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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2

녹취문: 분수를 넘지 않는 생각을 하는 법_태승철 (로마서 12:3~13)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5.23|조회수74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분수를 넘지 않는 생각을 하는 법>의 줄거리:

삶이 괴롭고 힘들고 상실되는 이유는 바로 생각이 분수를 넘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는 기능을 주셨으니 생각은 하십시다. 그러나 분수를 넘지는 말아야 합니다. 분수에 맞는 생각처럼 절실하고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생각이 분수를 넘는 순간 우리의 삶은 평강을 이탈하여 지옥문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분수를 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할 생각만 하는 법을 알아봅니다.

 

분수를 넘지 않는 생각을 하는 법

(로마서 12:3~13)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분수를 넘지 않는 생각을 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분수를 넘지 않는 생각을 하는 법”

본문 12장의 구조를 보면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1~2절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어지는 3~13절에서는 하나님께 몸을 산 제물로 드린 사람은 그리스도인 형제들에 대해 어떻게 관계해야 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보게 될 14~21절까지는 하나님께 몸을 산 제물로 드린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괴롭고 힘이 듭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생의 시간들이 소모되고 상실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그저 일이 안 풀리기 때문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의 생각에 있습니다. 아무리 일이 안 풀리더라도 생각이 분수를 넘지 않는다면 평강은 보장될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 분란을 일으키고 평강을 깨는 것은 외부의 환경이 아닌 우리의 생각입니다. 물론 외부의 환경은 계기가 될 수는 있습니다. 다만 평강을 깨는 직접적인 원인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외부의 문제와 조건들 자체는 평강을 깰 힘이 없습니다.

생각이 곧 팔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팔자라는 말을 쓰지 않지만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 사람들의 언어를 비유적으로 인용해 본 것입니다. 생각만큼 행복해질 수도 있고 불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외부의 환경은 절대로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지 못합니다. 외부의 환경에 자극을 받아 생기는 생각이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습니다. 그렇기에 생각을 하는 일에서 분수를 지켜야만 합니다. 이것은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쉽게 말해서 생각이 분수에 맞기만 하면 잘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3절을 두 부분으로 잘라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 앞부분에서는 마땅함을 넘어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뒷부분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제시됩니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참 옳으신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막막한 말씀임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마땅한 생각이 무엇이고 마땅함을 넘어선 생각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나 건강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계기로 생각할 것입니다. 다만 그 생각이 마땅한 지점에 머물고 있는지 혹은 마땅한 지점을 넘어섰는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믿음의 분량”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3절 하반부에 기록된 대로 보자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아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가가 문제가 됩니다. 언뜻 보기에 믿음의 분량은 측량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좋은지 나쁜지 혹은 큰지 작은지를 아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믿음의 분량이라는 표현을 보자면 믿음의 크기를 말하고 있는데 믿음의 크기를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관적으로 “나의 믿음이 참 크다!”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실제로 믿음이 크다고 할 수 없으며, “나의 믿음이 참 작다!”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믿음이 작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이 작다고 하는 사람이 겸손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면 스스로 믿음을 크다고 여기는 사람보다 더 큰 믿음을 가졌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타인이 나의 믿음의 크기를 측정해 줄 수 있다는 것일까요? 그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이 말씀의 어려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크기를 알 수 없으니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마땅한 생각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의 분량이라는 기준을 제시해주었습니다. 그렇기에 믿음의 분량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믿음의 분량을 알면 마땅한 생각도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믿음의 분량을 측정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말씀에 담겨있는 뉘앙스의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간과하면 말씀의 해석은 불가능합니다. “믿음의 분량”에서 분량으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을 보면 매트론(μέτρον)입니다. 매트론은 분량이라는 뜻도 있지만 척도, 한도라는 뜻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의 분량이란 믿음 자체의 크기가 아닌 “믿음이 내게 허락하는 한도”를 말하고자 함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공통적인 믿음이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으로 들어가기입니다. 이는 곧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승천하심을 따라가서 하나님에 대해서 사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있음을 느끼는 의식이 세상의 존재감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것들은 모두 있는 것이 아니라 있게 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채움을 위해서 좋음을 열망하는 마음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어떤 것도 열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에 대해 산다는 것은 의식에서 하나님 아버지만을 있다고 느끼고 마음에서 하나님 아버지만을 좋다고 확신하여 하나님만을 열망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고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믿음의 분량”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분량이란 믿음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한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연쇄과정 안으로 들어가는 믿음이 있다고 전제할 때에 이러한 믿음은 우리에게 생각의 한도를 정해줍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는 것은 곧 믿음이 주는 한도 안에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발생했다면 돈 문제를 계기로 큰일 났다는 생각을 합니다. 반대로 돈이 넉넉해서 쇼핑을 하게 되었다면 좋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의식과 마음이 돈 문제나 쇼핑에 따라붙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땅히 해야 될 생각 그 이상의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돈 문제나 쇼핑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임을 기억한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십자가에서 죽었기에 의식으로 돈 문제의 존재감을 느끼지 않고, 마음이 쇼핑으로 기쁨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의식과 마음이 세상에 달라붙지 않기에 생각도 달라집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에 누구보다 진짜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작동하면 십자가에서 죽음이 일어납니다. 이전에는 돈 문제를 해결해서 기뻐하려 했고 쇼핑을 해서 기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서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려 하고 세상일들에 대해 죽은 자가 되었을 때 믿음은 견고하게 유지됩니다. 그러한 중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한도 안에서 나타나는 마땅한 생각입니다.

