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의인이 믿음으로 살면 그럼 악인은?>의 줄거리:
의인은 오직 믿음 하나로만 삽니다. 이 믿음은 십자가 예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여서 그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에서 출발하여 부활의 자리에 이르러 하늘과 땅으로 뻗어나간 믿음입니다. 그러면 악인은 무엇으로 살까요? 십자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 하나만 없을 뿐입니다. 본문은 악인이 경건치 않음과 불의로 산다고 하십니다.
의인이 믿음으로 살면 그럼 악인은?
(로마서 1:18~32)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의인이 믿음으로 살면 그럼 악인은?>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의인이 믿음으로 살면 그럼 악인은?”
제목을 풀어보자면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면 그럼 악인은 무엇으로 산다는 것인가?”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악인이란 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먼저 의인의 의미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의인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와 반대로 악인은 십자가 복음의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함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여기심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따라서 모범시민으로 아주 착하게 살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십자가 복음의 은혜 안에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지 못한다면 악인으로 분류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18절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심판하시고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지금도 하늘로부터 악인을 향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면 악인이 무엇으로 사는지에 대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악인은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로 삽니다.
십자가 복음에 대한 믿음 없이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악인입니다. 이 악인들의 삶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지라도 실상은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나는 가운데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십자가가 누락되었다는 것은 의식에서 십자가의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을 갖고 사는 모든 사람들이 악인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지금도 나타나는 중입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의 진노를 보는 것조차 믿음의 눈으로만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드렸듯이 지금도 경건하지 않고 불의를 일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있음을 보거나 알지 못합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고 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사도 바울과 같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믿음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진노를 알기에 진노가 주어지지 않는 삶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17절을 보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자기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무덤을 통과하여 세상 밖으로 나가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내용입니다.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동일시하는 믿음을 가지면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럴 때 믿음은 하늘과 세상으로 뻗어 나가며 확장됩니다.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서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있음과 좋음에 대한 믿음으로 확장되고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이 참 현실이고 유일한 현실로 포착할 수 있는 믿음으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이 가득 채워져 있음을 보는 믿음으로 확장됩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삶에서는 믿음의 판이 만들어지고 믿음으로만 살게 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내 안으로 들어올 때 나는 하나님의 장갑이 됩니다. 또 하나님의 주권이 내 바깥에서 역사하실 때는 나는 맹물이 됩니다. 세상에서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 부활한 나의 주체성은 하늘을 향해서만 열망과 욕구와 소원을 갖게 됩니다. 하늘을 향해 끊임없는 간구가 지속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삶입니다.
한편 악인은 죄로 삽니다. 로마서 14장 23절을 보면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그렇기에 의인은 믿음으로 살지만 믿음이 없는 악인은 죄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에서는 이 죄를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결과가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지금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기준으로 삼아 의인과 악인의 삶의 모습을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기 전에 나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지만 악인은 죄로 삽니다. 이 죄의 내용은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삶에 끼어 있느냐 없느냐로 정해집니다. 본문 29~31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가 제거된 삶에서 나타나는 모습을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엄청나게 악한 한 사람을 모델로 삼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 하나하나를 따져보자면 아무리 착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삶에서 십자가 생활화가 누락된다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 하나가 없을 뿐인데 이러한 삶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로 대표되는 인간의 모습을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이처럼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존재하는 세포 하나하나까지 주권적으로 장악하고 인도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악 때문에 나의 들숨과 날숨을 주장하셔서 살아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처럼 의식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경건하지 않은 죄입니다. 이로부터 경건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나를 빤히 내려다보시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손길은 나의 세포를 움직이고 나의 호흡을 허락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느끼는 것이 경건함입니다. 반대로 경건하지 않음이란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 마비가 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가정이나 직장에서 마주하는 사람과 과제에 집중하는 동안 하나님의 존재감을 완전히 잊어버릴 때가 있을 것입니다. 경건하지 않은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발생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 있는 대상들의 존재감을 하나님의 존재감보다 먼저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대상들에 대해서 경건해진 것입니다. 내가 어떤 대상에 대해 존재감을 먼저 느꼈다면, 그 존재감을 느낀 대상에 대해 경건한 자세를 취하게 된 것입니다. 그 대상이 돈이라면 돈을 벌고 많이 갖고 싶은 열망을 품게 됩니다. 돈에 대해 경건한 자세를 갖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의식에서 있음을 느끼는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에 대해 경건합니다. 그 존재감의 대상 앞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존재 앞에 있다는 생각이 바로 경건함입니다. 다만 본래 누구에게나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이 되셔야 할 분은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세상의 대상들에 의식이 매여 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세상에 대해 경건한 자세를 취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에 대한 경건함에서 비롯된 생각과 뜻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불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어떤 순간과 상황과 대상에 대해서도 생각과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세상 것의 있음만을 느끼는 상태에서는 세상에 대해서 경건한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그럴 때 세상에 대해 갖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은 제거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일들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기에 다 불의한 것이 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내가 죽었다는 믿음 하나가 없을 뿐인데 경건하지 않고 불의한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29~31절에서 열거한 모든 악함이 발생하는 이유는 바로 “나는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라는 믿음 하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없어서 경건함이 사라지고 불의가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경건하지 않고 불의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어떻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그 대표적인 예로 당시 종교의식에서 행해지던 매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신전에는 종교의식을 위해 매음을 하는 남녀 창기가 있었습니다. 