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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평생 이름 두개만 부르면서 사는 삶>의 줄거리:
부르라고 있는 이름, 우리 각자에게 평생 세 개의 이름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걱정 두려움 사라지고 안 될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실제로 부르는 이름은 하나님과 예수님 두 개입니다. 그냥 빨리 부르고 다음 얘기로 넘어가지 말고, 이 두 개의 이름에 멈춰 서서 깊이 빠져 보세요. 이름 부르기 만으로 달라지는 변화가 놀라울 뿐입니다.
평생 이름 두 개만 부르면서 사는 삶
(로마서 10:13~20)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평생 이름 두 개만 부르면서 사는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평생 이름 두 개만 부르면서 사는 삶”
이 세상에는 천문학적으로 수많은 이름들이 있습니다. 오늘도 지구상에는 75억 명의 입을 통하여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름이 불립니다. 여기서 이름이란 사람의 이름으로부터 시작해서 돈이나 자동차나 건강이나 명예와 같은 구체적인 사물들과 추상적인 개념까지도 포함합니다. 입으로 불리는 것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것까지 다 합치자면 어마어마한 수의 이름이 75억 명으로부터 발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딱 세 개의 이름만 기억하면 됩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입니다. 세 개의 이름만 있으면 걱정할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고 안 될 일도 없습니다. 그나마도 세 개의 이름 중에서 우리가 실제로 불러야 할 이름은 두 개뿐입니다.
이름은 부르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문학적으로 수많은 이름들 중에서 우리는 세 개의 이름만 기억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 세 개의 이름 중에서 특별히 불러야 될 두 개의 이름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성령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하여 기억하며 사용하면 되는 이름입니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도 죽을 때도 부를 이름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이 두 가지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의 마지막 부분은 10장 전체의 내용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다만 선민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망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9절을 보면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모세의 말씀 속에 있는 내용을 가리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모세가 어떤 경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버림당하게 될 것인가를 분명하게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를 좋아하고 모세의 말씀이 엄연히 있음을 안다면 자기들이 버림받는다는 사실을 모를 리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버림받는 일은 생기고 말았습니다. 모세의 말씀이 있는 신명기 32장 21절을 보면 왜 버림을 받는가에 대한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시고 진노하시게 된 이유는 선민이라는 사람들이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의 이름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붙잡은 것들 중에 대표가 풍요와 다산입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부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업도 가정도 부흥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풍요와 다산에 뒤따라온 것이 바알과 아세라 같은 우상숭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우상숭배에 질투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우상숭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풍요라는 이름을 붙잡았습니다. 풍요는 곧 부자가 되고자 함입니다. 부자 되기를 원하는 바람이 하나님을 질투하시게 하고 진노하시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건강하기를 원한다면 그러한 바람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질투하시게 하고 진노하시게 합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붙잡은 이름은 곧 바람과 소원이 됩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아서 하나님 자신을 소원하지 않고 풍요나 건강과 같은 이름들을 붙잡아서 그것들을 소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질투하시고 진노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은 버려지게 되었고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로마서 10장 전체는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못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0장에서 이슈가 되는 부분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허락받아서 그 이름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유일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열심과 열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 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을 올바르게 부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만 있으면 다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에게 하나님 이름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로부터 예수님 때까지 1500년 세월 동안 성전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우리가 기독교 종교인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때와는 완전히 차원이 달랐습니다. 우리는 예배당에 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자 했습니다. 혹은 급한 일이 생겼을 때 기도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직장생활이나 가정생활을 하는 중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필요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버림받게 되었다니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모든 이름은 사람이든 사물이든 존재를 가리키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천문학적으로 수많은 이름들이 있고 날마다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 안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왔습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선민의 특권입니다. 한편 이름과 존재에는 언제나 간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땅에 있고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는 하늘에 계신 것과 같습니다. 돈 100억이라는 이름은 누구나 부를 수 있지만 실제로 5만 원 권을 쌓아서 만든 100억 돈더미 자체와는 간격이 있습니다. 그 이름을 천 번, 만 번 말한다고 해서 실제 돈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각 미남이라는 배우 정우성 씨의 이름을 아무리 말하더라도 정우성이라는 인물과 실제로 만나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선민의 특권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주셨고 선민들은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이 특권이 대단한 이유는 선민이 실제로 하나님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돈 100억이라는 이름은 아무리 말해도 실제와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선민이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를 때에는 그렇게 부르는 사람의 마음이 실제 하나님께 도달하게 됩니다. 조물주이시고 이 세상의 삼라만상과 75억 개인과 나라와 민족을 이끌어 가시는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우성 씨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보아도 도달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조물주이자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나의 마음이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이라는 이름을 백 번, 천 번 불러도 건강해지지 않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한 번만 불러도 실제로 살아계신 조물주 하나님께로 가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서게 해줍니다.