 

믿음은 때에 따라 포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믿음이 주는 한도 안에서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 안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 사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언제 어디서든 잠시도 멈추면 안 되는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삶에서 어떤 문제보다 앞선 일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세상보다 앞설 때 하나님께서는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신분과 자리를 허락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신분을 가졌다면 이 세상 삶의 현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의식과 마음이 죽은 상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 있음을 느끼는 의식이 죽고 기쁨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의 있음도 느낄 수 없고, 세상의 어떤 것의 좋음도 열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죽음의 자리를 나의 자리로 정해주신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사권은 언제 어디서나 나를 죽은 자로 확정합니다. 그러므로 몸이 처해있는 모든 삶의 현장에 대해서 죽은 자로 받아들임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었다면 그대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보좌 우편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사권에 의해서 죽은 자의 자리에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인사권에 의해서 독생자의 자리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생자의 자리에서는 의식이 하나님의 있음만을 느끼고, 마음은 하나님의 좋음만을 열망하게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인사권에 의해서 내게 주어진 자리에 대한 신분의식입니다. 이 신분의식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신분의식을 놓치거나 망각한다면 마땅하지 못한 생각이 나타나게 됩니다. 세상을 계기로 삼아 생각하거나 좋고 나쁨을 판단하며 구하고 소망하는 것은 이미 분수를 넘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분수를 넘은 생각을 하는 삶에는 지옥문이 열리게 됩니다.

삶의 환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면 됩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리는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는 보좌 우편 독생자의 자리입니다. 이 신분의식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리를 찾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 또 나는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만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만을 소망할 때에 나는 세상일에 대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죽은 세상일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생각을 넣어주십니다. 내 생각의 능력 안으로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오기 때문에 내가 하는 생각이지만 마땅한 생각이 됩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말씀은 믿음이 지켜지는 가운데 주어지는 생각을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 앞에서든 신분의식에 맞는 자리를 지켜야만 합니다. 그 자리는 세상에서는 십자가의 자리이며 하늘에서는 독생자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를 잊어버리고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산다면 마땅한 생각은 나올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지는 상황과 물건과 사람들에 대해서 자극을 받으며 생각한다면 이미 분수를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내 자리를 다 놓쳐버린 생각만 나오게 됩니다. 믿음이 결정해주는 한도 바깥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이 대표적인 타락현상입니다. 믿음의 한도를 넘으면 분수를 모르는 생각과 더불어 평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만 있는 지옥의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육체가 죽으면 끝이 납니다. 영원히 살아야 될 영인 마음을 그런 일들에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그 방법은 하나님의 인사권에 의해서 내게 부여된 자리를 지키는 믿음입니다. 나의 자리는 세상에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사는 독생자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를 고수하면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몸이 남아있는 삶의 현장에 하나님의 생각을 주십니다. 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생각을 우리의 생각의 기능 속에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믿음 안에서 주어지는 나의 신분과 자리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신분과 자리를 벗어날 때 분수와 한도를 넘는 생각이 나오게 됩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믿음 안에서 내게 주어지는 자리는 세상에 대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리입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사는 독생자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죽어라 지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삶은 지옥이 됩니다. 세상의 일들을 계기로 생각이 돌아가며 마땅하지 않은 생각과 분수를 넘는 생각들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덴과 에덴 밖의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넣어주시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 생각하고자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 밖으로 쫓겨났고 삶은 지옥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한도는 하나님께서 내게 당신의 생각을 넣어주시는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을 넣어주신 삶의 극단적인 예로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을 떠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 현장에 대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도록 끝까지 내버려 두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신분을 지키던 스데반 집사님에게 하나님께서는 생각을 넣어주셨습니다. 돌로 치는 사람들 틈바구니를 빠져나가거나 도망갈 생각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생각을 넣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분수를 넘지 않는 믿음의 한도 안에서 나타나는 생각입니다.

