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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2

녹취문: 타인을 대할 때 드러나는 참선민 여부_태승철 (로마서 11:1~3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5.19|조회수37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타인을 대할 때 드러나는 참선민 여부>의 줄거리:

이해가 쉽지 않은 본문입니다. 일견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에 관한 말씀 같습니다. 그러나 실은 참 선민들의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의 태도 말이지요. 실제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허락된 구원을 누리는 사람은 절대로 지금 현재 그리스도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을 향해 구원 가능성을 닫아버리지 않습니다.

 

타인을 대할 때 드러나는 참선민 여부

(로마서 11:1~36)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타인을 대할 때 드러나는 참선민 여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타인을 대할 때 드러나는 참선민 여부”

오늘은 로마서 11장 전체를 보겠습니다. 먼저 본문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제목을 말씀드리고 본격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1~6절까지는 앞서 9장에서 살펴본 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졌다고 말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의 혈육이 모조리 다 참선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과 선택을 통하여 택한 사람들이 참선민이기 때문입니다. 1~6절은 이렇듯 이삭으로 대변되는 약속의 자녀가 선민이라는 내용을 다른 식으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7~10절까지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씀과 모세와 연관 지어서 긍휼히 여길 자는 긍휼히 여기고 완악하게 할 자는 완악하게 하신다는 말씀이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앞서 언급된 말씀이 되풀이 되는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로서 유대 종교인은 하나님에 의해서 버림받은 자라는 것이 분명해졌음을 말하기 위합니다. 현재의 상황을 직시할 때에 이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가능하게 해주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11~27절까지는 상황이 역전되어 선민이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경고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선택을 하셨습니다. 야곱은 사랑하셨으나 에서는 미워하셨고, 긍휼히 여길 자는 긍휼히 여기셨으나 완악하게 하실 자는 완악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알고 있는 자로서 보면 이스라엘 대부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스라엘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되느냐가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에게 억하심정이 있어서 경고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본문은 구절구절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이에 더해 11장 전체를 기록한 사도 바울의 의도를 파악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11장에 대한 해석들을 보면 사도 바울의 의도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읽어서 알 수 있습니다만 사도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에 대한 궁극적이고 종말적인 구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애초에 로마서는 로마에 살고 있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사도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이들이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26절을 보면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이 종국에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렇게 될 뿐입니다.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고 사실상 2000년이 흐른 지금도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2000년 동안 태어나서 죽어간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서 11장 말씀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언제인지도 알지 못할 종말에 이르러서 다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왜 지금 십자가 복음을 생활화하는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일까요? 더군다나 2000년 전에 로마에 살고 있었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무엇 때문에 그 사실을 알아야 했던 것일까요?

로마서가 기록된 지는 200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로마서가 기록되던 시절의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지도 2000여 년이 지났습니다. 이러한 현재에도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예언으로 보는 것은 수박 겉핥기입니다. 본문은 그러한 의도에서 쓰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도였다면 지금 현재 나에게는 의미 없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2000년 전에 로마에 살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아무 의미 없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본문은 동족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오히려 버려진 듯이 보이는 이스라엘의 유대 종교인들에 대해서 참선민이 보여야 될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선민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향하여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이었던 우리와 이스라엘 사람이었던 유대인의 처지는 뒤바뀌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선민이고 유대인이 외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고 유대인은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선택받아서 남은 자가 된 참선민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서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요? 이것이 본문의 주된 내용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1~6절을 보면 남은 자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나오고 있습니다. 엘리야 시절에 바알에 무릎 꿇지 않은 자 칠천 명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남은 자는 이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에 무릎 꿇지 않은 자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흐름과 경향에 휩쓸리지 않은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온전히 100%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선민이 되었습니다. 한편 유대인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여 버려진 사람들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역전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유대인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유대인도 있었고 이방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을 대표하게 된 이유는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힘들 것 같이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특별히 유대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로마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유대인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회당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율법주의와 할례의 우월감을 가지고 선민임을 자처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은 절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없다고 느껴지는 대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을 대표로 삼아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희박한 사람들을 대할 때에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자들에 대한 태도로부터 진정으로 예수 안에 들어온 참선민인지 아닌지가 드러나고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유대인은 잘못된 선민의식에 빠져서 살다가 그리스도 예수 바깥으로 내쳐지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잘못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살다가 그리스도 예수 바깥으로 내쳐지게 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일어났던 버려짐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유대인처럼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 의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 있는 참선민인지 혹은 그리스도 밖에 버려질 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20절을 보면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높은 마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을 향하여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어지는 21~22절을 보면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원 가지는 그리스도 바깥으로 버려진 유대인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준엄하심을 맞닥뜨리고 버림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성전방식대로 부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지 않으면 찍혀 버리는 가지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준엄하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까? 정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는지는 다른 사람을 향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참선민이고 남은 자인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무는 자라면 바로 그리스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마땅히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나의 마음이 닿아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유대인처럼 영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 결과 마음에서 다른 사람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안하무인이고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가 유지된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준엄하심을 보게 됩니다.

