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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주권이 임하는 곳이 다 예배당>의 줄거리:
모든 권세는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에 복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강경하게 말씀하십니다. 드디어 예배를 조물주 하나님의 주권에 연결하십니다. 내 몸을 산 제물로 드려서 이루어지는 예배. 이 예배가 성립하기 위해선 반드시 내 몸이 지금 처하여 있는 삶의 현장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먼저 인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주권이 임하는 곳이 다 예배당
(로마서 13:1~7)
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주권이 임하는 곳이 다 예배당>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주권이 임하는 곳이 다 예배당”
예배가 나의 몸을 드리는 것이라면 몸으로 살아야 되는 삶 전체가 예배가 됩니다. 그러므로 굳이 예배당이라고 할 만한 장소를 찾는다면 내 몸이 있는 모든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몸이 거하는 모든 곳을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곳으로 보아야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의 몸이 거하는 모든 곳에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곳이 곧 예배당이 됩니다.
1~2절을 보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 하나님의 정하신 바는 이 세상을 향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은 위에 있는 권세들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내 위에 있는 권세자로 표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멸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주권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흔히 그리스도인들과 국가에 대한 관계로 받아들입니다. 국가, 권력자, 정권에 대한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는 예배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본문은 그리스도인들과 국가에 대한 관계를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예배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이제까지 언급되지 않았던 너무나 중요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예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주권도 이야기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을 가장 크고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영역이 바로 국가와 권세들의 차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권력은 권력자들이 스스로 쟁취해서 갖게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권력의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권력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서게 되었음을 밝히며 예배와 하나님의 주권의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지난 시간에 예배란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예배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몸이 처해있는 삶의 현장에서 몸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삶의 현장에서 내가 몸으로 해야 될 말과 행동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하게 됩니다. 이것이 몸을 통해 예배가 이루어지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대하고 사건을 대하게 됩니다. 이렇게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선입니다. 다만 몸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물과 사건에 대한 주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각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곧 선입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몸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와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현장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올 때만 적절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곳에서 몸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몸을 드리는 예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은 몸이 거하는 현장에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몸을 드릴뿐만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을 통하여 현장 자체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는 곧 하나님의 주인 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정함을 통해서 하나님께 통째로 삶의 현장을 드릴 수 있습니다. 삶의 현장이 하나님의 것임이 확인된다면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선이 되는지는 명확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말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 몸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주인이신 현장에서 주인의 생각과 계획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선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를 들어 가정은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장소입니다. 그렇기에 가정은 예배당입니다. 직장 또한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장소입니다. 직장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과 직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참새 한 마리의 떨어짐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있게 된 것이고 진행되는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직장은 예배당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에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가장 크고 대표적인 영역으로 국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배당은 건물이 아닙니다. 국가 또한 예배당입니다. 대한민국도 예배당입니다.
