되면 자손들이 어른들에게 세배하고 어른들은 덕담을 해주시고 세뱃돈을 주십니다. 두세 살 된 손주들은 세배나 세뱃돈에 대한 개념도 없습니다. 어떤 아이는 정성껏 세배하는 시늉을 내기도 하지만 어떤 아이는 딴 짓 하느라 돌아다니기 바쁩니다. 세뱃돈을 준비해두었던 할머니가 손주 녀석을 쫓아다니며 머리를 붙잡고 억지로 세배를 하게 합니다. 세뱃돈을 주기 위해 세배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이때 어린 손주는 스스로 세배를 한 것이 아니지만 세배라는 행위를 할머니에게 빚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배라는 빚진 행위를 했는데도 세뱃돈이라는 대가가 주어집니다. 억지로 한 세배도 공로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성령께 빚질 때 나타나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성령께서 내 육체를 붙잡고 정복하고 행위를 하십니다. 내 몸을 통해 나타나지만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내가 성령께 붙들려서 행위를 할 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 생각의 복사판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행위를 하실 때는 하나님의 생각에 부합하는 행위가 나타나게 됩니다. 마치 할머니가 손주의 머리를 붙잡고 세배를 시키듯이 성령께서 행위를 하게 하실 때는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행위를 빚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성령께서 하신 행위를 나의 공로로 여겨주십니다. 이로부터 일어나는 일이 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 행위를 빚지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성령께 행위를 빚지자 그 대가로 하나님의 아들 되는 권세와 자격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행위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아버지와 양자라는 부자관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땅에 사는 내가 부자관계임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행위로만 규명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에 맞추어 부자관계임은 행위를 통해 증명되고 규명됩니다. 또 5장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행위가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예수님의 보이지 않는 부자관계는 예수님의 행위로써 증명되고 있었습니다. 8장 28절에서도 동일한 의미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행위로써 증명하셨다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8장 38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또 14장 11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통 행위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 아버지와 부자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다만 부자관계가 지속되는 양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께 행위를 빚져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가 행하심을 보고 계셨습니다. 성령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갖고 계신 모든 생각의 복사판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성령을 통하여 아버지가 일하고 계심을 보셨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위를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는 노아 홍수 때의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장사하고 밭을 갈고 씨 뿌리고 거두면서 살아갑니다. 취미생활도 하고 여행도 하고 쇼핑도 하고 직장일도 할 것입니다. 똑같이 행위를 해야 삶이 채워집니다. 그러나 그 행위의 빚진 곳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성령께서 행위를 하게 하십니다. 직장의 일, 가정의 일, 쇼핑이나 여행, 장가들고 시집가는 등의 모든 행위를 성령께 빚지게 됩니다. 물론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도 이러한 행위들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죄에게 빚지게 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죄에게 빚지면 죄는 빚 갚기를 요구할 것입니다. 그 빚은 지옥으로 가서 갚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께 빚질 때는 이와는 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성령께서 빚을 갚으라고 하실 때는 하나님께서는 나를 하늘로 데리고 가십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양자됨으로 갚아주십니다. 할머니가 손주에게 억지로 세배를 시키고 세뱃돈을 쥐어주듯이 하나님께서는 성령께서 나의 몸을 움직이셔서 나타난 행위의 빚을 공로로 생각하십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 온라인교회 모임을 통하여 더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성령께 빚을 진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께 돌아간 모든 영광을 똑같이 상속하게 되는 상속자로서 자격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을 때 우리의 행위는 성령께 빚지게 됩니다. 정죄함이 없는 상태인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 우리의 의식과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명의 상태가 이루어질 때 성령께서 나에게 행위를 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행위하며 살아가야 할 때 날마다 성령께 빚지게 되는 것입니다. 행위의 빚은 날마다 쌓여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령께서 행하시는 행위의 빚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공로로 여기십니다.
빚을 지면 지금은 공짜로 쓰지만 나중에는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께 행위의 빚을 져서 청산해야 할 때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께 빚져 나타난 모든 행위를 공로로 여겨주십니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기르고, 직장에 나가고 하루하루 살며 행위 한 모든 빚에 대해서 성령께 빚진 만큼 공로로 인정해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상속자로 누리시는 모든 영광과 은혜와 복을 우리도 똑같이 누리게 해주십니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빚을 잔뜩 진 채로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행위를 하시도록 내 삶을 내버려 두고, 성령이 움직이시는 행위로만 채워질 수 있도록 빚으로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성령께서 많이 행하셔서 나의 행위의 빚이 점점 커진 만큼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공로로 계산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큰 공로를 세우실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성령께 여러분의 행위를 날마다 빚지는 것입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아무리 작은 행위라도 다 성령께 빚을 져야 합니다. 성령께 진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할머니가 억지로 손주의 머리를 눌러 세배라는 행위를 빚지게 한 뒤에 세뱃돈을 주시는 것처럼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육체를 움직여 행위를 빚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빚에 대해 주님이 독생자로서 누리는 모든 영광을 함께 누리도록 상속자로 세워주시는 이 놀라운 경륜을 우리의 것으로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