종교의식의 과정에서 매음이 정당화되었고 일상적인 삶 전반에 걸쳐 성적 문란함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극단적 성적문란이 도달한 상태가 동성애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더러운 정욕 가운데 내버려 두셨다는 이야기가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동성애를 하는 사람에 대해서 그것이 악한 일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심판과 형벌이 주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의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 아무런 문제도 없이 보통 사람들같이 잘 살아가리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노라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비단 동성애에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29~31절에서 갖가지 죄악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악을 행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이 그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의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멋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 보응이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진노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행위에는 마땅한 결과가 주어져야 된다고 봅니다. 추악한 탐욕을 부리고 악의로 시기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분쟁을 일으키고 사기를 쳤으니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악독한 사람이 계속해서 잘 먹고 잘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야말로 이미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정부패한 정치가들이 잘 먹고 잘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셨기 때문입니다. 부정부패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보응이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정부패를 하면서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이 보여야 되기 때문에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기꾼과 도둑이 잘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 또한 벌을 받고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왜 하나님의 진노이고 보응인지는 천국의 기준이 아니면 알 수 없습니다. 천사들이 이 세상에 있는 동성애자들을 볼 때 어떻게 느낄까요? 혹은 돈과 권력이 좋아서 권모술수를 써서 이 세상에서 승승장구하는 사람을 볼 때 어떻게 느낄까요? 천국에도 화장실이 있다면 화장실에 가서 토하고 싶을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라고 하였습니다. 또 26절에서는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온몸에 배설물을 묻히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명동 한복판을 돌아다닌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을 더럽게 여겨 피할 것입니다. 이것이 형벌을 받아서 부끄러움을 모르게 내버려 두신 상황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사기를 친 사람이나 부정부패한 정치가가 잘 먹고 잘사는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이 형벌을 받는구나.”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천사들이 토할 수밖에 없는 역겨운 상태를 허락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진노를 나타내셨음이 보이십니까? 악인은 이러한 진노 가운데 살아갑니다. 28절을 보면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징벌을 받는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두기를 싫어해서 다른 대상을 의식과 마음에 끌어들이자 더러움이 발생하고 그로부터 발생한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생각과 감정과 의지대로 사기와 거짓말과 불의가 통하게 허락하십니다. 그 더러움 속에 그대로 남아있게 내버려 두시는 것을 사도 바울은 형벌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을 보면 이와 대비되는 구절이 나옵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가치들을 좋게 여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가치들을 얻기 위하여 거짓말하고 도둑질도 합니다. 심지어 아무도 그것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가치들을 갖고 싶어 하는 것 자체가 배설물을 먹으려 하는 것처럼 역겨운 일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이러한 역겨운 일을 내버려 두시는 것을 형벌이라 여긴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지 않는 악인의 삶은 부자로 살고 건강하게 살아도 더러움 속에 갇혀버린 형벌입니다. 이것이 형벌임을 아는 사람은 십자가를 붙잡고 이 세상에 대해서 죽기를 원하게 됩니다.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가 믿음을 대체합니다. 경건하지 않음은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계획과는 무관한 자기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불의가 나타납니다. 이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가 지속되는 가운데 더러움이 충만한 상태가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계획하는 일들이 다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의 삶이 형통해보여도 하나님의 형벌과 진노가 나타나는 중임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볼 수 없으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처럼 의인이 되어서 믿음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지금도 십자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나마 불의하고 더러운 가운데 욕망하는 일들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진노보다는 사랑으로 이끌고 계시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상관없이 살면서 악의와 불의와 더러움을 드러내면서도 이 세상일이 순조롭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입니다. 엘리트 코스를 가고 형통하고 잘 될지라도 똥통에 버려두시는 형벌과 진노가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잘 사는 사람은 서울의 강남에 다 모여 있다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강남을 어떻게 보십니까? 강남에 살아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 있다면 문제는 없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이기에 강남에 살든 어디에 살든 상관이 없습니다. 부활의 자리에서 아버지가 시키시는 지시를 따라 강남이라는 곳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모른다면 어떨까요? 사람들이 강남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침 흘리며 추구하는 가치가 집중돼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모르고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 없다면 의인이 아니고 믿음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서 세상을 빠져나가 부활의 자리에 있지 않는 한 믿음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를 모르면서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돈 많이 벌고,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 차지하고, 다른 사람보다 형통하고, 다른 사람보다 좋은 의료혜택을 받아 오래 살지만 이것은 형벌입니다. 십자가 생활화 없이는 세상을 빠져나가 부활에 자리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강남의 삶은 하나님의 형벌을 지독하게 받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렇기에 그곳에서도 십자가는 전해져야 하고 십자가 생활화의 삶은 이루어져야 하고 부활에 이르는 의인은 나타나야만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제거된다면 강남을 노래 부르는 것은 너무나 무서운 일입니다. 대한민국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실제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장소가 바로 강남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강남에 살고 계신다면 정신을 바짝 차리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의 죽음을 따라 무덤을 거쳐 날마다 부활의 자리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자리에서 확장되는 하늘을 향한 믿음과 이 세상을 향하는 아버지의 주권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사실 수 없다면 큰일이 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그러나 악인은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로 삽니다.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서 나오는 악하고 더러운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삶을 산다면 아버지의 진노가 지금 하늘로부터 임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점을 깨닫는 자들만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으면 의인이지만 십자가를 놓치면 악인이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로 살면 아버지의 진노를 받음을 알았습니다.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서 나오는 생각대로 되는 삶을 살지 않도록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오직 의인으로서 십자가 붙잡게 하시고 세상 바깥에서 믿음으로만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