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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배쟁이가 외인을 만날 때의 위험성>의 줄거리:
십자가 팔자와 독생자 팔자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쟁이. 이것이 바로 성급하게 말할 수 있는 로마서의 결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예배쟁이가 다양한 입장과 태도를 드러내는 외인들을 만날 때 예배쟁이의 신분의식이 소홀하게 되거나 잊혀질 수 있음을 경고하십니다. 외인들 속에서 예배쟁이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쟁이가 외인을 만날 때의 위험성
(로마서 12:14~21)
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배쟁이가 외인을 만날 때의 위험성>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배쟁이가 외인을 만날 때의 위험성”
본문은 얼핏 쉬워 보이지만 그리 간단한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가 읽은 말씀을 전부 다룰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기에 내일 온라인교회 모임을 통해서 나눔을 이어갈 것입니다.
사람은 예외 없이 누구든지 몸을 수단으로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사람들은 예배쟁이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로마서 전체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로마서는 16장까지 있기 때문에 지금 결론을 다루는 것은 조금 성급한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장의 내용은 로마서의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 내용은 바로 예배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살펴보게 될 13~16장까지의 내용도 예배쟁이의 삶을 상세하게 풀어갑니다.
본문 12장 1~3절까지를 보면 1~11장까지에 대한 결론으로 “예배쟁이가 되라”는 내용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어지는 구절들은 예배쟁이의 삶에 대한 풀이이자 상세한 설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지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쟁이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은 오직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용도로만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 안으로 들어와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예배입니다.
우리는 몸으로 말과 행동을 합니다. 이 말과 행동은 곧 삶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과 행동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따라서 삶은 곧 예배이며 우리의 신분은 예배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예배만 드립니다. 다만 예배가 몸을 드리는 것이기에 예배는 홀로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주하는 사람은 예배를 드리지 않을지라도 나는 예배를 드려야만 합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과 관계할 때도 나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렇게 예배쟁이로 사는 길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2절에서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할 때 말과 행동이 예배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십자가를 팔자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독생자의 자리를 나의 팔자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팔자는 관용적으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모를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혹은 믿기로 결정하였다면 십자가를 팔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의식은 있음을 느끼며 존재감을 받아들입니다. 마음은 좋음을 느끼며 열망하고 소원합니다. 이러한 의식과 마음이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열망함에 대해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이 십자가 팔자입니다. 사장님이 앞에 있어도 사장님의 존재감을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대통령이 앞에 있어도 대통령의 존재감을 느끼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팔자로 받아들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돈이 급해도 돈을 원할 수가 없는 팔자입니다. 십자가 팔자를 따라서 내가 원해야 될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있음과 좋음으로 느끼는 자리는 보좌 우편 독생자의 자리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팔자는 세상의 있음과 세상의 좋음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생자 팔자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과 좋음을 적용시켜서 하나님만 있다고 의식하고 하나님만 좋다고 열망해야 되는 팔자입니다. 십자가 팔자와 독생자 팔자를 기쁨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때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이 새롭게 되고 인격의 변화를 받아 몸이 하나님께 드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말과 행동이 오직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가게 됩니다. 이것이 예배가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위험성이 존재합니다. 내가 예배쟁이로 살 준비가 되었더라도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예배쟁이가 아닌 외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외인(外人)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오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 밖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칭하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외인들을 만날 때에 외인의 범주 안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치 유대인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선민에서 떨어져 외인이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 종교인들은 모두 진정한 예배쟁이들에 대해서는 외인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쟁이가 외인들을 만날 때에는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까요? 외인들을 만날 때에도 예배쟁이의 신분은 여전해야만 합니다. 이는 곧 외인과의 관계가 오직 예배여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배쟁이의 삶은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외인들을 만날 때에는 예배를 드리는 일에 방해가 발생하게 됩니다. 가장 큰 위험은 예배쟁이라는 신분의식이 약화되거나 망각하는 경우입니다. 예배쟁이의 신분의식을 놓치는 순간에 모든 복과 은혜는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쟁이는 외인을 만날 때도 예배쟁이로서의 신분의식을 굳건히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곧 외인과의 관계도 예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외인은 내가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를 수 있습니다. 또한 내가 하는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의 생각이 표현되고 있음을 전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배쟁이의 상태를 굳건히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전도의 기본조건이 됩니다. 