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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2

녹취문: 성령님의 간구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_태승철 (로마서 8:26~3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4.28|조회수56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성령님의 간구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의 줄거리:

내 인생에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이유를 아십니까? 성령님이 나의 연약함을 돕느라 탄식하며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내 눈으로 보는 피조물에 대한 나의 바람이 단 하나도 속 시원히 이뤄지지 않게 되도록 성령님이 주권자 아버지께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과정이 실제로는 적지 않게 고충(?)입니다.

 

성령님의 간구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

(로마서 8:26~30)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성령님의 간구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성령님의 간구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

인생에서 되는 일이 없는 이유는 성령님께서 내가 원하고 바라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이 된다, 혹은 안 된다는 말을 할 경우에는 바라기 때문입니다. “나는 인생에서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라고 말한다면 내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내 인생에서 바라는 것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예외 없이 내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고 택하심을 입은 사람이기에 성령님께서 내가 바라는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셨기 때문입니다. 불통은 원하는 바가 막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모든 불통의 원인과 이유는 성령님의 간구하심 때문입니다.

 

26절을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도우시는지가 이어집니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님의 간구는 나의 간구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시기 때문에 다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바로 성령님의 간구하심 때문에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지난 시간에 살펴본 22~23절에서 이어집니다. 22절에서는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라고 하였고, 23절에서는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는 성령께서 같은 이유로 탄식하신다는 뜻입니다. 26절을 풀어보자면 “이와 같은 이유로 성령도 탄식하시면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조물이 탄식하고 우리도 탄식하고 성령님도 같은 이유로 탄식하십니다. 우리의 탄식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대표적으로 앞서 본 7장 24절에 기록된 바와 같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하였습니다. 또 8장 23절을 다시 보자면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몸의 속량은 몸을 건져내는 것입니다. 7장에서는 이것을 나를 내 몸에서 건져내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의식과 마음을 몸에서 건져내면 몸도 나의 의식과 마음에서 건짐을 받으니 같은 내용입니다.

피조물이 탄식하는 근원적인 이유도 나의 의식과 마음이 몸에 달라붙은 상태 때문입니다. 의식과 마음이 몸에 달라붙어서 오감을 통하여 만나는 피조물을 창조주 하나님보다 더 먼저 있음을 느끼고 더 많이 좋아하는 상태가 문제입니다. 이 상태 때문에 피조물은 하나님에 의해서 허무한데 굴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는 아무런 존재감이 없음을 드러내시기 위해 허무한데 굴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또 피조물은 썩어짐에 종노릇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마음에서 좋아하는 피조물이 썩어질 것임을 드러나게 하십니다. 피조물은 우리에게 “제발 피조물인 나를 좋아하지 말라. 나에게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창조적 의도가 담겨있는데, 네가 나를 좋아하는 바람에 나는 허무한데 굴복하고 썩어짐에 종노릇 하게 되었다.”라고 탄식하는 셈입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달라붙어서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을 향하게 된 것이 빗나감의 죄악입니다. 이러한 죄악의 상태에서는 육체의 오감을 따라 의식과 마음이 반응하며 살게 됩니다. 우리는 육체의 오감으로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래 그렇게 살아가야 될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생각을 받아들이고 그 생각을 따라서 살아가야 될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몸이 있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이유는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행동하며 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몸의 오감을 통해서 만나는 피조물을 좋아하고 끌어당기면서 반응하고 행동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 상태에 대해서 성령님도 똑같이 탄식을 하십니다. 문제는 내 의식과 마음이 몸에 달라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 때문에 피조물도 탄식하고 우리의 속사람도 탄식하고 성령님도 탄식하십니다.

 

다만 성령님께서는 탄식만 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다시 26절을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탄식하면서도 이 사망의 몸에서 어떻게 건짐을 받아야 할지 모르고 있는데 성령님께서는 나의 연약함을 도우시고자 간구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이란 무엇일까요?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육체로부터 떨어져 분리되어서 천국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만을 향하는 일에 있어서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이 연약함은 반대의 측면에서 보자면 엄청난 강력함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소원하는 우리의 마음이 육체에 달라붙는 접착력이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이 세상의 피조물을 향하는 힘이 강력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육체에 강력하게 달라붙어 있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함에 있어 연약함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인간의 연약함은 그저 연약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는 의로움에 대한 연약함은 이 땅을 향하는 불의함에 대한 강력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연약함은 강력한 악함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땅을 향한 강력함은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과의 연합과 결속을 방해하는 연약함으로 나타납니다. 24절을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눈으로 보는 피조물을 소망하는 일에서 나타나는 엄청난 강력함이 반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일에서는 엄청난 연약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엄청나게 강력한 악함 때문에 엄청나게 연약한 상태가 발생합니다.

