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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사람으로 넉넉히 이기는 법>의 줄거리:
뭘 자꾸 바라거나 이루려고 하지 말고 그냥 이미 주시는 사랑이나 잘 받는 것이 평생 사명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은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그 객관적인 사실을 나의 현실로 삼는 일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날마다 넉넉히 이기는 법은, 삶의 모든 상황은 주어지는 대로 놔두고 기쁨을 하나님만으로 하는 겁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넉넉히 이기는 법
(로마서 8:35~39)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사랑으로 넉넉히 이기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넉넉히 이기는 법”
본문에서는 정말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을 다 열거하시는 것 같습니다.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당할 수 있는 모든 어려움일지라도 넉넉히 이긴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금요일 말씀의 속편이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시려는데 강조점이 있지 않습니다. 이미 앞에서부터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시려고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이시고 부활시키시는 엄청난 사랑의 역사가 있었음에 대하여 누누이 반복하여 직간접적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새삼 강조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제하고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실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써먹고 있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읽을 때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은 객관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삶의 현장에서 써먹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생활화의 취지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교리의 창고에 넣어두어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써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써먹을 수 없다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낭비하는 것이고 모독하는 것입니다. “써먹다”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썩 경건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은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써먹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늘 말씀드렸듯이 이 사실은 현실이 되어야만 합니다. 인도가 있고 아프리카가 있다는 것이 객관적 사실이지만 나의 현실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님의 사랑에 비교하면 그 양과 질에 있어서 백만 배, 천만 배도 넘습니다. 문제는 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실제 삶에서 써먹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의미를 노래하듯이 반복하여 나누었고 기억해왔습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은 전적으로 하나의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일상에서 써먹는 것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이 일어난 유일한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생활화는 생물학적 부모님 사랑의 백만 배, 천만 배도 넘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통하여 실제로 써먹는다는 취지가 들어있습니다.
한편 본문 37절을 보면 객관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넉넉히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35절에서 언급된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에서 넉넉히 이긴다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환난은 근심과 재난을 말합니다. 곤고는 운신할 수 없을 정도로 좁은 벽에 갇히는 상태이고, 사방의 벽이 조여 와서 꼼짝 못 하게 가두어 버리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박해는 종교적인 이유에서 억압당하는 것이고, 기근은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이고 더 확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일상에서 필요한 것들을 조달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적신은 실제로 가진 것 없이 완전히 알거지가 된 상태입니다. 위험은 목숨에 대한 각종 어려움이며, 칼은 살의나 대적의 마음을 가지고 해치려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인간이 사는 동안에 부딪힐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어려움을 다 열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특정한 상황을 가정하여 언급한 내용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상황들을 실제로 경험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 사도 바울이 당한 환난이 자세하게 언급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읽다 보면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요 나라와 민족과 개인의 모든 삶까지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독생자까지 주시며 사랑하신다고 했는데 어떻게 이러한 극단적 고통과 위험의 상황들이 끝없이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일까요? 그리고 사도 바울은 어떻게 이러한 인생의 고난과 고통을 끊임없이 몸으로 체험하는 중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넉넉히 이긴다고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런 사도 바울의 상황을 간과하고 넘어가기 쉽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없어야 좋다고 여기는 성향을 태어날 때부터 배워서 몸에 익혔고 무의식중에도 발동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보자면 사도 바울의 넉넉히 이긴다는 표현은 기분이 나쁠 정도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로 대표되는 인간의 삶에서 당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어려움들이 반드시 주어질 수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넉넉히 이겼다면 삶에서 문제가 없어야 하지 않을까요?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독생자까지 주실 정도로 사랑하신 사람들이라면 삶에는 문제가 없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실질적으로 문제들이 주어져도 넉넉히 이길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이김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기기 위해서는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로 대표되는 삶의 어려움이 다가올 때 맞서 싸워서 없애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결코 그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3차에 걸친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려움이 주어질 때마다 맞서 싸우거나 극복하거나 무찌르는 식으로 이기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속수무책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늘 당했고, 때로는 동료나 제자들의 권고를 따라 위협을 피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으로부터 이긴다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이 실라와 함께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를 생각해봅니다. 