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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2

녹취문: 하나님의 사람 차별에는 답이 없다_태승철 (로마서 9:14~29)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5.07|조회수57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의 사람 차별에는 답이 없다>의 줄거리:

이삭과 야곱과 모세를 택하시고 이스마엘과 에서와 바로는 버리시는 하나님. 그렇게 선택하시고는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반면 그렇게 버리시고는 강퍅함과 완악함에 가두어 두십니다. 불공평해 보이는 정도가 도를 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을 차별하심에 대해서 이 우주 안에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항의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차별에는 답이 없다

(로마서 9:14~29)

 

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람 차별에는 답이 없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차별에는 답이 없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13절에서는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에 이어서 본문 18절 말씀을 다시 보면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인간이 완악하게 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60만 장정과 그들에게 속한 여인과 노인들을 포함한 모든 성인이 광야에서 죽게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 사람을 완악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진노하심은 모순처럼 여겨집니다. 이러한 의문은 선택과 예정에 관한 이야기에는 꼭 따라붙기 마련입니다.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볼 것입니다. 온라인교회 모임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것은 의문이 생기고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씀하시는 순서와 과정을 따라서 정한 본문 만큼만을 생각하며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생기는 의문이나 납득할 수 없음으로부터 생기는 저항감 같은 것들이 앞으로 계속 이야기가 될 것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인도하는 부분까지를 주제로 삼아 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과 야곱과 모세를 택하셨고 이스마엘과 에서와 바로는 버리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선택한 사람들은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반면에 버리신 사람들에 대해서는 강퍅함과 완악함에 가두어두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자면 불공평의 정도가 도를 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결론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 차별에 대해 우리가 아무리 이의를 제기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람 차별을 고치실 마음도 없으시고 수정될 수 있는 길도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차별에 대해서는 내가 차별을 받는 자인가, 차별을 당하는 자인가의 문제가 중요할 뿐입니다. 차별적으로 사랑을 받거나 차별적으로 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 차별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차별을 받는 자입니까? 차별을 당하는 자입니까?

이와 관련해서 본문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이전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차별에 의해서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끊이지 않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불쌍히 여기심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러한 사람들이 차별적으로 사랑을 받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멸시하고 우습게 여깁니다. 이 점이 분명해야만 하나님의 차별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차별당해서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과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면 마땅히 선택받아서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과 긍휼히 여김을 받는 사람을 부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누구도 하나님께 선택받고 차별받은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점만 알아도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불공평하심에 대한 의문은 많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심에도 차별은 계속된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45절에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차별 없는 분임을 드러내시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시고 공기와 물을 주심에 있어서도 차별을 두지 않으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관계하실 때에는 긍휼히 여기심과 불쌍히 여기심에는 의도적인 차별이 발생합니다.