성령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함과 소망함에 대한 연약함을 도우시기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은 주권자 하나님에 의해서 승낙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의 상태를 보며 탄식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지 생각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나의 의식과 마음이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소망하는 일에 대해서 연약하기 때문에 그 연약함을 강력함으로 바꾸고자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을 향함에 있어서 우리의 연약함을 돕기 위하여 주권자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여 택하신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 장로님은 장사를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의 의식과 마음이 온통 육체에 붙어있는 상태입니다. 육체로 하는 장사를 통해서 마음이 채워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이러한 장로님의 마음 상태를 지켜보시며 탄식하십니다. 본래 장사는 장로님이 의식과 마음을 다 쏟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장사는 하나님의 뜻을 받으신 성령님께서 장로님의 몸을 움직이시며 이루어질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로님의 의식과 마음은 하나님께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답게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의식과 마음은 하나님을 소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을 빗나가 육체에 달라붙었고 장사에 몰입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때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만을 소망하여 의식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육체는 성령님이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서 이끌어가시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이루지 못하고 장로님의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때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십니다. 의식과 마음이 완전히 빠져있는 장사가 뿌리째 흔들리도록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바람은 장로님이 장사를 잘해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한마음으로 장로님께 바라시는 것은 양자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특징은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가운데 육체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서 드러내신 모습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장로님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택함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직 장사에만 의식과 마음을 쏟고 있으니 성령님께서 탄식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의식과 마음이 자녀에게 다 가있을 수 있습니다. 이때 성령님께서는 탄식하시며 간구하십니다. 나의 의식과 마음이 강력한 집착력과 흡입력을 가지고 빨아들이고 소원하는 모든 일이 이 세상의 주권자 하나님에 의해서 완전히 깨뜨려지기를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를 돕기 위하여 아버지께 간구하십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소망하는 일에 대해 강력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일에 대해 연약합니다. 성령님은 강력한 부분을 깨뜨리시는 간구하심을 통해 연약한 우리를 도우십니다. 내가 돈에 대해서 강력하게 소원하기에 돈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돈이 없는 이유는 성령님의 간구하심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이러한 간구를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으로 택하셔서 양자로 삼으시려고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양자로 삼기 위해 택하신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의 다른 점은 바로 성령의 간구하심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간구하심이 없다면 이 세상을 향한 인간의 바람은 오히려 이루어지기 쉽습니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바람과 소원이 확률적으로 훨씬 더 많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철저하게 별 볼 일 없게 되는 이유는 성령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악취미를 갖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돕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보여야 되는 특징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 있어서 연약한 우리를 돕기 위해 이 땅을 강력하게 소원하는 성향을 깨뜨리시고자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 세상의 보이는 것들을 향한 우리의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주권자로서 이 세상에서 그 간구가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28절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이 나오게 된 이유는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싫어할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흔히 이 말씀은 불행이라 여겨지던 일이 행운으로 작용할 경우에 쓰입니다. 예를 들어 택시를 탔는데 접촉사고가 나서 기차를 놓쳤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차가 사고가 났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 기차를 탔다면 죽거나 큰 부상을 입을 뻔했습니다. 택시의 접촉사고라는 불행이 기차사고를 피하는 행운이 된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은 26절에서 언급된 성령의 간구하심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간구하심은 우리 인생의 미래를 향한 희망찬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꿈에 부풀어서 간구하시지 않습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습 이대로 가다가는 절대로 하나님의 양자의 모습이 나타날 수 없기에 탄식하며 간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양자의 특성은 하늘을 향해서는 하나님만을 소망하고, 땅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생각을 담고 계시는 성령님에 의해서만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양자의 모습이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게 생겼습니다. 그렇기에 성령님께서는 하늘을 향한 연약함을 돕기 위하여 땅을 향한 강력함을 깨뜨리시기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이 하나 같이 우리의 바람과 소원과는 반대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바람과 소원이 이 땅을 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 갖고 있는 소원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선이란 이 세상적인 다행(多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잘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선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양자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자는 세상에 대해서는 약한 정도가 아니라 죽은 자입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향하여 강력한 활동력을 보이는 자입니다. 빌라도 앞에 계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그러하였습니다. 성령님께서 움직이시지 않는 한 예수님은 완전히 맹물이셨고 약하다 못해 죽은 자와 똑같은 상태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향해 계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계셨고, 아버지의 좋음을 향하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소망이 너무나 강력하셨기에 이 세상에서는 거의 죽은 자처럼 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 죽은 자가 되어야 성령님께서 내 몸을 움직이실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 간구하십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육체에 달라붙어 있는 동안에는 세상을 향해 강력함을 보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성령님의 간구하심을 들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주권자로서 세상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깨뜨리시고 부수시고 막으십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궁극적인 선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의 양자로 살게 되는 것이 선입니다. 이 선을 위해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의 의미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내 인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29절을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모습의 아들들로 삼으시기 위하여 예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하는 아들들이 너무나 연약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세상의 아들이 되었고,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의 아들로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서는 강력했습니다. 세상에 대해 강력한 만큼 하나님에 대해서는 연약한 상태인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연약함이 부서지고 마귀의 아들이었을 때의 습관대로 살아가는 상황이 강력하게 깨지도록 간구하십니다.