3절의 마지막 부분을 다시 보면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바로 내 생각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생각의 기능 속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생각이 지혜입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들을 문자로 기록해놓은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내 바깥에서 제시되는 하나님의 생각이라면 지혜는 내 생각의 기능 속에 들어온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의 기능 속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인사권으로 결정하신 나의 자리를 믿음 안에서 고수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만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분수를 넘지 않고, 보좌 우편 독생자의 자리에서 살아있는 자의 분수를 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이 세상을 열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열망하기에 삶의 문제가 생길 때에도 문제의 해결을 바라지 않습니다. 문제가 해결된다고 기뻐하지 않고 문제가 발생했다고 슬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진 것에 기뻐하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을 슬퍼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신분의식입니다. 그러면 삶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생각이 주어집니다. 내 생각의 기능 안으로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옵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지역으로 나누어 분절되고 차단된 형태로 이해한다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로마 교회에서 우선이 되는 것은 로마라는 지역이 아닌 교회입니다. 교회는 지구 위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배당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그것이 “몸들의 모임”이라면 교회임을 확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모인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지구 위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한편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마음이 들어간 사람들이 몸으로 모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로마 교회나 빌립보 교회 등으로 불렀을 뿐입니다. 교회 안에서 모임이 이루어진 것이지 모여서 교회가 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몸들의 모임이 아닌 마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75억 명의 마음이 모이더라도 비좁지 않습니다. 그렇게 모인 마음 전체가 교회입니다. 그러한 교회 안에서 조건과 환경이 될 때 몸의 모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임에서는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가 이루어져야 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자 다른 은사와 장점을 가진 사람들이 모일 때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로 모일 때에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는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이야기로 여겨져서 전제되고 넘어가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언이나 섬김이나 가르침이나 어떤 은사를 받았더라도 모든 것이 분수에 맞으려면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감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만 살아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을 소망하는 상태가 유지되는 가운데 비로소 다른 성도를 위하여 은사도 활용될 수 있습니다.

교회로 이름을 붙인 예배당 안에 반목과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는 모인 사람들의 믿음이 정해주는 한도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에 모였다면 예배당이라는 현장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목사님은 예배당과 목회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장로님은 당회나 교회 안건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당에 모였다면 예배당이라는 현장에 대해서 죽고 오직 하나님만을 소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몸은 모였는데 마음은 뿔뿔이 흩어져있으니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돈 문제에 마음이 가 있고, 자녀문제에 마음이 가 있고, 건강 문제에 마음이 가 있고, 정치에 마음이 가 있습니다. 몸만 모여 있지 마음의 소망은 뿔뿔이 흩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성도나 교회라는 이름을 함부로 남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온갖 세상의 기준이 들어와 있기에 갈등과 반목과 질투가 생겨납니다.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최대한 좋게 이야기해도 예배당 모임일 뿐입니다.

교회는 지금 만나고 있는 현장에 대해서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었기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소망하는 상태에서 만남을 이루는 것이 교회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하나입니다. 하나의 교회 안에서 몸들로 모일 때에는 믿음의 한도가 지켜져야만 합니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교회 안에 있는 모임이 아닙니다. 이 믿음의 한도가 박살난 상태에서 몸들이 모여서 이루는 일이 바로 그리스도 종교입니다. 사이비 집단이 되어버립니다. 기성교단에서 이단이라고 지목한 단체들만 이단이 아닙니다. 예배당에 모여야만 된다고 말하는 그 자체가 이단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예배당에 모여야만 된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한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삶의 문제에 대해서도 지혜로운 생각을 갖게 됩니다. 성도간의 모임에서도 서로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젖혀버릴 수는 없습니다. 오직 믿음의 한도 내에서 하나의 교회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교회에서 부분부분 지역적으로 형편이 허락하여 모이는 모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사권에 의해서 주어진 신분의식은 지켜져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의 자리와 하늘에서의 독생자의 자리를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 성도들을 마주하고 있는 상태에서 하게 되는 생각과 말은 덕을 세우고 사랑의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한도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 분수를 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각이 내 안에 들어온 지혜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믿음의 한도 안에서 생각할 수 있음을 통하여 벌어지는 은혜의 세계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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