예배쟁이가 되지 못하면서 말로만 하는 전도는 오히려 역효과를 냅니다. 말로 전도 받은 사람들이 예배당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종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제시되는 본문의 내용들은 구구절절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결코 가볍게 여기고 넘길만한 내용이 아닙니다. 다 아는 것 같고 이해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제대로 알고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것이 실제 삶에서 예배쟁이로 나타나야만 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가 온라인교회 모임을 갖는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습니다. 온라인교회 모임은 실제 삶을 연습하기 위함입니다. 어떻게 보자면 십자가복음 방송은 설명과 더불어 화두를 던지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내용들이 실제 삶에서 내 것이 되기 위해서 온라인교회 모임을 통해서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간에는 본문 말씀을 한 두 구절만 보고, 내일 있을 모임에서 계속 나눠볼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예배쟁이가 박해하는 자를 만날 때에 보여야 할 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요즘 시대에는 사도 바울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했던 박해는 만나기 어렵습니다. 다만 나를 미워하거나 억울하게 하고 부당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는 있습니다. 더 폭넓게 이야기하자면 전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럴 때 우리는 맞대응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미워하고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예배쟁이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다면 오히려 축복해줄 수 있습니다.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고 축복하는 일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위협이 됩니다.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못마땅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예배쟁이의 신분의식을 약화시키고 망각시키는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박해하는 자들에 대해 반응하면서 원망과 증오와 미움과 두려움이 나타난다면 이미 예배쟁이의 신분의식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축복하라”는 말씀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율로게오(εὐλογέω)로써 직역하면 “좋게 말하라”는 뜻입니다. 좋은 것이 그에게 주어지기를 바라며 말하는 것입니다. 율로게오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는 경우에는 찬양한다는 뜻이고, 하나님이 사람을 향하시는 경우에는 복을 주신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향할 때는 복을 빌어주는 것이 됩니다. 나에게 부당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복을 빌어주기 위해서는 먼저 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복을 빌어줄 때는 자기가 아는 복의 수준에서 빌어줍니다. 자기가 모르는 복을 빌어주는 것은 가식에 불과합니다. 새해가 되면 흔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너무 막연하다고 느껴졌는지 좀 더 구체적이고 노골적인 표현들이 등장할 때도 있습니다. “부자 되세요, 승진하세요, 건강하세요, 장수하세요, 합격하세요.”라는 인사들을 하는데 결국 사람들이 알고 있고 누리고 있고 바라는 수준에서 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쟁이들이 빌어줄 수 있는 복이란 무엇일까요? 예배쟁이들이 못된 외인을 만났을 때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어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배쟁이들이 알고 있는 복의 수준에서 빌어주게 될 것입니다. 예배쟁이는 십자가 팔자를 받아들여서 세상의 모든 좋음에 대해 죽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있는 것들은 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배쟁이는 독생자 예수님의 하늘 자리가 팔자인 사람입니다. 오직 독생자 예수님의 자리에서 하나님만을 유일한 좋음으로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고자 합니다. 이러한 예배쟁이에게 유일한 복은 하나님 아버지뿐이십니다. 또한 그 아버지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신 독생자의 자리가 복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이 땅에서 나타나는 예배가 복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배는 하나님의 생각대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을 예배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배쟁이들의 복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독생자 예수님, 성령님이 복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예배쟁이가 가진 복은 외인이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외인이 나를 박해하고 부당하게 대응하고 억울한 일을 자행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나에게 가해질 수 있는 어떤 박해도 나의 복을 건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박해를 받을 때 저주하지 않고 축복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나의 복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고, 독생자의 자리를 주신 예수님이시며,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게 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빼앗아갈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설령 나를 돌로 치는 사람들 앞에서도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외인들은 나에게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빼앗아가지 못하며, 보좌 우편 독생자의 자리를 빼앗아 갈 수도 없고, 이 땅에서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를 빼앗아 갈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해지는 모든 박해는 육체적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했듯이 이 육체마저도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이러한 예배의 복을 붙잡고 있는 사람이 박해를 받을 때는 오히려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됩니다. 몸으로 만나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진정한 복이나 좋음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과 나의 복이신 독생자의 자리를 더욱 더 강하게 붙잡고 실감나게 누리는 일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어줍니다. 이것이 박해하는 외인을 저주하지 않고 축복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음을 모르는 외인들에 의해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화가 난다면 내게 주어진 진짜 복을 누릴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직장동료 중에 마음에 안 드는 상사나 부하직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들 때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사장님이나 부장님이 여러분의 복인 하나님을 빼앗아갑니까? 독생자의 자리를 빼앗아갑니까?