이들은 죽기 직전까지 매를 맞고 피를 철철 흘리며 지하 감옥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기도하며 찬양하였고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도망치지 않았고 오히려 이 일은 간수와 그 집안이 구원받는 계기가 됩니다.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해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이김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령 돈 문제 때문에 곤고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사방이 돈 문제라는 벽에 막혀서 운신의 폭이 없고 숨이 꽉 막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폐쇄공포증이라는 말이 있듯이 정상적인 사람도 문제로 사방이 가로막혀서 운신의 폭이 사라지면 어쩔 줄 모른 채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김이란 돈 문제를 극복하거나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의 출옥을 이김이라 여기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다가올 때 맞서 싸우려는 생각은 오히려 지는 것입니다. 어려움으로 인해 주눅 들고 슬퍼하고 우울해하는 것 또한 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넉넉히 이김이란 올 테면 오라고 하듯이 어려움의 상황을 내버려 두고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한두 번 겪을까 말까 한 어려움을 사도 바울은 취미라도 된 듯이 노상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 어려움들을 그대로 놔두고 충분히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육체로 만나는 어려움의 상황들에 대해서 줄어들고 상쇄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줄어들었는데도 넉넉하게 기쁘고 즐겁다면 그것이야말로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길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주시려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랑한다면 주시는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해서 사랑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주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요 주권자이시지만 이 세상에 대해서는 단 하나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주시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기근 대신 풍년을 주실 수도 있고, 환난 대신 안정을 허락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육체의 안정된 조건이나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형통이나 건강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항목 속에 포함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고 주권을 펼치시기 위해 필요한 재료들을 동원하시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주시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주시는 사랑 때문에 나타나는 일은 이김입니다. 육체로 인해서 겪게 되는 이 세상의 어떤 어려움이 주어지더라도,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어려움을 총망라해서 주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가졌다면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자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생기는 슬픔의 양과 하나님이 있어서 생기는 기쁨의 양을 생각해보면 아무리 돈이 없어 슬프더라도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의 양이 넉넉하게 이깁니다. 그렇기에 나의 마음을 기쁨과 즐거움의 상태로 유지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앞서 사도 바울이 당한 환난을 언급한 말씀에서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십대를 맞으면 틀림없이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쳤습니다. 사형은 아니지만 죽기 직전까지 두드려 팬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식의 고난을 끊임없이 당했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박해를 받았으니 몸이 평안할 날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몸이 그 정도로 지독하게 괴로운 상황에 처했는데도 사도 바울의 마음은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주어진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이 너무 커서 몸에 주어진 고통을 상쇄하고도 넉넉하게 남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이김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넉넉한 흑자 상태를 유지하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기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사도 바울이 우리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이 진정한 믿음을 확인한 때는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몸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순간에도 하늘이 열리고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그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동시에 땅에 있는 스데반 집사님에게는 성령님이 오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몸이 돌에 맞아 죽는 극한의 고통조차 상쇄하고도 남는 넉넉한 평안 속에서 돌아가십니다. 세상을 이김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해야 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로 만나는 삶의 현장에서 부족한 것을 이루기 위해 소원하거나 무엇을 성취하고 계획하고 뜻하는 것은 이김이 아닙니다. 삶은 되는 대로, 주어지는 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지난 금요일에 7~8년 이상 십자가 복음방송을 들어오신 분이 찾아오셔서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분께서 오래전에 전화를 하신 적이 있는데 집사람이 전화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언젠가 한 번 강릉에 가서 찾아뵙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집사람이 “예, 되는 대로 하시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보통 이런 말을 하면 구체적인 날짜나 장소를 조정해보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이 대답이 기억에 남으셨다고 합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살뜰한 대답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마치 큰 스님이 제자들에게 화두라도 던진 것처럼 이 대답이 몇 년 동안 잊히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을 듣는 중에 “정말 되는 대로 살아야 되겠구나!”라는 것을 깨달으셨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되는 대로 살면 됩니다. 되는 대로 내버려 두셔도 됩니다. 우리가 총력을 기울여야 할 일은 객관적으로 확인되고 있는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써먹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주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은 객관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사랑에 의해서 주어진 내용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써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의 내용물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박국 3장 16절을 보면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바벨론 침공으로 예루살렘과 성전이 멸절될 것임을 예언하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자 창자가 흔들리고 뼈가 썩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17을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라고 하였습니다. 