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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믿음 강약의 기준인 하나님 영광>의 줄거리:
영광은 영화로운 광채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영화로운 광채를 많이 모은 부자들이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믿음 안에서 보는 하나님의 영화로운 광채는 소망을 가지게 합니다. 하나님 소망은 하나님! 하나님! 노래를 부르게 하지요. 이것이 찬양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 영광의 부자가 주변 사람을 만남이 바로 사랑입니다.
믿음 강약의 기준인 하나님 영광
(로마서 15:1~13)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믿음 강약의 기준인 하나님 영광>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믿음 강약의 기준인 하나님 영광”
1절을 보면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강하십니까? 아니면 믿음이 약하십니까? 우리의 믿음이 강하거나 약하다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기준을 통해서 믿음이 강함을 알았다면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짊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믿음의 강함을 알 수 없다면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짊어지라는 말은 허무한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서는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짊어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하나님을 찬양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이 믿음의 강함과 약함을 분별하는 기준이 되어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믿음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짊어진다는 것은 내게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에게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따라서 믿음의 강함과 약함은 결정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믿음의 강함과 약함은 상대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하는 사람에 따라 나의 믿음은 강할 수도 있으며 약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때도 기준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들을 종합해서 다시 한번 정리해 봅니다. 영광은 누구에게 적용되든지 영화로운 빛입니다. 영화로운 빛은 그 사람만 보이는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지방선거가 있었습니다. 저는 강원도에 살고 있는데 강원도지사에 당선된 분은 이제 강원도민의 의식 속에서 영광의 자리에 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선거에 진 분들은 강원도민의 의식 속에서 어둠 속에 묻혀버리게 됩니다. 이제 도지사는 임기 동안 강원도민의 의식 속에서 강원도의 공무원 중에 1등인 사람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광입니다.
우리 삶의 각 영역과 부분에는 영광의 주인공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영광은 하나님만의 속성입니다. 하나님만의 속성인 영광의 상태에 따라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가 결정됩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짊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믿음이 강한 자라면 자신이 가진 하나님의 영광이 믿음이 약한 자에게도 있기를 바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광이 왜 하나님만의 속성일까요? 인간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에 부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제쳐놓고 인간이 영광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죄악 됨이고 그릇됨이며 죄에 찌든 결과입니다. 영광이 하나님께만 속한 이유를 좀 더 쉽게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75억 명의 눈에 보일 수 있게 나타나신다면 어떨까요? 75억 명 중에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하나님께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정신이 이상한 사람들조차도 하나님께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보고서도 마음과 뜻과 힘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육체의 오감에 포착되도록 나타나신다면 75억 명의 의식과 마음에서 무조건 1등이 되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광이 하나님의 속성인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눈앞에 나타나셨는데도 돈을 생각할 재벌총수나 수전노는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눈앞에 나타나셨는데도 권력을 생각할 정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눈앞에 보이는데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는 세상에 한 명도 없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목숨까지 내놓으며 자식을 사랑할 모성애가 있지만 그 모성애조차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정치인들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일평생을 권력투쟁에 바치는 이유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벌총수의 자리가 그렇게 좋아 보이는 이유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보인다면 그 누구도 이 세상에 있는 다른 것에 대해서 좁쌀알이나 머리털 끝만큼도 관심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관심은 다른 곳을 향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 속으로 끌려가 버리고 맙니다. 마음의 시선이 육체로 보는 것들에 끌려가는 현상은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인다면 의식과 마음에서 하나님을 1등으로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이면 의식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감이 1등이고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좋으심이 1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속성인 영광을 의식과 마음에서 찾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중에 마음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관심거리가 없는 상태이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중에 의식이 하나님의 존재감을 1등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태입니다.
