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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 입은 마음, 빛의 갑옷 입은 몸>의 줄거리:
몸에 달라 붙어 있던 의식과 마음이 십자가를 통해서 내 몸에서 분리되어 그리스도 예수님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 몸에 달라 붙는 것이지요. 이 상태가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내 몸은 빛으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게 됩니다. 어둠과 빛의 대결을 염두에 두고 갑옷이라 하셨지만 실제로 다양한 형태의 빛의 의상들이 있습니다.
예수 입은 마음, 빛의 갑옷 입은 몸
(로마서 13:8~14)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 입은 마음, 빛의 갑옷 입은 몸>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 입은 마음, 빛의 갑옷 입은 몸”
오늘도 몸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는 관점에서 본문을 살펴봅니다. 이제까지 함께 나누었던 말씀과 오늘 본문 말씀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시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셨습니다. 몸을 드렸기 때문에 몸이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예배의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몸으로 살아가기에 삶 전체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연관하여 본문에서는 예배의 삶을 빛의 갑옷을 입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가 있다면 인간관계입니다. 이것은 가족을 포함하여 내가 아닌 다른 모든 사람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예배의 삶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관계는 사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곧 빛의 갑옷을 입는 삶입니다.
이러한 일은 전부 몸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나타납니다. 삶은 몸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몸으로 하는 행동과 삶에 관한 모든 이야기도 예배에 관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빚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났을 때 마치 맡겨둔 사랑을 돌려주고 빚을 갚는 것처럼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삶을 사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날 때에 상황입니다. 이것은 설령 상대가 원수일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수에게 사랑을 빚졌고, 배우자에게 사랑을 빚졌고, 이웃에게 사랑을 빚졌고, 회사의 사장님에게 사랑을 빚진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예배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삶과 이웃사랑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앞선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나는 사람을 만날 때 예배를 드려야 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사장님을 만났습니다. 이때 나는 사장님을 계기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사람입니다. 사장님을 사랑하기에 앞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나는 사장님과 만나고 있는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예배쟁이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웃 앞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되기에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운명적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남을 사랑하라고 한 것일까요?
우리는 모든 이웃과의 만남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몸을 하나님께 드리면 몸은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만나는 이웃에게 당신의 생각을 따라 말씀하시고 행동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 전체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웃사랑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셨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만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몸을 하나님께 드리셨고 그 몸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당신의 생각을 따라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해야 될 이웃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몸을 통해 이웃에게 말씀하시고 행동하십니다. 그럴 때 나의 몸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행동이 곧 내가 하는 이웃사랑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몸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각을 따른 말씀과 행동이 나타나는 상태를 몸에서 빛이 발산되는 것이라고 비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11절 이하를 보면 빛에 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11절을 보면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는 말씀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처음 믿을 때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구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드는 것과 깨어남을 염두에 두면 좋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라는 말씀에서 “시기”로 번역된 원문은 카이로스(καιρός)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 크로노스(χρόνος)와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차이점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크로노스는 연대기적인 수평적 시간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가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되고, 1945년에 해방이 되고, 1950년에 6.25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흘러가는 수평적 시간의 나열이 크로노스입니다. 쉽게 말해 달력의 시간입니다. 이와 달리 카이로스는 수직의 시간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뜻하신 바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시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라는 말씀은 카이로스의 시간 속에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때에 언제 어디서나 지금 천국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연결되어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연결되어 계신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과 행동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수직으로 내려와 땅에서 사건이 되는 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대표적 모습입니다.
흔히 학자들은 시기나 시간이라는 표현을 예수님의 재림이나 종말과 연결시키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시간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있으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사건입니다. 이러한 시간에 대한 표현으로는 호라(ὥρα)가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도 요한복음 7장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호라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미래에 예견된 사건이 일어나는 특정한 시점입니다. 때가 되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카이로스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은 모두 이와 같은 호라의 시간입니다. 다만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지금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사건으로 벌어지는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며 예배쟁이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잔다는 것은 몸이 잠든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마음이 잠든 상태를 의미합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열망하는 마음이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해 전혀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무리에 속해있는데 사람들이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이들의 의식은 나에 대해 잠든 상태입니다. 또 세상사람 모두가 돈을 좋아하지만 내 마음의 소원이 돈과 상관이 없으면 나의 마음은 돈에 대해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내가 의식해야 할 대상이 많이 있습니다. 회사에 가면 사장님도 있고 전무님도 있고 상무님도 있습니다. 다만 내가 깨어있어야 할 대상은 이 사람들이 아닌 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가장 먼저 느끼면 카이로스의 시간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수평적 시간에 연연해서 사장님이나 전무님이나 상무님을 먼저 의식하게 된다면 카이로스의 시간은 끝나고 나의 의식은 하나님에 대해서 잠들게 됩니다. 사장님께 잘 보여서 승진하기를 요구하고 소원하는 동안 하나님을 더 가지기를 소원하는 마음은 하나님에 대해 잠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존재감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의식이 하나님에 대해 잠든 상태입니다. 또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항상 하나님의 좋음을 먼저 소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 잠든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존재감과 좋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잊힐 때마다 의식과 마음을 깨워서 하나님의 존재감과 좋음을 1등 자리로 회복시켜야 합니다. 이것을 반복할 때에 점점 더 하나님의 존재감과 좋음을 느끼는 시간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상태가 되는 것을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에 대한 의식이 끊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좋음에 대한 열망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상태가 구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내용을 통해 깨어있음에 박차를 가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편 12절을 보면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제목에서 언급된 바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둠과 빛이 대결하는 구도를 염두에 두고 갑옷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다만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 따라 주어진 상황에 따라 빛의 갑옷은 정장이나 드레스가 될 수도 있으며 캐주얼이나 잠옷 혹은 트레이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각양각색의 옷의 재료는 동일하게 빛이어야 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밤은 하나님의 존재감을 1등으로 느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낮이 가깝다고 하십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밤처럼 하나님에 대해 잠들어 있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께서 태양이 되어 계신 곳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감과 좋음이 태양이 비치듯이 광채를 발하는 상황을 낮에 비유한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이 태양이시라면 하나님의 생각은 태양의 빛이십니다. 그 빛으로부터 발생하는 열은 우리 몸에서 나타나는 행동입니다. 이것이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라고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사장님의 존재감을 1등으로 느끼며 하나님의 존재감에 대해 잠이 든 상태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어둠의 일이 됩니다. 어떻게든 사장님께 잘 보여서 승진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바로 어둠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보다 돈의 존재감을 더 우선시한다면 돈과 관련된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돈을 중요시하고 돈을 소원하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존재감과 좋으심은 어둠 속에 묻혀버립니다. 태양이신 하나님이 가려진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어둠의 일인 것입니다.