삶에 주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욥기에서 욥의 부유함을 표현하는 내용과는 반대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18절에서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없다는 말을 여섯 번이나 반복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생애에서 좋다고 여기며 살았던 것 중에 여섯 가지를 골라서 없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이 없을지라도 구원의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랑 속에서 하나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 사랑에서 오는 기쁨은 여섯 가지가 없어서 생길 수 있는 슬픔과 괴로움과 고통을 다 상쇄하고도 넉넉히 남습니다. 이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이김은 곧 기쁨으로 남는 장사하기입니다. 즐거움에서 남는 장사하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하나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가지면 이 세상에서 몸으로 만나는 상황에서는 여섯 번이 없을지라도 기쁠 수 있습니다. 좋다고 생각하고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너무나 갖기를 원했던 것들이 여섯 가지가 없다면 거의 다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가지자 기쁨과 즐거움에서 남는 장사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김입니다.
이러한 이김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연합하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과도 연합하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본문 34절에서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간구하심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이루실 때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육체로 만나는 이 세상에서 여섯 가지 방면으로 없는 상태가 됩니다. 내게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인 상태입니다. 하나님뿐일 때에 이 세상에서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기쁨과 즐거움에 대해서 엄청나게 남는 장사를 하게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여섯 번이나 없음을 반복하고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로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여섯 가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기뻐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없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고, 포도나무 열매가 넘쳐나고, 감람나무 소출이 넘쳐나고, 밭에는 먹을 것이 풍부하고, 우리에는 양과 소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면 여호와 하나님만으로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것들을 다 갖고 있어도 하나님을 가질 수 없다면 기쁨과 즐거움의 장사에 있어서는 반드시 손해를 보게 됩니다. 넉넉히 이기는 것과는 반대로 그 많은 것들을 갖고 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기쁨과 즐거움은 사라져갑니다.
넉넉히 이기기 위해서는 없어야 합니다. 없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가 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으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면 이 세상 것들이 여섯 가지 방면으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되더라도 남는 장사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서 이 세상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만드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육체로 만나는 세상에서는 무엇이 있더라도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여러분에게 하박국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상태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환난과 곤고와 박해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의 상황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실제로 주어졌는데 십자가가 없다면 완전히 쫄딱 망하고 완벽한 손해의 상황이 됩니다. 반대로 있어도 의식과 마음에서는 없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의식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느끼는 상태가 되어야 하고,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좋음만을 소원하는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기쁨과 즐거움에서 반드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질 수 없다면 하박국 선지자와 사도 바울의 상황과는 반대되는 안정적이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상황들이 주어질지라도 절대로 즐거움과 기쁨에서 남는 장사를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가지면 가질수록 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여섯 방면으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넉넉히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끊임없는 환난과 고난과 박해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어려움으로 인해서 상쇄되는 기쁨과 즐거움을 제외하고도 하나님을 가짐으로 인한 기쁨은 엄청난 양의 흑자를 남겨줍니다. 이것이 이김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35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하였고, 또 39절에서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고 써먹으려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만 됩니다. 오늘도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육체로 만나는 삶에서 여섯 가지 방면의 없음이 주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체로 만나는 실제상황 속에서는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의 의식과 마음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없는 상태가 벌어지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있음이 되시고 오직 하나님만 좋음이 되시는 상태에서 하나님 자신으로 인해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몸으로 만나는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기쁨과 즐거움으로 넉넉히 이기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낭비하지 않고 묵히지 않기 위해서 십자가 생활화를 합니다. 이 십자가로 시작되는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에서 주님과 하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주시려는 하나님 자신을 소망 가운데 만나게 하시고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이 이 세상에서 내 몸으로 만나는 상황이 어떻든지 넉넉히 흑자가 됨으로 이기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