나의 삶에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면 인생이 패배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된다면 인생에 패배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형통하다면 마귀의 자식으로 강력함이 마음대로 표현될 수 있도록 허락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24절에서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 세상의 의미는 하나님 아들의 모습을 갖추는 데 있습니다. 한 아기가 엄마 자궁에 잉태되면 10개월 동안 사람의 모습을 갖춰가게 됩니다. 아기는 사람의 모습이 완전히 갖춰질 때까지 엄마 자궁에 있다가 세상에 태어납니다. 온전한 모습의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태어나고 나면 더는 어머니의 자궁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의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은 어머니 자궁에서의 10개월과 똑같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자궁에서 하늘에 계신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갖추고 나면 천국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천국에서는 아무도 자궁인 세상에 대해 털끝만큼의 미련도 애착도 기억도 갖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놀라워하는 대단한 일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자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갖추어지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있다고 느끼고 좋다고 열망하는 사람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세상이라는 자궁 속에서 머물고 있다고 해서 절대로 육신으로 만나는 피조물을 있다고 느끼고 좋다고 열망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유지되면 내 주변의 피조물도 해방되고 내 몸도 해방됩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내 몸을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움직이시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아들의 모습입니다.

아들로서 내가 무엇을 하느냐는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될 것입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아들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 아들의 모습이 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선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아들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우리는 연약합니다. 땅을 향한 소망의 능력에 비하여 하늘을 향한 소망의 능력이 너무나 연약합니다. 땅을 향한 소망의 기질이 강력하게 발동되기에 성령님께서는 땅을 향한 모든 소망이 깨뜨려지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

예를 들어 내가 건강하게 백 세까지 살기를 소망합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는 백세에 붙은 의식과 마음을 분리시키고 그렇게 되지 못하게 하십니다. 돈을 가졌으면 좋겠다, 승진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분명하다면 성령께서는 이 세상을 향한 소망들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간구하십니다. 이 세상을 향한 나의 소망이 끊어지지 않는 한 성령님은 나의 원수처럼 간구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국에 있는 모든 천군천사들과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늘에 속한 모든 권속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으면서 한마음으로 원하는 것은 나의 의식과 마음이 완전히 육체를 떠나 하늘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이고 하나님의 아들 된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실패의 삶을 반복하는 이유는 성령님께서 하늘을 향함에 있어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아직도 세상 것을 바라는 나를 방해하시며 막으시고 세상을 향하는 소망을 깨뜨리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직도 살아있는 이유입니다. 아무쪼록 성령님의 간구하심의 의도를 빨리 파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향해 강력함이 나타나고 하늘을 향한 연약함이 드러날 때마다 자발적으로 십자가로 올라가야 합니다. 십자가로 올라가지 않으면 성령의 간구를 통하여 깨뜨려지고 부서지고 막히는 삶의 경험들이 끝없이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하는 한, 자발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지 않는 한 성령님은 세상을 향한 강력한 소망을 깨뜨리시는 간구하심을 쉬지 않으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성령님의 깨뜨리시고 부수시며 막으시는 간구하심이 너무나 감사한 것임을 깨닫게 해주셔서 성령님과 한마음이 되어서 자발적으로 세상을 향한 강력함이 나타날 때마다 우리를 못 박아 죽이는 역사가 오늘도 수없이 반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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