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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2

녹취문: 하나님 이름이 아까워서 드리는 간구_태승철 (로마서 10:1~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5.12|조회수82 목록 댓글 1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이름이 아까워서 드리는 간구>의 줄거리:

하나님의 이름이 아까워서 드리는 간구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간구입니다.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붙잡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까워서 드리는 간구입니다. 평생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삶 전반을 그토록 열심히 그 이름 아래서만 살면서도 구원을 못 받는 이스라엘은 안타깝고 그 이름은 너무 아깝습니다.

 

하나님 이름이 아까워서 드리는 간구

(로마서 10:1~4)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이름이 아까워서 드리는 간구>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이름이 아까워서 드리는 간구”

사도 바울은 1절에서 하나님께 이스라엘이 구원받기를 원하여 기도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냥 넘어가기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 사도 바울이 선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한다는 말은 너무 이상하고 쓸쓸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이었기에 구원받은 것이 기정사실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마땅히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기도도 했겠지만 굳이 선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점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그냥 넘길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혈육상의 동족이라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이스라엘은 온 지구 위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된 집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하는 이스라엘은 혈육상의 동족이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스라엘이란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창조주를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이스라엘을 우리의 입장에서 이해해보자면 대한민국 국민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의 생활화를 전혀 몰라서 개별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음을 모르고 인정하지 않으며, 기독교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 갇혀서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전 세계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등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믿는다고 생각하는 기독교 종교에 속한 사람들은 누구나 이스라엘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구했던 것입니다.

개별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라는 종교에 속해 있는 한 구원은 없습니다. 종교에 속한 사람으로 있는 한 구원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아쉽고 아깝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입술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상태까지 왔는데도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는 일평생이 구원과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렇게 허비만 하고 끝나버리는 삶이 된다면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평생을 살고도 지옥으로 가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가 창조주를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무척 소중합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심을 교리나 이론의 차원으로라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이름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까지의 과정 자체는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하고 소중한 과정을 거쳤음에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안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라는 사실을 교리로 믿고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사실도 믿고 이름을 부르는 이 상태까지 왔으면서도 구원받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불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너무나 아까워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었고, 그 이름 아래에서 일평생 갖가지 종교의식을 행하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일생을 끝내며 지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태도를 보면 동족을 사랑했다기보다는 이들이 불렀던 하나님의 이름을 아까워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에 75억 인구가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처럼 소중하고 값지고 복된 이름은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부르는 상태까지 왔으면서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은 아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어지는 2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된 이유가 제시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올바른 지식”이 구원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띄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올바른 지식이 없으면 아무리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극에 달해도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이전을 떠올려 보면 일주일 내내 예배당에서 살다시피 하던 기독교 종교인들이 많았습니다. 예배당 관련성을 떠나면 인생에 일도 없고 관계도 없고 삶의 영역도 달리 없는 사람들입니다. 꼭 이렇게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종교의 교리나 이론을 굳게 붙잡고 살았습니다. 혹은 캘빈이나 루터와 같은 위인들의 가르침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다르거나 벗어난 것 같으면 죽일 듯이 달려드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열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심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지식”이 없으면 몽땅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들이 붙잡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이 너무나 아깝게 여겨졌습니다. 다만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고 다음 말씀에서 나오게 됩니다.