이어서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몸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다만 이것이 빛의 갑옷을 입는 일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면 의식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먼저 느끼고 마음에서 하나님의 좋음을 열망하게 됩니다.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서 하나님을 붙잡으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남아있는 나의 몸을 붙잡아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의 방식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앞선 12장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은 의식과 마음이 몸에 달라붙어서 몸으로 만나는 것들의 존재감과 좋음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면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열망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하나님을 가지고 하나님은 나의 몸을 가지시게 됩니다.
태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각이 빛입니다. 이 빛으로 비유되는 생각이 나의 몸을 움직여서 말하고 행동하게 하십니다. 그럴 때 내 몸에서 하나님의 빛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을 빛의 갑옷을 입는 것이라고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회사에서는 빛의 정장을 입으면 됩니다. 가정에서는 빛의 트레이닝이나 잠옷을 입으면 됩니다. 자유로운 자리에서 사람을 만날 때에는 빛의 캐주얼을 입고, 점잖은 자리에서 사람을 만날 때에는 빛의 정장이나 드레스를 입게 됩니다. 이것은 모든 자리에서 예배를 드릴 때 나타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태양이시고 하나님의 생각은 빛이십니다. 그 빛은 열이 있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빛이신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나타나고, 그 빛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웃사랑이라는 열로 전달되게 됩니다. 결국 이웃사랑이란 몸을 태양이신 하나님께 드려서 빛이신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말과 행동을 할 때 빛이 가지고 있는 열이 이웃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배쟁이의 삶을 빛의 의상을 입은 사람으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이어지는 13절을 보면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낮의 의미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동일합니다. 방탕이나 술 취함이나 음란이나 호색 등은 로마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로마식 분위기에서 두드러지는 퇴폐적 양상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이방의 우상숭배는 꼭 성적인 문란함을 동반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염두에 두고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의 빛이 밝히 빛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행동들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밝음입니다. 비유적으로 하나님이 태양이시면 하나님의 생각은 빛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의 생각이 나의 입과 몸을 통하여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면 됩니다. 이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빛의 옷을 입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빛의 옷을 입기 위해서는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을 입어야만 합니다.
14절을 보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말씀을 빛의 갑옷을 입는다는 말씀과 같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방탕이나 술 취함이나 음란이나 호색 등의 몸으로 하는 행동을 염두에 두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빛의 갑옷은 몸이 입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화려한 변신이 의무입니다. 빛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어야만 합니다. 빛이신 하나님의 생각으로 말하고 행동하게 되는 몸의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몸이 빛의 옷을 입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만 합니다.
12장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몸에 달라붙어 있는 상태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대의 모든 풍습과 분위기는 전부 의식과 마음이 몸에 달라붙어 있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려면 몸에 달라붙어 있는 의식과 마음이 떨어져 나와야만 합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으므로 가능합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상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면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 드려지게 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이 몸을 드리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과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이전에는 의식과 마음이 몸에 달라붙어 있었고 몸을 옷 입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함을 통하여 의식과 마음은 예수님의 몸에 달라붙게 되고 예수님을 옷 입게 됩니다.
의식과 마음이 땅에 있는 몸에 달라붙어 있었을 때는 몸이 보고 듣는 것을 의식하고 좋아하였습니다. 그런데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의 몸에 달라붙은 후에는 예수님이 하늘에서 보고 계신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이제 몸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예수님을 옷 입는 것이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완성될 수 있는 길입니다. 몸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해서 밝히 깨어있으면 몸은 빛이신 하나님의 생각에 의해서 장악됩니다. 그리고 그 빛이 이웃사랑이라는 열로 뿜어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려하고 화사한 변신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인 빛이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태를 빛의 갑옷에 비유하였습니다. 어둠을 물리쳐야만 한다는 사도 바울의 마음속의 강박감이 갑옷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다만 이 빛의 갑옷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입어야 할 의상입니다. 드레스가 될 수도 있으며 정장이 될 수도 있고 잠옷이 될 수도 있고 트레이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상황에 따라서 빛의 의상을 바꿔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의상의 재료가 하나님의 생각인 빛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이 여러분을 통해 발산될 때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웃사랑이라는 열을 전달하게 됩니다. 빛의 의상을 입으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열이 전달됩니다. 이웃사랑은 빛의 의상을 입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빛의 의상을 입고 화사한 변신을 하여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열을 전달하는 사랑쟁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제 추레한 옷 대신 빛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어 화사하고 화려한 변신을 하게 하시고, 모든 사람을 만날 때마다 따듯하고 뜨거운 열이 전달되는 이웃사랑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