믿음은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 앞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느냐가 믿음의 강함과 약함을 결정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장님 앞에 섰을 때는 하나님의 존재감을 먼저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앞에서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었다면 이 사람의 믿음의 크기는 그 정도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최고의 권위 앞에서도 하나님의 존재감이 1등인 사람이라면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어떤 대상 앞에서도 하나님의 좋음을 우선시할 수 있으면 믿음이 큰 사람입니다. 좋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열 가지의 좋음이 있는데 서너 가지보다는 하나님을 좋아하지만 나머지에 대해서는 하나님보다 세상의 좋음을 더 강하게 느낀다면 그만큼 믿음이 약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강함과 약함은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반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일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육체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할 때에 마음은 예수님의 몸에 달라붙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게 됩니다. 또 예수님의 몸이 하늘로 올라가실 때 함께 따라 올라가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신령한 몸이 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마음이 육체의 몸에 달라붙어 있다가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의 몸으로 갈아타면 예수님의 몸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마음이 예수님의 몸에 달라붙었기에 몸은 더 이상 마음이 달라붙을 대상이 아니게 됩니다. 그리고 몸은 하나님의 생각이 사용하시게 됩니다. 우리는 몸으로 가족도 대해야 되고 회사에 나가 일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예수님의 몸으로 갈아탔기 때문에 마음이 살아야 될 삶의 공간은 보좌 우편의 천국이 됩니다. 그리고 몸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면서 움직이고 관계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과 생각이 임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둘러볼 수 있는 주변 전체는 내가 사는 곳이 아닌 하나님이 사셔야 할 곳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는 변화산의 베드로와 같은 반응이 나타나게 됩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하늘에서의 모습으로 변화되셨습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셔서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빛이 나오고 계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빛을 쐬자마자 좋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 상황이 너무나 좋았기에 산 아래에서 있었던 일을 망각하고 그 자리에서 살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의식과 마음에서 하나님께서 1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영광이 하나님의 속성인 이유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하나님에 대해 눈이 가려진 상태에서도 이와 똑같은 효과를 나타나게 합니다. 믿음은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것이고, 마음이 육체의 몸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게 되면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다른 대상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눈에 보일 때와 똑같은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만 보이는 영광의 효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죽어야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마음은 예수님 몸 안에 들어가서 함께 부활하고 승천하게 되고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가게 됩니다. 그럴 때 마음에서는 아버지의 영광이 재현됩니다. 육체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의식과 마음에서도 하나님만 볼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육체의 눈으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의식과 마음에서는 하나님이 보이게 됩니다. 마음이 들어가야 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만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 안에 있을 때 의식과 마음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열망하고자 합니다. 몸을 갈아탔지만 의식이 있음을 느끼고 마음이 좋음을 소망하려는 속성자체는 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님 안에 있을 때는 하나님만 보이기에 우리의 의식과 마음에서도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하나님만 있는 분이 되고 하나님만 유일한 좋음이 되시기에 하나님만 소망하게 됩니다. 하나님만 바라게 됩니다. 하나님만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1등을 하시는 상태가 어느 선까지 유지될 수 있는지에 달렸습니다. 몸이 세상에 사는 동안 수많은 대상과 환경이라는 조건을 마주하게 됩니다. 어떤 조건까지 하나님이 1등을 유지하시는지를 보면 믿음이 강한지 약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 같은 경우는 몸이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도 의식과 마음에서 하나님이 1등이셨습니다. 믿음이 완전히 끝내주게 강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조그마한 문제가 생기고 사건이 터지면 금세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배우자 앞에서, 자녀 앞에서, 이웃 앞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린채 하고 싶은 대로 말합니다. 벌써 의식과 마음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졌고 1등 되심은 잊혀진 상태입니다. 그만큼 믿음이 약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1등이신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가려진 상태와는 완전히 다른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기에 믿는 사람으로 사람을 만날 때에는 그 사람의 믿음이 강한지 약한지를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나보다 강한지 약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나보다 믿음이 강하다면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나의 약점을 짊어질 것입니다. 반대로 그가 나보다 믿음이 약하다면 내가 그의 약점을 짊어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적어도 그 사람이 내가 가진 믿음의 상태까지 올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람을 마주 대할 때에 어떤 식으로 믿음의 상태를 알 수 있을까요?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이 육체의 눈에 보이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과 마음에서 보는 것과 똑같은 효과가 나타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럴 때 나타나는 일이 소망입니다. 사람은 유일하게 좋다고 확신하는 대상이 생기면 무조건 소망하게 됩니다. 회사원들이 승진과 월급인상을 바라는 이유는 그것이 좋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좋다고 확신하고 좋다고 느끼는 것은 바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론이 아닌 실제로 하나님을 바라게 되는 소망이 생겨납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만을 좋음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건강을 바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만을 유일한 대상으로 마주하여 하나님만을 유일한 있음과 좋음의 대상으로 소망하는 사람이 돈을 소망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좋다고 여기고 갖기를 바라는 소망의 마음은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소망이 그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통하여 말과 행동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만나서 말을 해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바라지 않는다면 믿음이 없거나 약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유일한 좋음으로 느껴서 소망한다면 세상 사람들과 같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말 한마디에서 단번에 믿음의 강함과 약함이 드러나게 됩니다.