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방식을 따라야 하는 한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성전 방식으로 불러야만 합니다. 이제까지 반복해서 성전의 구조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가장 안쪽으로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곳인 지성소 안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하는 법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성소는 휘장으로 성소와 구분됩니다. 성소에는 분향단과 떡상과 금촛대가 있었습니다. 분향단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함을 의미합니다. 떡상은 하나님만으로 배부름을 의미합니다. 금촛대는 하나님의 배부름의 기운이 말과 행동을 통해서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선민들은 이러한 성전의 모습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올바르게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선민 이스라엘은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부자가 되기를 바라며 풍요와 다산이라는 이름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버림을 당하게 된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버림을 당한 이스라엘을 지적합니다. 성전 방식으로 하나님의 이름 부르기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악한 체질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으로도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거부함이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입으로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조차도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고 귀신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다만 이름은 가리키는 대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성전 방식을 완성시키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자들이나 귀신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절대로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 부름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르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성전 방식이 완성됩니다. 그리고 마음의 지성소는 하나님만을 유일한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그런데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성전 방식을 거부했습니다. 성전 방식 대신에 마음의 지성소에 부자, 건강, 형통 등의 이름을 붙잡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 상태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께도 똑같이 일어났습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10절의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는 말씀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4~15절을 보면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이름 부르기는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고 믿음을 언급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도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귀신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관계할 때는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 눈에 보이고 그 사람과 관계해야 될 필요가 생기면 그 사람의 이름을 부릅니다. 여기서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는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없이 부르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뢰가 없어도 얼마든지 이름을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이름을 부를 때에는 그 이름에 해당되는 상대방의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그 부름은 허공으로 흩어질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도 예수님의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라고 불렀을 때 그 이름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러야 할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어떻게 부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가 불러야 될 살아계신 예수님입니다.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을 부르기 위해서는 나의 부름이 예수님께 도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로마서 8장 34절을 보면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화제로 삼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께 우리의 부름이 도달하려면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 믿음이란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대한 믿음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고 하였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름은 예수님께 도달하는 부름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반응하실 수 있는 부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부를 때 성전 방식대로 불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기에 선민 이스라엘은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부를 때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에 대한 믿음으로 불러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이 세상을 빠져나가셔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이 예수님께 나의 부름이 도달하기 위해서는 나의 부름은 믿음에 싸여 있어야만 합니다. 그 믿음이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과정을 의식할 수 없다면 예수님의 이름을 백 번, 천 번 불러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돈 100억이라는 이름은 아무리 불러도 실제 돈더미에 도달할 수 없고, 아무리 정우성 씨의 이름을 불러보아도 실제 정우성 씨와 만나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실제 그 이름이 가리키는 예수님께 우리의 부름이 도달해서 예수님과 관계가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믿음으로 불러야만 합니다. 그 믿음의 내용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17절을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사건이 말씀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전달받은 이 사건을 마음에 받아들일 때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이라는 사건 속에 계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과 함께 내가 죽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내가 부활했다.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내가 승천했다.”라는 동일시가 이루어져야 지금 보좌 우편에 살아계신 예수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부를 때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는 방식입니다.
