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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구원은 내 책임이냐, 신의 선택이냐?>의 줄거리:
이스마엘은 버리시고 약속 안에서 이삭을 택하십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에서는 미워하기로 정하시고 야곱은 사랑하기로 정하십니다. 모세는 긍휼히 여기기로 그리고 바로는 완악하게 하기로 임의로 결정하십니다. 그런데 또다시 구원을 믿음에 관한 나의 책임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입니까? 믿어야 하는 나의 책임입니까?
구원은 내 책임이냐 신의 선택이냐
(로마서 9:27~33)
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구원은 내 책임이냐 신의 선택이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구원은 내 책임이냐 신의 선택이냐”
27~29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핵심적인 개념으로 “남은 자”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27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선민임을 자처할지라도 실제로 남은 자만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2000년 동안 이어온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증거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어서 29절을 보면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씨를 남겨 두셨다는 것은 남은 자를 챙기셨음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챙기지 않으시면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유황과 불로 멸망의 심판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이 하나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당했습니다. 그 의인 열 명이 남은 자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그때에도 의인 열 명에 해당되는 남은 자를 챙기시지 않았다면 소돔과 고모라가 깡그리 멸망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전멸하고 말았으리라는 것입니다.
“남은 자”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선민을 자처하는 이스라엘 전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휩쓸려 버렸음을 전제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모두가 휩쓸릴 때 휩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홍수가 나면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 것 같지만 나무가 우뚝 서서 남아있는 것과 같습니다. 선민을 휩쓸어버린 것은 느낌입니다. 이 느낌이란 땅에 있는 피조물의 존재감을 하늘에 계신 조물주의 존재감보다 더 먼저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 느낌에 이방인도 아닌 선민이 휩쓸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땅에 있는 피조물이 좋다는 느낌을 조물주가 좋다는 느낌보다 먼저 갖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선민이 피조물에 대한 좋음의 느낌에 휩쓸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모든 사람들이 풍요와 다산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부자 되고 부흥하고 형통하며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하나님 자신을 갖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경향에 무릎을 꿇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거스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대세를 이루는 휩쓸림 속에서도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남은 자들은 선민을 자처하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땅에서 부자 되겠다는 열망으로 휩쓸려 버렸을 때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소망하고 하나님 부자 되기를 굳건히 붙잡은 사람들입니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남은 자만이 진정한 의미의 선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선민이 남은 자로서 굳건히 무릎을 꿇지 않고 강력한 대세의 휩쓸림을 거스를 수 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삭과 같이 태어나기도 전에 약속 안에 들어있었기 때문이고, 또 야곱과 같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며, 그리고 애굽 왕 바로 앞에 섰던 모세처럼 임의로 긍휼히 여기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남은 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한편 본문 33절을 보면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라고 그리스도를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선민을 자처하는 이스라엘 사람 전체가 이 세상에서 부자 되고 높아지고 싶다는 열망에 휩쓸려서 피조물의 세계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런데 이 휩쓸림을 거스르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 세상 피조물을 좋아하는 경향의 휩쓸림을 중단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걸림돌이고 거치는 바위에 비유한 것입니다.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이 세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식과 마음이 이 세상을 향하여 휩쓸릴 때 십자가 사건이 걸림돌로 만들어졌습니다. 휩쓸리는 당사자들은 이 세상을 좋아하는 마음으로부터 휩쓸림 속에서 빠져나오기를 두려워합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휩쓸림을 방해하는 걸림돌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면 세상을 향한 휩쓸림은 중단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향하는 휩쓸림을 좋아하기에 걸림돌이고 거치는 바위이신 예수님을 피하거나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구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면 이제까지의 논조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1~32절을 보면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나타난 일이 걸림돌이신 예수님을 끌어안지 않고 버리고 피함이었습니다. 세상의 휩쓸림 속에 머물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구원을 얻을 수 없었던 이유는 걸림돌이신 예수님을 끌어안지 않고 휩쓸림을 좋아해서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논조를 보면 우리는 황당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말해왔던 논조를 성실하게 따라온 것과는 다른 이야기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지 못한 이유를 참 선민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이유는 겉으로 선민이었지 속으로 선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속으로 선민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속으로 선민인 사람이 누군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들 중에서 이스마엘과 다른 아들들을 버리시고 이삭만을 약속의 자녀로 택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에 결정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의 쌍둥이 아들이었던 에서와 야곱에 대해서도 태어나기도 전에 에서는 미워하시기로 예정하셨고 야곱은 사랑하시기로 예정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버리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사도 바울이 힘주어 주장하였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진 이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민을 자칭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선택 밖에 있었던 선민이 아니었기에 끊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주장에 근거하자면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 속에서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자만이 세상을 좋아하는 경향에 휩쓸리지 않고 남은 자로 구원을 얻는 참 선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본문에서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것과는 다른 방향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이스라엘의 책임론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걸림돌이자 거치는 바위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곧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내용을 염두에 두자면 이스라엘이 걸림돌이자 거치는 바위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택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긍휼히 여겨주시기로 결정하지 않으심으로 에서처럼 버리셨고, 바로처럼 완악함 속에 가두어두셨기 때문에 걸림돌이고 거치는 바위이신 예수님을 끌어안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갑자기 9장 끝에 와서 갑자기 책임론을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 선택하심의 논리를 철석같이 붙잡고 따라온 우리에게는 갑자기 뒤집힌 논조가 이상하기만 합니다. 