우리의 삶은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몸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예배의 삶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삶이 이루어지는 가장 큰 테두리는 국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국가라는 테두리가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장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국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배를 드리게 되는 본당과도 같습니다. 예배당 건물을 보면 본당이 있고 소예배실이 있고 각종 활동을 위한 시설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가장 큰 테두리인 국가는 예배를 드리는 본당이며, 가정이나 직장은 소예배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을 보러 나간 시장도 소예배실입니다. 이 모든 곳들이 예배당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당사자로서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이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곳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삶의 현장 전체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고 몸을 하나님께 드릴 수도 있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인이신 삶의 현장에서 주인의 마음에 맞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몸을 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면 몸으로 하는 말과 행동들은 전혀 주인과 상관없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이 처한 삶의 현장에서 조물주이신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지 않는 곳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먼저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몸으로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현장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나의 말과 행동은 주인의 마음에 맞아야 한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단계에서 나의 몸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국가의 권세들에 복종하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의 말씀은 얼핏 다른 말씀들과 충돌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나라의 최고 권세인 산헤드린공회원들이나 민중의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이나 대제사장들에게 한 번도 복종하는 자세를 보이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사도 바울은 7절에서는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시면서 세금을 내셨습니다. 다만 세금을 내셨어도 권세에 순종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산헤드린공회에 잡히셨을 때는 대제사장에게 말대꾸 하셨다는 이유로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도무지 권세를 존중하는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사도 베드로나 사도 요한 또한 예수님을 본받아서인지 도무지 권세를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산헤드린공회에서 예수님을 전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들의 말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또 구약시대의 다니엘을 보면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려서 삼십일 동안 왕에게만 절하도록 명령하였을 때에 불복종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며 사자 밥이 되기를 선택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였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불속에 집어넣어서 태워죽이겠다고 했지만 이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절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러한 모습은 사도 바울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 당국자들과 권력자들에게 불복종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도대체 왜 1절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하였던 것일까요? 사도 바울도 복종하지 않았기에 이 말씀은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어서 5절을 보면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에 따르자면 국가와 정권과 권세들에 대한 혐오나 거부감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제자들도 사도 바울도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권세들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애굽 왕 바로에게 복종했다면 출애굽이라는 사건은 있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본문에서 말하는 권력에 대한 복종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과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과 국가와의 관계에서 예배를 드림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가족은 내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닌 필연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가족 구성원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던 가족입니다. 그리고 가족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될 것인가를 예배로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몸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생각이 나의 말과 행동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가족에 대한 관계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국가의 권세와 특정한 정권에 대한 태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국가나 권세 자체를 원천적으로 거부하거나 부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정권이 들어선 현재의 실제상황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는 정말 잔악한 독재정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독일의 히틀러 정권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따르자면 히틀러 정권에 대해서 아무리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도 거부하지 말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시 독일의 고백교회는 국가교회와는 달리 히틀러 정권에 반대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에 우리가 잘 아는 순교자들이 나왔고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를 중심으로 하여 성명서를 내고 히틀러 정권에 반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할 때 히틀러 정권을 마음으로 거부했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모독한 일이 됩니다. 히틀러 정권하에서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목사님은 순교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회퍼 목사님이 단순히 히틀러 정권에 대한 거부감으로 반대하다 죽었다면 그것은 순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먼저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잔악한 히틀러 정권을 들어서게 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 잔악한 정권이 들어서게 된 상황에 몸이 거하는 삶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되는가를 위하여 몸을 하나님께 드리면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몸을 드려서 히틀러 정권에 저항하는 행동과 말이 나왔고 그 결과 죽었다면 그것은 순교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이 없이 그저 잔악한 정권이 마음에 직접 닿아서 스스로 행동하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주권보다 정권이 우선시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권을 거부하기 위한 정당한 이론을 마련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끌어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이 정권은 맞지 않는다. 이 정권은 하나님의 뜻에 대치된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정권을 먼저 끌어들인 다음에 반대하기 위한 근거를 하나님을 통해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믿음의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박사논문으로 20세기의 대학자라는 칼 바르트를 연구하였습니다. 제가 칼 바르트의 마음까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만약 칼 바르트가 하나님의 주권을 먼저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요? 하나님의 주권을 먼저 인정한 뒤에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는 예배의 과정을 제대로 밟지 않았다면 이것은 자의로 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선해 보일지라도 예배일 수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본회퍼 목사님의 순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순교자로서 아무리 존경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보다 히틀러 정권에 대한 분노가 먼저 마음에 닿고 있었고, 이를 위해서 하나님을 끌어들여서 행동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면 복음의 사람이 아닌 종교인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국가나 정권과 같은 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비가 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염두에 두자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눈도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비와 눈은 주어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비가 오게끔 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주권이 눈이 오게끔 하신 것입니다. 참새가 죽었다면 스스로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죽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게 하시지 않았는데 스스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그대로 국가나 정권에 대해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의 행태를 보면 너무나 싫을 수 있습니다.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 우깁니다. 36년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일본이 어떻게 돼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일본이 스스로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일본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있게 된 것입니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르게 해야 됩니다. 참새 한 마리의 떨어짐도 주장하시고 백합화를 입히시고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일본에 대한 태도 또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를 수 있어야 합니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적국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기를 반복합니다. 그리고 끝내는 햇빛을 가려주던 박넝쿨을 벌레가 갉아먹어 시든 것으로 하나님께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의 생명을 박 넝쿨만도 못하게 여기는 요나를 책망하십니다. 요나가 이렇게 행동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을 먼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은 먼저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보면 비와 눈은 스스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태양이 뜨는 것조차 스스로 뜨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태양을 뜨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먼저인지 떠오르는 태양이 먼저인지를 구분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돈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돈이 먼저 닿으면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종교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먼저라면 돈이 없어도 돈이 안 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돈이 없게 하셨음을 깨닫습니다. 반대로 돈이 생겼어도 내가 돈을 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돈이 오게 하셨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시는 일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예배는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 없습니다.