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방해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서 진정한 좋음이신 하나님을 빼앗은 것도 아니고, 그 하나님을 소원할 수 있는 독생자의 자리를 빼앗은 것도 아니며,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닌데 화가 나고 마음이 불편하다면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 이외에 다른 좋음이 복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화가 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못마땅해서 마음이 불편하고 평강이 깨진다면 예배쟁이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배쟁이로 살아야 된다는 이론은 알고 있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복으로 여기지 못하고 독생자의 자리를 복으로 여기지 못하며, 삶을 예배로 드리는 것을 복으로 여기지 못합니다. 마음에서 다른 것을 붙잡고 이 복을 실감하고 느끼지를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부당하게 대우하는 사람으로부터 잃어버리는 것이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이 내게서 복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쟁이는 하나님이 복이고, 독생자의 자리가 복이고,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복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론으로 알고 실제로도 느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른 것들을 복으로 느낀다면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화가 납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 때문에 억울하고 화가 나고 미운 마음이 들면 “저 사람이 못 되게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내게서 하나님을 빼앗아갔나? 내게서 독생자 예수님의 자리를 빼앗아갔나? 내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빼앗아갔나? 그런 게 아니라면 나는 지금 왜 화를 내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쟁이는 저주를 하려 해도 저주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진짜 복을 빼앗아갔다면 저주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를 보면 심지어 돌로 쳐 죽임을 당하면서도 진짜 복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스데반 집사님은 돌로 치는 사람들을 저주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한 사도 바울의 말씀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짜 복은 아버지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님과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것을 이론으로나마 인정만 하고 아직 실감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은혜입니다. 다만 이론으로 인정하는 자리와 실감하는 자리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거리를 간구로 메워야만 합니다. 은혜 위의 은혜를 위하여 기도할 때입니다. 이 복이 삶의 현장에서 실감나게 느껴지기를 바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무리 부당하게 대우하는 사람을 만나도 화가 나지 않고 억울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내가 누리는 진짜 복을 조금도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짜 화를 내고 분노하고 저주를 퍼부어야 할 상황은 어떤 것일까요? 내 복을 빼앗아 갈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저주해야 할 것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저주해야 하고 미워해야 하고 원망해야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죽이기까지 해야만 합니다. 내게서 아버지 하나님을 빼앗아가고, 내게서 독생자 예수님의 자리를 빼앗아가며, 내게서 예배의 복을 빼앗아가는 자가 있는데 그것을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진짜 복을 빼앗아가는 사람을 내버려 둔다면 단순히 어리석고 멍청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입니다. 진짜 복을 빼앗아가려고 한다면 있는 힘을 다해 저항하고 싸우고 저주하고 죽이기까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외인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딱 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온 지구상에 내게 주어진 진짜 복을 빼앗아 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의식은 있음을 느낍니다. 그런데 눈에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보다 사장님을 먼저 느낍니다. 하나님보다 가족을 먼저 있다고 느낍니다. 세상 것들을 먼저 느끼면서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첫 번째 있음이고 유일한 있음으로서만 우리에게 의식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만 스스로 있는 분이시고 하나님 이외에는 모두 있게 된 것들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장님도 대통령도 돈도 건강도 다 있게 된 것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창조주이신 하나님보다 피조물인 세상 것들을 있다고 의식하고, 하나님 이외의 피조물로부터 좋음을 느끼고자 한다면 나에게서 하나님을 빼앗는 것이 됩니다. 내가 나에게서 하나님을 빼앗습니다. 그러면 독생자의 자리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독생자의 자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는 하나님만을 있다고 느끼고 하나님만을 소망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자리가 바로 독생자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의식과 마음이 독생자의 자리에 있을 때 이 땅에 있는 몸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이 내게 주어진 진짜 복을 다 빼앗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내가 나를 저주해야만 합니다. 내가 저주해야 될 대상은 나를 향해 부당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 때문에 내 하나님, 내 예수님, 내 성령님을 빼앗기는 일은 없습니다. 오직 나만이 나로부터 진짜 복을 빼앗습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먼저 있다고 느끼고,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좋아하는 동안에 하나님도 독생자의 자리도 예배도 다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진짜 복을 빼앗는 자를 반드시 저주해야 하고 할 수 있으면 죽이기까지 해야 됩니다. 나를 저주하고 죽이는 자리가 바로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저주하고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나에게서 하나님을 빼앗고, 독생자의 자리를 빼앗고, 삶이 예배가 되게 하는 복을 빼앗는 나 자신을 저주하고 죽이기 위하여 일어났습니다. 오늘도 나에게서 진정한 복을 빼앗아가는 나 자신을 십자가에서 끊임없이 저주하고 죽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십자가 팔자와 독생자 팔자를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나의 유일한 진짜 복이신 하나님만을 가지고 이 땅에서 예배를 드리는 복을 누리고, 나를 박해하고 부당하게 대우하는 외인들 앞에서도 이 예배의식을 더욱 더 강화시킴으로써, 강물 같고 폭포수 같은 은혜의 경험을 실제 삶에서 맛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나에게 허락된 진짜 복을 이를 악물고 목숨을 다해 지키는 아버지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내게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예배를 빼앗아가는 나 자신을 십자가로 저주하여 죽이는 일에 소홀하지 않게 하시고, 외인들 앞에서 예배자로서의 모습을 굳건히 유지해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