구원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올바른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지식이란 무엇일까요? 올바른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 이름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 온갖 열심을 다 하더라도 구원이 없기에 올바른 지식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올바른 지식을 따라야만 합니다. 이것은 제가 하는 말이 아닌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올바른 지식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구원이 무엇인가를 아는 지식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구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다면 받은 구원이 무엇입니까? 둘째, 어떻게 그 구원을 얻는가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자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기독교 종교인들이 특히 가장 강하게 자신하는 것이 구원이 무엇인가, 구원을 어떻게 얻는가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종교인들은 구원을 죽으면 천당 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에 대해서 예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올바른 지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지식이 틀렸기 때문에 평생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구원은 죽으면 천당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맺기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분이시나 세상의 모든 것들은 스스로 있는 분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기인 구원은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의 존재감을 24시간 의식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아내 앞에서, 남편 앞에서, 사장님 앞에서, 일 앞에서, 문제 앞에서, 대통령 앞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존재감은 가장 우선적으로 의식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공회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하였습니다. 산헤드린공회는 이스라엘의 최고의결기관이었고 베드로와 요한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재판을 하는 당사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이러한 산헤드린공회 앞에서도 하나님의 존재감을 먼저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전에 예수님께서 산헤드린공회에 붙잡혀 재판받으실 때 예수님을 부인하며 두려워 떨었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상태와 받지 못한 상태의 분명한 차이입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공백의 마음이 있습니다. 공백의 마음은 어쩔 수 없어서라도 무엇인가를 빨아들여서 채우고자 합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유일하게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음이 하나님만을 빨아들이며 소망하는 상태가 됩니다. 24시간 하나님의 존재감을 의식하는 사람은 24시간 하나님만을 소망합니다. 하나님만을 좋음으로 여겨서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고자 흡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상태가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이 지식이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이 무엇인지를 모르는데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둘째, 그렇다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 한 분에게만 집중하는 구원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빗나감의 죄적 체질이 있습니다. 존재감을 느끼는 대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갑니다. 마음을 채우기 위해 소망하는 대상이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갑니다. 이 빗나감이 곧 죄입니다. 이 죄적 체질을 생각하면 이 세상에 있는 것들과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이 차단된 공간이 필요합니다. 이 공간이 바로 예수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진 그리스도 연쇄과정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셨습니다. 이 그리스도 연쇄과정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는 죄적 체질은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에서 세상이 차단되고 세상을 떠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에 들어가야만 하나님을 유일한 있음의 대상이자 좋음의 대상으로 관계할 수 있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를지라도 예수 이름이 가리키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모른다면 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다른 것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듯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모릅니다. 이러한 상태는 올바른 지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기에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3~4절을 보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는 않고 율법을 지키려고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갔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한 것이고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내가 나의 몸을 움직여 율법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치 않고 자기 몸을 움직여서 율법이라는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 마음에 들고자 하였고 구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도대체 이스라엘 사람들은 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지식의 문제입니다.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좋음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유일한 좋음이라는 무지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아버렸던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스라엘 사람들, 즉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기다리던 그리스도를 20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왕 위에 올라앉을 다윗 그리스도이고, 부귀영화를 가져올 솔로몬 그리스도이며, 이 세상 문제로부터 해방시켜줄 모세 그리스도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가져다줄 그리스도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열심히 부르면서도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이렇게 좋음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존재가 어떠한 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늘에 있는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라는 지식이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올바를 수 없습니다. 이 지식을 가진 사람은 마음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좋음으로 갖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붙잡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세상을 떠나심으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이 계시는 보좌 우편까지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과정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하나님께 갈 수는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심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될 이유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이 원했던 그리스도는 민족을 우뚝 세워서 이방민족들에게 우월함을 보일 다윗 그리스도였고, 부귀영화를 가져다줄 솔로몬 그리스도였으며, 원치 않는 모든 문제로부터 해방시켜줄 모세 그리스도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적 체질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죄적 체질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 엉뚱한 대상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가짜 좋음으로부터 차단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셨기에 살아있는 동안에 세상을 떠나야만 구원이 있습니다.

 

올바른 지식의 문제는 무척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올바른 지식이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단계까지 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시고 계신다.”라는 것을 교리적 이론적으로 인정하는 단계까지 끌어가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 갔을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23절을 보면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알지 못하는 신으로 여기던 하나님을 소개하고 그 하나님께로 가는 길로 그리스도를 제시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주고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심을 교리적으로 알려주고 인정하게끔 하는 과정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 자체는 소중한 일이고 엄청나게 귀중한 과정이 이루어진 단계입니다.

다만 이 단계까지 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평생 부르며 살면서도 올바른 지식이 없어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올바른 지식이란 진짜 좋음이 무엇이냐에 대한 지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진짜 좋음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율법을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내가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예쁘게 여기셔서 세상에서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주실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이렇게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얻게 해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 그리스도나 솔로몬 그리스도나 모세 그리스도를 참 그리스도로 인정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리스도가 오도록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진짜 그리스도이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그 과정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도 않았던 이유는 진짜 좋음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삶의 차원에서 경험으로 알 수 있는 진짜 좋음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 수 없다면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도 없기에 중요한 문제입니다. 진짜 좋음이 하나님이심을 알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가려고 세상을 등질 수 있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붙잡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몸이 죽기 전에 만날 수 있는 진짜 좋음을 어떻게 경험적으로 알 수 있을까요? 진짜 좋음은 이 세상에서 만나는 어떤 나쁨에 대해서도 사라지거나 깨지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았어도 시간이 지나면서 좋음이 사그라지면 진짜 좋음이 아닙니다. 다른 나쁨이 발생할 때 곧바로 좋음이 깨지고 없어지는 것이라면 진짜 좋음이 아닙니다.