돈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돈에 대한 관계에서 선할 수 없습니다. 돈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돈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하시기 위하여 몽둥이로 때려서라도 이끌어 가시고자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주권이 인정되면 “돈 문제는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내가 돈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행동하고자 한다면 주인의 뜻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과 관계하는 나의 몸 자체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먼저 의식하고 인정하지 않으면 예배가 온전히 될 수 없습니다.
이제 다시 국가와 권세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이 가장 크고 명확하게 나타나는 영역이 바로 국가와 권세의 차원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세워진 정권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 정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현재 윤석열 대통령 정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정권이 세워졌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말하고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생각을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설령 마음에 들지 않는 정권이라도 하나님의 주권은 인정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주권을 모독하고 경멸하고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 다음에 다니엘처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행동하면 됩니다. 이들은 왕의 일을 도왔고 명령을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예배를 드려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에 의해서 말하고 행동하게 된 결과가 왕의 명령에 대한 거부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니엘은 다리오 왕에게 절하기를 거부하여 사자 밥이 되겠다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에 거부하여 금 신상에 절하지 않고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말과 행동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하나님의 기적 같은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단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벌어지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주인 됨을 인정하여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바쳐진 몸이 거하는 삶의 현장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주인이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말과 행동을 위하여 내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오늘 본문의 내용은 겉보기에는 충돌이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3절을 보면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점치던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냈다가 로마 당국자들에게 붙잡혀서 칭찬은커녕 매를 지독하게 맞았습니다. 이러한 충돌되는 상황에서 제시되는 오늘 본문 전체의 의미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무엇을 이 땅에 있게 하셨더라도 그것들이 먼저 마음에 닿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에서 우선적으로 인정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에 저항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에 의해서 저항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헤드린공회에 복종하지 않으셨지만 산헤드린공회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산헤드린공회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에 대해 어떻게 하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 맞을 것인가를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들어오셔서 산헤드린공회를 거부하고 정죄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국가나 정권을 무조건 거부하지 말라는 내용이 아닙니다. 우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절차를 밟으라는 것입니다. 못돼 먹은 정권이고 마음에 안 드는 정권이라고 해서 마음으로 끌어안으면 예배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정권이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세우셨습니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삶의 환경과 상황이더라도 하나님의 주권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 주인의 마음에 드는 말과 행동이 과제가 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예배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국가는 우리의 삶이 놓여있는 가장 큰 테두리로써 하나님의 주권의 장소인 예배당입니다. 직장이나 가정이나 시장이나 학교는 소예배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예배당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어야 삶의 현장은 예배당이 됩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이 예배당이 될 때 몸은 예배로 드려질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당은 건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는 모든 장소가 여러분이 예배를 드릴 예배당입니다. 우리의 삶은 끝없이 소예배당으로 장소를 바꿔가며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소예배당은 국가라는 큰 본당 안에 있는 예배당들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 여러분의 몸이 있는 모든 곳이 예배당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는 이제 오직 예배당에서 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