잘 생각해보면 햇빛과 비와 공기를 차별 없이 주시지만 차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차별이 없으시지만 차별적으로 선택한 사람들과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햇빛과 비와 공기를 대하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똑같이 주시는 햇빛과 비와 공기에 대해서 차별적으로 선택받은 사람은 주어진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그러나 차별적으로 선택받지 못한 사람은 감사하는 법이 없습니다. 물론 몸이 아파서 외출을 못하거나 감옥에 갇히는 바람에 햇빛을 그리워하는 상황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삶에서 모든 것에 대한 감사는 선택받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의 감사를 절대로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앞선 14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13절의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는 말씀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하셨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 차별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조물주이심을 기억하는 것 외에는 다른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15절의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라는 말씀은 출애굽기 33장 19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태어나기 전에 선택하신 사람에 대해서만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주안점을 두고 생각해야 할 부분은 선택과 긍휼의 상관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자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긍휼히 여기시기 위하여 선택하셨습니다. 여기서 긍휼히 여기심이나 불쌍히 여기심이라는 표현은 하나님 마음의 표현입니다. 의미적으로는 같은 말이지만 굳이 차이점을 두자면 긍휼히 여기심은 하나님의 입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불쌍히 여기심은 선민의 처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긍휼히 여김은 하나님께서 선민을 곁으로 끌어오고 싶어 하시는 마음입니다. 불쌍히 여김은 하나님께서 선민이 지금 당하는 처지에서 건져내고 싶어 하시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 긍휼히 여김은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마음이고 불쌍히 여김은 나쁜 상태를 벗어나게 하고 싶어 하시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조물주로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영원토록 천국의 하나님 보좌 곁에 두고 싶으신 사람을 결정하십니다. 그렇게 결정된 사람이 선민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곁에 그가 있어야 할 자리를 미리 만들어 놓으십니다. 다만 그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 동안은 하나님 곁에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상태에 대해 몹시 허전한 마음을 느끼십니다. 이 허전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불쌍히 여기심이 나타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에 대해 가지는 마음이 긍휼히 여기심과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이것을 좀 더 들여다봅니다. 긍휼히 여기심과 불쌍히 여기심은 처지에 현격한 차이가 날 때 나타나는 마음 상태입니다. 좋고 바람직한 상태에 있는 사람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지으셨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은 천국과 비교하자면 좋다고 할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 갖고 계셨던 태도로부터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태도로부터 보자면 이 세상은 하루빨리 떠나고 싶은 곳이라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머물고자 하는 이유는 천국의 좋음을 확실하게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대한 미련을 보이지 않으셨던 것처럼 천국의 좋음을 안다면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에 대해 미련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훌쩍 떠나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그러한 천국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그 보좌 옆에는 선택하신 사람의 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신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 사람이 있기를 바라며 자리를 마련해두셨습니다. 다만 선택받은 사람일지라도 태어나서 사는 동안에는 원죄 아래에 있기에 의식과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있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자리가 비어있음을 허전하게 느끼시며 이 땅에 매이고 갇힌 의식과 마음을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하게 여기십니다. 여기서 선택하신 사람의 마음을 하늘로 끌어 올리시려는 마음이 긍휼히 여기심이라면, 천국과 비교해서 너무나 안 좋은 이 세상에 갇혀있는 처지에 대해 가지시는 마음이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을 보면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천국에 데려가고 싶어 하시는 마음이 긍휼히 여기심이고, 세상에서 건져내고 싶어 하시는 마음이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께서 당신 곁에 두고 싶다고 결정하여 선택하신 사람들에 대해 가지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같은 선민의 조상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기심과 불쌍히 여기심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것은 그들이 태어난 뒤에 당하게 된 힘든 처지에 의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원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또 모세나 바울이 동족을 위해서 간구하고 기도하였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긍휼히 여기시거나 불쌍히 여기신 것도 아닙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달음박질하는 자는 야곱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이 세상에 대해 간절한 마음을 갖고 열심히 추구한 사람들의 대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시거나 불쌍히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불쌍히 여기심은 순전히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천국 보좌 곁에 두고 싶다고 선택하신 사람들에 대해 보이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천국의 좋음과 이 세상의 좋음의 격차에서 나오는 긍휼히 여기심이고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에 비유하셨습니다. 탕자는 곧 아버지의 집을 떠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세상을 살고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아무런 의식 없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도 있습니다. 그 선민은 아버지의 집에 두시려고 결정하신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두기로 결정하셨기에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는 말도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선택하셔서 곁에 두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을 모른 채 세상을 살고 있는 상태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돼지우리를 전전하는 상태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선택한 사람이 있어야 될 자리를 마련해 놓으셨고, 그 자리가 비어있음에 허전함을 느끼시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허전함에서부터 땅에 갇혀있는 선민들에 대한 긍휼히 여기심과 불쌍히 여기심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존재들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17절을 보면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은 정말 선교나 전도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 화가 날 정도이고, “대체 뭐냐?”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말씀에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에 대해 전혀 불만이 없습니다. 내용만 보자면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 들으면 칼을 들고 죽이려고 달려들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선택받았다는 사람들을 안 됐다고 여깁니다. 애굽의 바로는 출애굽 당시 모세의 적대자이고 상대자였습니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라고 하였는데 “이 일”이란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막았던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고 강퍅하게 하셨고 바로는 출애굽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치셨고 이것은 선민들에게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드러내시고 소개하시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에게 전지전능하심을 드러낼 명분을 만드시려고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자기의 백성들과 함께 광야로 나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다는 요구를 합니다. 