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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2

녹취문: 영생이 끊긴 채 인생 사는 그리스도인_태승철 (로마서 14:13~23)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6.04|조회수67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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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영생이 끊긴 채 인생 사는 그리스도인>의 줄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영생과 인생을 동시에 삽니다. 인생이란 하나님 아버지가 뜻하신 대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생애를 말합니다. 인생은 철저히 영생에 의존합니다. 영생을 삶이 끊기는 순간 인생은 곧바로 육생, 즉 육체의 고깃덩어리 생애가 되고 맙니다. 끊김 없는 영생에 의존하는 인생의 가장 우선적인 특징은 사랑입니다. 배려고 돌봄이고 섬김이지요.

 

영생이 끊긴 채 인생 사는 그리스도인

(로마서 14:13~23)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15.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영생이 끊긴 채 인생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영생이 끊긴 채 인생 사는 그리스도인”

지난 시간에 1~12절까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로마 교회에서는 고기 먹는 문제로 갈등이 생겼습니다. 고기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겼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이런 문제가 생겼음을 알고 서로 비판하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라는 내용으로 권면합니다. 이것이 앞부분의 내용이었습니다. 한편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사랑과 배려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13절의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라는 부분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14장 앞부분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15절의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는 내용과 연결이 됩니다. 이 내용이 오늘 말씀에서 강조되는 부분입니다.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우리가 읽지 않았던 23절을 보면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고기를 먹는 문제로 갈등이 생긴 2000년 전의 로마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부분입니다.

믿음이 작동되는 중에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두 개의 영역이 있습니다. 이를 말씀드리기에 먼저 믿음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믿음은 상태입니다. 한 번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다고 믿음의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에 믿음을 착각합니다. 마치 전깃불이 끊어진 것과 같은 상태에서 살게 됩니다. 이건 믿음이 아닙니다. 믿었다가 믿음을 끄고 사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의 삶도 아닙니다.

믿음이 작동되는 중에 두드러지는 두 개의 영역이란 마음의 영역과 몸의 영역입니다. 믿음이 작동되면 마음이 몸에 달라붙어 있다가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함을 통해서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에 계시는 예수님의 몸으로 갈아타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몸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천국으로 가십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를 별세(ἔξοδος, 엑소도스) 즉 세상에 대한 이별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이 세상과 이별하지 못한다면 믿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세상과 별세하여 몸을 떠나 예수님으로 갈아타게 되면 천국으로 올라가 보좌에 계신 하나님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생의 복입니다.

마음은 믿음이 작동되는 동안에 영생을 살게 됩니다. 영생을 산다는 것은 마주하고 있는 하나님을 유일한 있음으로 의식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만을 유일한 있음으로 의식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피조물은 부차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것으로만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영생을 사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또한 마음이 예수님의 몸으로 갈아타서 하늘로 올라가고 나면 하나님만을 유일한 채움으로 생각하여 하나님을 열망하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만을 향하여 의식이 있음을 느끼고 마음으로 소망하는 상태가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우리 인격의 핵심인 마음이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소망하게 되면 영원한 삶의 시작이 됩니다.

이렇게 영생을 살게 되면 이 땅에서 살아있는 몸의 영역에서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내려와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을 이용하시며 말하고 행동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영생으로부터 이어지는 인생의 부분입니다. 믿음이 작동되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영생을 살고 땅에 있는 몸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생(人生)이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인생과는 의미가 구분됩니다. 본래 인생이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뜻하신 사람의 생애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인간의 삶을 말합니다.