제가 잘 아는 첼리스트가 계십니다. 영국국립음악원에서 공부를 하신 유명한 분이십니다. 그분에게 인상 깊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각종 음악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실 때가 많다고 합니다. 심사위원석에 앉아있으면 참가자들이 연주를 시작하며 첫 소리를 내는데, 그 첫소리만 들어보면 연주를 다 듣지 않아도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연주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깊이 숙지하고 믿음의 효과를 내고 있는 사람은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않더라도 마음에서 하나님이 1등을 하시는 영광의 상태가 됩니다. 이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적용하는 사람은 누군가와 만날 때에 상대의 믿음이 어떤 상태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서 어느 정도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있고, 하나님이 1등이신 상태가 어느 정도로 유지될 수 있는가가 보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을 짊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희미하고 약한 사람이 적어도 나와 관계하는 동안에는 나의 수준까지라도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지시는 바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 약한 사람을 만나게 하심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적어도 나의 수준까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1절 하반부를 보면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나를 기쁘게 하고 싶은데 안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면 상대에게 기쁨을 기대하지 않고 아버지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버지만이 유일한 소망의 대상이 되시는 마음상태에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기대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약점을 짊어지게 됩니다. 내가 온전치 못할지라도 적어도 나 정도까지는 하나님의 영광이 뚜렷해지기를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지 않은 9절과 11절을 보면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 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이 시작될 때의 대상은 믿음이 약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방인과 열방으로 확대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에 보였다면 다른 것에는 관심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이 영광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심어주고 일깨워 주는 것이 바로 먼저 믿은 자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또 9절과 11절을 보면 찬양과 찬송이라는 표현이 반복하여 나타납니다. 여기서 말하는 찬양이란 곡조가 붙은 노래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어떤 영역에서 1등을 하는 자들을 찬양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가장 좋다고 여겨지는 돈과 같은 대상을 찬양합니다. 좋다고 여기는 대상에 대해 입만 열면 말하는 것이 찬양입니다. 이러한 찬양은 좋음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로부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의 입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되고, 마음에 가려져 있던 하나님의 좋으심이 1등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이웃의 입에서 기필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비전이 있다면 만나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 비전을 가지고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이 약한 자의 짐을 지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강약은 어느 정도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보인다면 삶의 현장에서 어느 정도 수준까지 보이십니까?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어떤 사람이 눈앞에 있을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십니까? 여러분은 그 정도까지 강한 것이고 약한 것입니다.
아무쪼록 십자가 예수님을 기억함이 강력해짐을 따라 마음이 몸을 갈아타서 신령한 몸으로 하늘에 계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 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누구를 만나든 어떤 상황을 만나든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의 마음에서 살아있다는 표현으로 말과 행동과 표정까지도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입만 열면 좋음에서 1등이시고 있음에서 1등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루가 되시고 일요일 주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 안에 들어가 있기를 쉬지 않게 하여 주심으로 항상 아버지의 좋음을 소망하게 하시며 항상 기쁨으로 찬양하게 하시옵소서. 또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아버지가 주관하고 계시니 시험에 드는 대신에 오직 감사함으로 하루 전체의 삶이 예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