이것이 지난 2000년 동안 신학적으로도 고민과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도대체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가운데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나의 믿음과 책임하에 있는 것일까요? 나의 책임하에 있는 것이라면 선택하셨다는 말은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선택하셨기에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내가 믿어야 된다는 말이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심판이 왜 주어지는지에 대해서도 납득하기 어려워집니다. 이것은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태어나기도 전에 선택하심이 구원을 얻게 되는 원천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믿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구원받음의 여부를 결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논조를 뒤집음에 있어서 로마서를 읽는 우리에게 조금의 미안함이나 주저함도 보이지 않습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제까지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참 선민과 구원을 결정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했기 때문에 구원을 못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기준은 이미 제시되었습니다. 로마서 8장 38절을 보면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와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을 때의 두 가지 다른 상황에서 구원을 바라볼 때 완전히 다르게 설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끊어질 수 없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게 되면 아버지의 사랑과 연결됩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으로 의식이 하나님의 존재감만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으로 마음은 하나님의 소망으로 가득 찹니다. 이 상황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게 주시는 사랑 안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고 구원을 얻은 상태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나의 의식과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철석같이 연결된 상태가 구원을 얻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실제 구원이 이루어지고 나면 나는 정말로 조물주의 아들이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 자신을 주시는 사랑입니다. 나의 의식이 하나님만 있음으로 느끼고 마음이 유일한 좋음으로 확신하고 열망하고 소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나면 나의 뿌리를 알게 됩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자기의 뿌리를 찾아간다는 오래된 소설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서 뿌리를 보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갖고 계셨던 하나님의 선택이 나의 뿌리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주시는 사랑을 직접 받게 될 때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뿌리를 보면 이 세상에 육체로 태어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삭을 약속 안에서 택하셨고, 에서는 버리시고 야곱은 사랑하기로 결정하셨듯이, 바로는 완악함에 가두시고 모세는 긍휼히 여기기로 결정하셨듯이 나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이 보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의식과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밖에 나와 있는 경우에는 어떨까요? 밖에 나와 있다는 것은 의식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보다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의 있음을 더 먼저 느끼고, 마음에서 피조물의 좋음을 하나님의 좋음보다 더 먼저 느끼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으면 이상하게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책임이 주어집니다. 앞서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 된 것이 나의 믿음이 아닌 하나님이 택하심 때문임을 사실로 깨닫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을 때도 사실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을 때는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의 책임임을 사실로 부딪혀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을 때도 교리로 배워서 선민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선민에 대해 알고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이론적으로 잘 알고 있을지라도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교리적 앎을 통해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선민다움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선민다움을 염두에 두지 않고 교리에 대한 생각 속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의식과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밖에 머물고 있으면서 선민다움이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모르고 의식하지 않습니다. 선민에 대한 이론과 교리만을 알고 하나님의 선택과 나의 책임이 충돌한다고 싸웁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선택을 염두에 둔다면 내가 잘못을 해도 하나님이 선택하신 결과인데 어떻게 나에게 잘못을 추궁할 수 있는가?”라는 반문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은 뒤에도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느끼는 마음은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책임감이 사실로 주어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책임을 지는 심정으로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는 주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서 의식과 마음은 하나님께로 가고 아들다움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들다움을 회복한 상태는 예수 밖에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사실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 밖에 있을 때는 내가 책임을 지고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분명히 내가 책임을 지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선택 때문에 가능했음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다시 의식과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밖으로 나가게 되면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책임이 사실로 주어지게 됩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이냐 인간의 책임이냐의 문제는 모순이 아닌 신비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서 아들다움이 나타나면 그 사람은 압니다.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다움은 완전히 하나님의 선택에 기인하였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지난 온라인교회 모임에서 선민다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이 죄수로 포박당했을 때 이 세상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가질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재판하는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을 향해서 사도행전 26장 29절에서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선민다움의 모습이고 선민 됨의 특징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 있으면서 하나님의 끊어지지 않는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은 그 자체만으로 육체로 만나는 삶의 환경과 조건과 처지에 상관치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체만으로 그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최고로 잘된 경지에 왔음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민 됨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선민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이 상황을 알아야만 합니다.