믿음이 작동되는 동안에 나타나는 영생과 인생이라는 두 개의 영역은 항상 붙어 다닙니다. 영생이 잘되면 인생이 잘됩니다. 마음이 하늘에서 영생을 사는 동안에만 몸은 이 땅에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 두 개의 영역을 합친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요소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요소가 있습니다. 올라감과 내려옴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충족될 때에 예배는 이루어집니다. 믿음이 작동되는 동안에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고 하나님의 생각은 땅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가지고 하나님은 이 땅으로 내려와 내 몸을 가지시게 됩니다. 이것이 드리고 받음, 올라감과 내려옴이 있는 예배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믿음이 작동되는 동안에만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예배당이라는 건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생과 인생이 이루어지지 않는 삶은 어떨까요? 믿음이 작동되지 않는 동안에는 마음이 온통 몸에 달라붙어 있으면서 몸으로 만나는 피조물로부터 있음을 느낍니다. 또한 피조물 중에서 좋음을 느껴서 열망하게 됩니다. 이는 곧 영원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지 못하는 영생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 몸이 움직이는 삶은 더는 인생이 아니게 됩니다. 육체라는 고깃덩어리의 생애이기에 육생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대로 인간의 삶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생각하고 감정을 느끼고 의지하지만 고깃덩어리의 생애가 되고 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것이 된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여야 될 죄이기도 합니다. 다시 23절을 보면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하였습니다. 영생이 중단된 상태로 이 땅에서 몸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이 다 죄라는 뜻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믿음은 영생과 인생의 두 영역이 있습니다. 영생의 영역이 활성화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몸이 움직이면 다 죄가 됩니다. 앞서 본 12장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육체의 고깃덩어리 생애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 즉 외인들에게는 처음부터 영생이 없습니다. 영생이 없는 상태에서 말과 행동을 할지라도 새삼스럽게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죄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행동은 검은 바탕에 검은 잉크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습니다.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찌든 죄를 사용하는 것이고 가진 죄를 응용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빚어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것이 죄가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연쇄과정이 진리이고 그 과정 속에 계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셨고 단독으로 관계하기로 작정하신 자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야 될 일은 영생을 살고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받으신 그리스도인들이 영생을 중단하고 인생 대신에 육생을 본받게 되었다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관계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은 죄 사함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죄 사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생을 중단하고 이 땅에서 몸을 움직이면 그로부터 나타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에서 나타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언제나 믿음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올라타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바라고 있는 상태에서만 몸의 말과 행동은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안 지으려 해서는 죄 없는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영생을 중단 없이 살려고 해야만 합니다. 영생이 중단되지 않으면 죄는 저절로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영생을 중단한 상태에서 인생을 살 때에 죄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 죄 중에 하나가 로마 교회에서 나타난 고기 먹는 문제로 인해 빚어진 갈등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사랑을 언급합니다. 믿음이란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끊임없이 흘러가는 상태입니다. 의식과 마음은 샘물 같은 일종의 흐름입니다. 의식과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올라타서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을 향하여 끊임없이 흘러가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하나님의 생각이 내려와 몸의 모든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 속으로 들어와서 행동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타나는 행동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고 도움이며 섬김입니다. 이 배려와 도움과 섬김은 우리 죄의 체질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낯설고 거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것이 나에게 유익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에 사랑해서 배려하고 돕고 섬기려고 할 때 나에게도 진짜 유익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참 자유를 누리고 즐길 수 있게 해줍니다. 또 사랑은 영생 속에서 발생하는 평강과 기쁨이 깨지지 않고 유지되게 해줍니다. 만남이 좋은 이유는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할 수 있고, 도울 수 있고, 섬길 수 있기 때문에 나에게도 유익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의 형제들 간에 배려하고 돕고 섬기려는 사랑이 끊어졌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상대방뿐만 아니라 사랑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까지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은총과 혜택은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은 강한 언어로 지적하는데 15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고, 20절을 보면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로마 교회의 갈등은 시장에 나온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에 대한 문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리낌으로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망하게 하는 이유는 사랑이 작동되지 못한 결과입니다. 사랑이 작동되지 않으면 인생은 끝나고 고깃덩어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영생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고 영생이 끊긴 상태에서 몸을 움직일 때 사랑은 작동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항상 하나님의 있음을 먼저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고기 문제로 거리낌을 느끼는 형제를 볼 때 그들이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사람이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받으신 사람임을 깨달았다면 업신여기지 않았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에서는 고기를 거리끼는 형제를 업신여기며 망하게 하는 일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나타난 이유는 믿음을 따라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크면 의식과 마음에 비치는 하나님의 선명도는 높아집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믿음이 유지되던 사람들은 제물로 바쳐진 고기도 개의치 않고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덧 믿음은 꺼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선명도는 흐려지고 영생도 꺼지게 되었습니다. 고기를 먹는 일은 거리낌 없이 습관적으로 유지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지 않는 형제는 고기를 자유롭게 먹는 것을 보고 실족하고 걸림이 되어서 믿음에서 이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는 항상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잊으면 사랑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예배는 곧 믿음이 작동되는 상태입니다. 예배가 이루어질 때 마음은 영생을 살고 몸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행동은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사랑은 배려이고 도움이고 섬김입니다.

 

로마 교회가 고작 고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은 다소 의아합니다. 우리는 먹는 문제로 크게 고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위에 안 맞아서 못 먹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그것을 부정하거나 속됨에 연결시켜서 하나님과 끊어짐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로마 교회 사람들에게 음식이 어떤 의미가 있었기에 하나님과 끊어진다고까지 여겼던 것일까요?