이때 바로가 괜찮다고 내보냈다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선민들에게 알려질 기회가 없었습니다. 선민들은 430년 간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며 조상들의 하나님이라는 말만 들어왔지 실제로 하나님을 경험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심과 전지전능하심을 선민들에게 드러내 보여주시려고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라고 바로를 세우신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해놓고 보면 하나님이 아무래도 너무하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19절을 보면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악함을 당연히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완악하게 하셨기에 하나님께 저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완악함은 그 사람의 허물이 아니고 정죄 받을 이유도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은 어떨까요? 질문에 대해 합리적인 대답을 해주면 좋겠지만 사도 바울의 대답은 오히려 그렇지 않습니다. 20절을 보면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대답을 보면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불공평하게 행동하신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와 섭리적인 뜻을 위하여 바로를 완악하게 하셨다면 바로의 악함에 대한 책임을 묻거나 벌을 내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조물주로서 완악하게 하셨다면 누구도 “나는 완악하게 되지 않을 거야!”라고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조목조목 따져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라는 대답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라고 따집니다. 그리고 이어서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라고 대답합니다. 실제로 바로도 하나님께서 완악하게 하셔서 완악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나를 완악하게 하십니까?”라고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탄압하고 싶어 하는 마음만 갖고 있었지, 한 번도 “내가 왜 이렇게 완악하지? 나는 완악한 것이 정말 싫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꾸 나를 완악하게 만드시네.”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가 만들어진 자이고 있게 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있게 된 자는 반문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반문은 실제 삶을 떠난 생각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하심은 실제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일이고, 선택하지 않으심도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삶의 현장의 실제상황을 떠나서 머리로 생각할 때에만 이러한 반문들이 생겨납니다. 선택받았으면 선택받았음을 황송하게 여기며 선택받은 자로서 살면 됩니다. 선택받지 못했다면 선택받지 못한 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선택받지 못한 사람에게 우리가 참견할 바가 못 되는 이유는 그들이 선택받은 자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선택받은 자의 삶을 부러워하면서 선택받지 못했음을 한탄한다면 그 사람은 선택받은 자입니다. 선택받았기에 선택받지 못한 상황을 한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선택받지 못한 사람은 선택받은 사람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직장동료나 아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선택받은 자로서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에 들어간 삶을 살 것입니다. 이때 여러분의 삶의 모습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걸 보신 적이 있습니까?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도 여러분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실제 생활에서 받아들여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정과 선택을 이론화하고 교리화하면 싸움만 벌어집니다. 그러나 실제로 선택받은 자로서 살 때는 하나님의 불공평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라는 말은 사도 바울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성경에는 많이 등장합니다. 이사야서 45장 9절을 보면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토기를 만드는 것은 토기장이의 마음입니다. 그렇기에 만들어진 토기든 지나가던 사람이든 토기장이에게 “왜 토기에 손을 달지 않았느냐?”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습니다. 또 이사야서 64장 8절을 보면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만들어진 토기들이 토기장이의 뜻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은 합리적인 이론으로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선택받았으면 선택받은 자답게 살면 됩니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이 선택받은 자를 하나도 부러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으니 쓸데없이 하나님께서 주권을 시행하심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토기장이 비유를 요즘의 상황에 맞춰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토기장이를 드라마 작가나 소설가라고 생각해봅니다. 드라마나 소설 속에는 주인공이 있고 주인공에 대항하는 악역을 담당하는 조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보면 주인공 안토니오가 있고 악당으로는 샤일록이라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가 나옵니다. 샤일록이 셰익스피어에게 “왜 나에게 악역을 시킵니까?”라고 따지지는 않습니다. 드라마 속에서 악역을 맡은 배우는 작가에게 “나는 악역이 싫습니다.”라고 따지지 않습니다. 작가가 그려놓은 악역을 연기할 뿐입니다. 악역은 주인공을 부러워하지 않고 죽이고 싶어 합니다. 실제 우리의 삶이 이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완악하게 되었다는 바로의 경우를 보면 자기가 완악하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조금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완악함을 더해가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저항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이러한 실제상황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실행되는 현장을 보면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의 상황이란 우리가 전혀 변호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선택받지 못한 상황을 좋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 차별은 답이 없습니다.

 

차별을 받아서 선택받았다면 감사할 일입니다. 차별을 당한 자는 그 상태를 즐기고 좋아하고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차별을 당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진 자들은 선택받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차별적으로 받고 있는 자들을 절대로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실제상황을 보면 하나님의 불공평하심이 이렇다 저렇다 왈가왈부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차별에는 답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차별적 사랑을 받는다면 감사할 뿐입니다. 차별을 당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진 사람의 일에 내가 간섭하며 하나님의 불공평하심을 이야기함은 주제넘은 짓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차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머리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관장하고 주관하고 이해하고 파악해야 하는 주인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접근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생각하고 합리적인 주체가 되어 있으면 선택받은 사람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선택받은 대로 살지 못하고 끝까지 생각으로 반문하는 자는 궁극적으로 선택받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문이 수그러들지 않는다면 선택받지 못한 자일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지음 받은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사람 차별에 답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 차별에서 차별을 당하여 버려지지 않고 차별적인 사랑을 받아 선택되었음을 삶의 현장에서 누리고 즐기며 황송한 마음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 반문하는 어리석음으로 선민의식 자체에 모순되는 행동을 통해 선민 되지 않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불행이 우리들에게 나타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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