내가 최고로 잘되었다고 여기는 선민다움을 드러내는 상황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러한 선택에 관한 사실을 이론으로만 알고 있으면 선민다움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선민다운 상태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밖에 나와 있는 상태에서 책임이 사실로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셔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이론으로 압니다. 그리고 그것에는 내 공로도 책임도 없음을 압니다.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십자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책임이 사실로 주어집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있어야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으면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음도 알 수 없습니다. 애초에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구원의 문제를 모순이냐 아니냐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만 있다고 느끼고 하나님만 좋다고 소망하게 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아들다움을 경험한 사람도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 밖으로 나가는 일은 벌어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한 것이고 루터는 이것을 날마다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의 데일리 뱁티즘(Daily Baptism)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든 선택에 대한 이론을 다 알고 있어도 그리스도 예수 밖에 나와서 의식과 마음이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고 있는 상태가 되면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책임자가 됩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라는 말씀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가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믿는 것도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믿지 못하면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책임하에 우리가 해야 된다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말씀도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 나는 아무런 책임을 질 이유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왜 이런 모순되는 두 가지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는지 교리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서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함으로써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면 왜 하나님의 선택이 남은 자를 만드시고 참 선민을 만드시며 구원은 선택에 있다는 것인지를 사실로써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듯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간 입장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언급하였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밖으로 나왔을 때는 하나님의 선택에 따라서 구원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나의 책임임을 언급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논리적으로 모순되거나 우리가 헷갈릴 것을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입장에서 할 이야기를 하였고, 또 그리스도 예수 밖의 상황에서 할 이야기를 주저함 없이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교리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하면 구렁이 담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고 모순되는 것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약속의 관점에서 이스마엘과 이삭 중에 이삭의 선택을 언급했고, 사랑과 미움의 관점에서 에서와 야곱을 통해 택하심과 버리심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또 바로와 모세를 통해 완악함과 긍휼히 여기심의 관점에서 선택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갑작스럽게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만의 의견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책임에 대한 이야기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음을 염두에 두고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이야기를 할 때 우리의 책임하에 믿음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이야기할 때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끊어지지 않게 받고 있는 중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뿌리를 찾아갈 때 언급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와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을 때 하나님의 선택으로 인한 구원과 나의 믿음으로 인한 구원은 사실로 주어지는 것이지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 보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선택도 나의 믿음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맨날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따지면서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라고 싸우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 아닌 두 가지 다른 상황에서 부딪히게 되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 경험을 가진 사람에게는 문제 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선택이 사실로 느껴지고, 그리스도 예수 밖으로 나가면 부지런히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책임을 사실로 느끼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선택과 나의 책임의 문제를 이론적으로만 생각하며 모순이네 아니네 하며 따지는 사람들은 아직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서 선민다움이 무엇인가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순처럼 보이는 상황을 이론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하면서 주권이라는 개념을 이론적으로 동원해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틀렸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개념을 동원하는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갖는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면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밖으로 나갈 때는 구원은 나의 책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사실입니다. 끝내 이것이 이론적으로 못마땅해서 싫다면 예수 믿기를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믿음에 대한 책임은 모순이 아닙니다. 상충이나 갈등이 아닌 신비입니다. 아무쪼록 이 신비를 날마다 체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밖으로 나가는 일은 평생 있을 일입니다. 그러나 회복하는 시간이 빨라지고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시간이 적어질 수는 있습니다. 마치 기차 레일처럼 끊임없이 십자가를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놓칠 때마다 그리스도 예수 밖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그리스도 예수 밖으로 나가려는 성향을 계속 못 박아 죽이는 일이 지속되는 가운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의 선택 때문에 놀라운 선민다움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끊임없이 붙잡지 못해서 그리스도 예수 밖으로 나가는 시간이 벌어진다면 내가 다시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책임이 주어집니다. 이 신비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일평생은 지속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으로써의 신비 속에서 사람들은 도저히 생각도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의 세계를 날마다 즐기며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