로마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하나님과 끊어질까봐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이니 이것은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14절에서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라고 하였습니다. 그 자체로는 더럽거나 속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그것이 속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을 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14절의 하반부를 보면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고 하였습니다. 더러움은 음식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5장 17절에서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음식을 부정하게 여기는 형제들의 마음 상태를 배려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들은 이방종교나 유대종교의 오래된 종교적 관습에 길들여져 있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이방신전에서 우상숭배를 하던 자가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신전에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숭배의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또 이방종교에는 풍요와 다산을 갈망하는 의식으로써 신전의 창녀들과 관계를 맺는 문란함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신전에는 남창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방종교에 물들어있던 사람들이 회심했을 때에 과거 자신의 모습이란 떠올리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더러움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신전에서 행했던 우상숭배와 관련된 모든 일들이 더러움으로 느껴졌기에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일에 대해서도 거부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래된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우상의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사와서 거침없이 먹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신은 우상숭배의 더러움에 치를 떨고 있는데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그 더러움의 덩어리를 거침없이 먹으니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러움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신전의 제물을 거리낌 없이 먹는 사람들을 보면서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우상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개의치 않고 먹을 정도의 사람들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믿음은 기계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인격적인 일이기에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믿음이 오래된 원로나 그리스도인들이 형제를 근심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아직도 과거의 우상숭배의 종교생활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 우상 제물로 바쳐진 고기를 마음대로 먹으며 믿음을 자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믿음이 작다고 업신여겼습니다. 우상은 다 가짜이고 음식도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형제를 망하게 할 바에는 차라리 고기를 먹지 말라고 합니다. 17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라고 하였습니다. 형제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것이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님에 의해 주어지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의해서 주어질 수 없고 그것들을 제외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얼마든지 임할 수 있습니다. 형제와의 관계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어야지 형제를 망하게 하는 일을 편하게 한다면 그것은 결코 믿음일 수 없습니다.

먼저 믿은 그리스도인들이 형제를 망하게 하는 일임에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생에서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영생이 끊긴 상태에서 몸이 습관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다만 사도 바울의 질책은 믿음이 좋은 사람들만을 향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 믿음이 약해서 고기를 거리끼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마음의 거리낌을 갖고도 분위기에 휩쓸려서 고기를 먹어도 그것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분위기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아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먹는다면 그것 또한 믿음을 따라 한 것이 아니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영생을 사는 자라면 하나님의 있음이 먼저이고 하나님만을 소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먼저라면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치 않으며 소외되기를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거리낌이 있다면 굳이 고기를 먹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열망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흘러가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는 상태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고 싶지 않다면 먹지 말아야 합니다. 영생을 살고 있는 동안에 주어지는 느낌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기에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럴 때 믿음이 없는 사람의 고기 먹지 않음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을 배려해서 같이 고기를 먹지 않을 때 사랑의 기회가 생겨나게 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영생을 살고자 하는 과정에서 고기를 먹지 않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영생을 사는 믿음이 큰 형제들이 그 사람을 위해서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그로부터 사랑과 의가 생겨납니다. 의는 하나님의 생각대로 맞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 평강이 생기고 희락이 생겨납니다. 믿음이 작은 사람은 작은 믿음이라도 믿음을 따라서 영생을 살고 있는 동안에 고기를 꺼려서 먹지 않을 수 있고, 믿음이 더 큰 사람도 그 사람을 배려하느라 같이 고기를 먹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 현장에서 의와 평강과 즐거움의 하나님의 나라가 만들어집니다.

믿음이 작으면 작은 대로, 믿음이 크면 큰 대로 영생을 사는 것이 중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 큰 사람도 믿음을 따라 행해야 하고, 믿음이 작은 사람도 믿음을 따라 행하면 됩니다. 믿음이 크든지 작든지 영생을 중단하지 않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면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소망하고, 의식으로 하나님의 있음만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는 의식과 좋음을 열망하는 마음의 선명도가 크든 작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믿음을 따라 행할 때 믿음이 작은 사람은 작은 대로 고기를 먹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고, 믿음이 큰 사람은 큰 사람대로 작은 사람을 배려해서 고기를 먹지 않는 배려를 보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이 작은 형제와 믿음이 큰 형제의 만남이 의와 평강과 희락의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이 끊어지면 믿음이 큰 사람은 믿음이 작은 사람을 업신여기게 됩니다. 믿음이 작은 사람은 믿음이 큰 사람을 비판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커녕 지옥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지금 예배당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떤 선배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은 죄의 부분 부분들을 짓지만 예배당에 모인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짓고 산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 말씀을 들으며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영생을 살지 못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지독하게 죄를 짓게 됩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의로움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막을 자가 없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영생이 끊긴 순간에 모든 행동은 죄가 됩니다. 반대로 영생이 이어지고 있는 동안에 하는 모든 행동은 사랑에서 나오는 배려이고 도움이고 섬김이 됩니다. 이것이 삶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만들어갑니다. 삶이 즐겁고 기쁘기를 원하신다면 믿음을 따라 행동하면 됩니다. 영생을 사는 동안에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안에 몸은 이 땅에서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럴 때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지금부터 영생의 삶이 끊어지지 않도록 은총을 베풀어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셔서 우리의 몸은 오직 믿음을 따르는 사랑으로만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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