이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서울이나 다른 지방에 사시는 분들이 오랜만에 강릉을 오시면 다들 감탄하십니다. 강릉의 해변에서 파란 바다를 보면 너무나 좋다고들 하십니다. 그런데 이 좋음이라는 것이 순식간에 사라질 때도 있습니다. 어떤 분이 10억짜리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강릉에 오셨다가 바다도 보고 기분이 무척 좋으셨습니다. 그런데 돌연 계약이 취소되자 바다의 좋음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립니다. 바다를 보면서 느꼈던 좋음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이유는 그 좋음이 진짜 좋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은퇴한 부부가 그동안 모은 돈으로 남태평양으로 크루즈 여행을 떠났습니다. 아름다운 환경은 낙원 같고 크루즈에서는 산해진미와 갖가지 오락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선원들은 부부를 왕과 왕비처럼 대해줍니다. 그런데 자녀에게 교통사고가 났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남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크루즈로부터 한국에 올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제 그렇게 좋았던 크루즈가 남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감옥이고 지옥이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나쁨에 의해서 깨져버리는 좋음은 진짜 좋음이 아닙니다. 재벌 그룹의 CEO로 발탁되었다면 기분이 무척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CEO가 되고 한 달 뒤에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가보았더니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CEO가 됐을 때의 좋음이 몸이 죽게 되었다는 나쁨에 의해 깨뜨려집니다. 재벌그룹의 총수가 된 좋음조차도 가짜 좋음입니다. 어제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습니다. 이전의 대통령은 떠나고 새 대통령이 들어왔습니다. 떠나는 대통령이 기쁠까요? 새 대통령이 기쁠까요? 떠나는 기쁨이든 취임식의 기쁨이든 그것이 유지될 수 없다면 진짜 기쁨이 아닙니다.

성경은 진짜 좋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증언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몸이 돌에 맞아 죽는 극한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당장 죽게 되었으니 나빠도 이렇게 나쁜 상황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극한의 나쁨 속에서도 스데반 집사님은 하나님의 좋음이 깨지지 않는 상태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바벨론의 침공으로 국가의 전토가 초토화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없음을 여섯 가지나 꼽았습니다. 나쁘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나쁠 수는 없습니다. 나라는 망하고 자신의 삶에도 모든 것이 없어지는 나쁨이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쁨도 하나님 때문에 생긴 좋음을 깨뜨릴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진짜 좋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병이 드는 나쁨,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세 번 태장으로 맞는 나쁨, 한 번 돌로 맞는 나쁨,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내는 나쁨, 옥에 갇히고, 굶주리고 헐벗는 나쁨 등을 겪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몸으로 사는 동안에 겪을 수 있는 나쁨은 다 겪는 나쁨의 백화점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좋음이 깨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좋음이 진짜 좋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진짜 좋음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만 향할 수 있고 가질 수 있고 소망할 수 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은 진짜 좋음이신 하나님을 향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그리스도 연쇄과정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절했습니다. 올바른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이라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세상 것을 좋아했고 세상 것을 소망하는 상태였기에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는 그리스도 연쇄과정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창조주와 주권자로는 믿었기에 율법을 지키면 이 세상 것들을 주시기 위하여 다윗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것이고, 부귀영화의 솔로몬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것이고, 모든 문제로부터 해방시킬 모세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올바른 지식이 없었던 것은 사도 바울의 아픔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고 주권자라고 믿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평생 불렀지만 그 하나님께서 유일한 좋음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 지식 하나가 없어서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이 너무나 아깝게 느껴졌기에 구원을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기독교 종교인들을 위하여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혼자 십자가 붙잡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가담하여 사위일체가 될 수 있음을 알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못하는 기독교 종교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가 주어질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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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에스더54 | 작성시간 22.06.0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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