사건이 말씀이 되었다는 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20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말씀이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승천 사건도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선포하고 들을 때 말씀 속에 있는 사건이 지금 현재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하고 받아들이면 십자가 사건이 지금 일어나는 것이 되고 나의 마음은 예수님과 결합이 이루어집니다. 부활 사건도 말씀 속에서 전해져서 지금의 사건이 됩니다. 승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마음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의 사건을 따라서 지금 아버지 보좌 우편에 살아계신 예수님께 도달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꼭 의식해야 될 것은 죽음과 부활과 승천입니다. 그리고 사건이 말씀으로 바뀌었기에 반드시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전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전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라는 부름이 지금 하늘에 살아계신 예수님께로 도달하게 되고 또한 예수님이 반응하실 수 있는 길이 됩니다. 전하는 자는 이 길을 깔아놓는 것입니다. 이 길을 따라 마음이 살아계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갔을 때 성전 방식으로 하나님의 이름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성전 방식은 충족됩니다. 성전 방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성전 방식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습니다. 돈 100억의 이름을 불러도 실제 100억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정우성 씨의 이름을 불러도 실제 정우성 씨에게 도달하지 못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하나님께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나의 마음과 의식을 조물주이신 하나님께로 데려다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온라인교회 모임을 통해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볼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전하는 자는 바로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간구하고 계시고 성령님과 더불어 삼위일체로 의논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삼위일체 상태로부터 보냄을 받는 것입니다. 보냄을 받는 자는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불러서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 지금 우편에 살아계신 예수님 안으로 마음이 들어간 자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이고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보냄을 받은 자가 됩니다. 쉽게 말해 그 마음이 천국을 들락거리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천국으로 간 사람이고, 천국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성전 방식으로 부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자로 보내시고 천국을 들락거리는 길을 말씀으로 제시하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이런 이야기를 못 들었기 때문에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들었지만 거부했기에 버림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부른다는 것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을 따라갈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부름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지금 마음의 지성소에서 붙잡고 있는 풍요와 다산으로 대표되는 돈과 형통과 건강 등을 비롯한 모든 세상의 가치를 놓아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의 이름들을 다 포기해야만 되기에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부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 이 땅을 떠나 하늘로 가겠다는 결심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이유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되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이방인에게로 옮겨지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부르면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갔고 마음의 지성소에 오직 하나님만의 이름을 붙잡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상태가 바로 구원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 이외의 다른 이름을 붙잡는 일은 하나님을 질투하시게 하고 진노하시게 합니다. 이름을 붙잡는다는 것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갖고 싶어 하고 그 존재에 도달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하나님을 소망하는 상태를 제외하고 이 세상을 향하여 무엇이라도 바란다면 이미 마음의 지성소에 다른 이름을 붙잡은 것입니다. 성전 방식에서 빗나가버린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그 음성에 질투와 진노로 대답하십니다. 족집게로 집어서 버리실 것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을 두고 세상 것을 원하는 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사람을 쳐다보실 것입니다. 부름에 반응하시며 콕 집어서 내다 버리실 것입니다. 이것이 10장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끝없이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소원하고 바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마음의 지성소에는 다른 이름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존재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부름에 질투와 진노로 응답하셔서 그러한 사람들 하나하나를 집어서 던지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마음의 지성소에 없으면서도 주여! 삼창을 한다면 그 큰 목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반드시 버리실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비유적인 이야기입니다. 소리를 안 낸다고 해서 하나님이 못 들으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이름 붙잡기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붙잡기만 하면 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라가겠다는 결정입니다. 이 결정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우리의 마음은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의 마음은 성전 방식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유일한 있음과 좋음의 대상으로 관계하게 됩니다. 그럼 다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인생도 되고 영생도 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두 이름만 부르며 살고 두 이름만 부르다가 죽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 인생을 이끄실 것이고, 주님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을 가짐으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두 이름에 우리의 생을 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따르겠다는 결정의 믿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고, 그렇게 불러 만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셔서 인생을 얻고 영생을 얻은 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