유대인이 선민이라고 하는 계열과 이름으로부터 잘려나가는 가지가 된 것처럼 우리도 잘려나갈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였기에 잘려나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잘려나갈 수 있습니다. 잘려나갈 자인지 아닌지는 예수님 바깥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잘려나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서 긍휼히 여기는 태도가 나타날 수 있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태도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마음이 닿아있을 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는 태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반면 다른 사람을 향하여 무관심하거나 안하무인이거나 천상천하유아독존이거나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면 유대인과 같은 상태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태도를 유지하다가 선민으로부터 잘려나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참선민의 태도를 보일 수 없다면 똑같이 잘려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본문의 근본 의도가 무엇인지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의 궁극적이고 종말적인 구원을 밝힘에 있지 않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처럼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을 대할 때 참선민의 태도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을 대할 때의 태도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접한 사람은 반드시 그 인자하심의 기운에 의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을 향하여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이 세상 것을 가질 때에는 갖지 못한 사람 앞에서 우월감을 갖게 됩니다. 사람을 무시하고 안중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좋으신 하나님을 가질 때에는 이와는 반대의 일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가지면 가질수록 하나님을 갖지 못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커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을 경험하면 경험할수록 세상의 좋음을 경험하는 것의 반대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월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섬겨서라도 내가 갖고 있는 좋으신 하나님을 갖게 되기를 원하게 됩니다. 이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마음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접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1~10절까지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의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벌어진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11절부터는 예수님 안에 들어갔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리스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대표로 유대인을 예로 듭니다. 11절의 앞부분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선택적인 은총에 의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간 사람으로서 그렇지 못한 유대인을 볼 때는 “선민임을 자처하던 이스라엘은 결국 넘어져서 완전히 멸망을 당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다면 위험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 머무는 사람들의 멸망을 단정 짓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고 그 결과로 이방인이 예수님을 전도 받게 되었습니다. 11절 뒷부분을 보면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유대인이 넘어졌기에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달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행전 8장 1절을 보면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하였고, 이어지는 4절에서는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성도들은 흩어지게 되었고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며 이방세계에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또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에서 전도할 때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45~46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반복되어 나타나는 말씀들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고 그 안에서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에 대한 태도는 우월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못한 상황을 향하여 “이스라엘은 멸망당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긴다면 유대인이 가졌던 선민의 잘못된 우월감을 그대로 배워서 닮게 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준엄하심을 맛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실족함은 이 세상에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온전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였다면 더 큰 유익을 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라니 이것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이스라엘이 실족하는 바람에 복음은 이방으로 넘어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충만했다면 이방으로 복음이 넘어오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복음을 통해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해보자면 이스라엘이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이방이 버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면 차고 넘쳐서 흐르게 됩니다. 복음이 흘러넘쳐서 이방인에게 올 수 있었다면 이스라엘도 이방인들도 다 기뻐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스라엘의 넘어짐은 이방인으로서도 결코 기뻐할 일이 아니며 안타까워해야 마땅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유대인을 향해 “저들은 망했고 이제 끝났다.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전혀 없다.”라고 단정하며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저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여서 그 복음이 흘러넘쳐서 우리에게 전달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는 사람들이 가져야 될 마음자세입니다.

로마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렇게 유대인을 무시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 이유는 우월감 때문입니다. 우월감은 특정한 조건에 있는 사람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고 아래로 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가질 때에 우월감을 느낍니다. 이렇게 우월감을 느낄 때는 자기중심적이 되고 다른 사람들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 사는 삶이 진행되는 가운데 반드시 점차적으로 없어져야 할 것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을 긍휼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칼로 무 자르듯이 단번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가져야만 합니다.

 

한편 본문 25절을 보면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 선민으로 선택받은 이방인의 숫자가 다 차면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 내용도 앞선 내용들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이방인의 숫자가 다 차야만 유대인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고 말한 것일까요?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지구를 한 바퀴 돈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한반도의 광화문에서 지구일주 여행을 시작합니다. 광화문에서 북쪽 방향으로 가려면 서대문 쪽으로 나가야 되고, 남쪽 방향으로 가려면 종로나 강남 쪽으로 나가야 됩니다. 이제 북쪽으로 가기로 해서 서대문을 나가서 홍제동 구파발 불광동을 지나 일산으로 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북한도 지나고 시베리아도 지나고 유럽을 지나고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도 지나고 태평양을 지나 일본을 지나서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부산 쪽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종로나 남산 쪽은 출발점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늦게 도착하는 곳이 됩니다. 유대인들이 이와 같은 입장이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 구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그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한 것처럼 복음은 이방세계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유대인은 복음전파의 여정과 하나님의 경륜에서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한 사도 바울은 마치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기라도 한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의 의도는 유대인이 그리스도 밖에서 끝날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라도 이해함으로써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택할 자와 버릴 자를 결정하셨습니다. 다만 나의 태도는 단정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 중에 하나님께서 누구를 택하셨고 버리실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만났다면 나의 마음 또한 그 인자하심의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예수 밖에서 버림당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조차도 긍휼히 여기는 태도로 나타나게 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끈질길 정도로 유대인을 놓지 못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본받아서 구원의 가능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가장 큰 배경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잔멸했던 사람입니다. 잔멸(殘滅)은 쇠잔하여 다 없어지게 한다는 뜻으로써 커다란 산돼지가 포도원으로 들어와서 모든 포도나무를 초토화시키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사울 시절에 교회를 그렇게 잔멸시키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모습을 알던 사람 중에는 사울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서 사도 바울이 되리라 상상할 수 있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태어나기도 전에 택해놓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기 자신의 흑역사를 배경으로 오늘 본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고통을 주고 박해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원수 중에 원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진리를 전하는 자신을 반대하며 그토록 괴롭힌 유대인에 대해 끝까지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두려고 애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도 바울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서 나타나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택하거나 버리실 것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으로서 끝까지 긍휼한 마음을 놓치지 않는 자세를 취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우월감에 빠져서 다른 사람을 아래로 보거나 구원의 가능성을 닫아버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이 잘려나간 것과 같은 하나님의 준엄하심을 맛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아닌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마주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어떠한 마음으로 대해야 할지 사도 바울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맛보고 있음이 겉으로 드러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깊이 체험할 수 있도록 은총의 은총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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