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성령이 시키지 않으면 헌금하지 말라!>의 줄거리:
설교자와 듣는 교인 간에 아주 민감한 부분이 헌금이지요. 실제로 예배당 조직의 재정 상태가 헌금에 달려 있으니 그 조직을 이끌어야만 하는 입장에서는 헌금이 중요한 관심사이긴 합니다. 그러나 교인들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것이 또한 사실이고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대 로마서 마무리 부분에서 로마 교인들에게 은근히 헌금을 강조하시는 내막을 살펴봅니다.
성령이 시키지 않으면 헌금하지 말라!
(로마서 15:14~33)
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성령이 시키지 않으면 헌금하지 말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성령이 시키지 않으면 헌금하지 말라!”
제목에서 헌금 이야기를 꺼낸 것은 뜬금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대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헌금 이야기가 불쑥 튀어나왔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딱 한 번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본문에 나오게 된 이유도 바로 헌금과 관련이 있습니다.
본문의 전체적 내용을 설명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 자신의 사명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함으로써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제물로 드려지게 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내용입니다. 다만 사도 바울은 사명을 받은 것은 자신이지만 이 사명을 이루어 가시는 분은 성령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잘 드러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제물을 바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했고, 그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은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지듯이 하나님의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 사명은 성령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명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의 삼위일체 사역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삼위일체의 협력 작업이 사도 바울이라는 인격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사명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이란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내보내신 이유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일 때 밝혀집니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에 계신 예수님의 몸에 달라붙는 것입니다. 마음이 육체의 몸 대신에 예수님의 몸으로 바꾸어 올라탈 때 사명의 삶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사명이 이루어질 때를 보면 땅에서 살고 있는 ‘나’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협력하십니다. 이것이 사명의 특징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땅에서 살고 있는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력을 통하여 사명의 삶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명의 영역을 로마제국에서 서바나로 넓히시려고 하십니다. 서바나는 지금의 스페인으로 구약성경에서는 요나 선지자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도망갔던 다시스로 불리던 지역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명에 따라 서바나 지역에 있는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기를 바라고 있었고 이를 위하여 로마 교회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다만 로마 교회가 사도 바울의 사명 수행을 위하여 서바나까지 따라 갈 수는 없었기에 이 도움은 물질적인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 교회는 사도 바울의 전도로 세워진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당당히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가 마땅함을 설득하기 위하여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예를 듭니다. 마게도냐 지방에는 빌립보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 외에 다른 교회들도 있었고, 아가야 지방에는 고린도 교회가 있었는데 이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소아시아에 있던 갈라디아 교회도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심한 고통을 받게 되자 구제 헌금에 참여하였던 기록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 이방교인들이 참여한 예를 들면서 이번에는 로마 교회가 서바나 지역의 선교를 위한 사명 수행에 동참해줄 것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이 본문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앞부분에서 사도 바울이 자기의 사명을 이야기하는 형식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도 사명자이기 때문입니다. 한 여인으로 태어나 결혼해서 자녀를 기르며 가정주부로서 가사를 돌보는 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후로는 사명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이 사명 수행의 실제상황은 이 땅에 있는 나를 중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와 성령님의 협업을 통해 이루어져 갑니다. 나도 이방인으로서 전파된 복음을 받아들여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진 하나님의 것이 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이 하나님의 것인 제물로 드려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이 있습니다. 한 이방인의 마음에서 전깃불이 켜지듯이 하나님의 영광이 켜진다는 것은 있음을 느끼는 의식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1등을 하셨고, 좋음을 느끼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좋음이 1등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하나님께 나를 귀속시킨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영광의 주인공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가지신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줄리엣의 마음에서 로미오가 1등인 상태라면 로미오는 줄리엣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서 돈이 1등인 상태라면 돈이 나를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의 영광이 의식과 마음에서 켜지면 돈이 나를 가진 상태입니다. 자나 깨나 자식만 보인다면 자식이 나를 가진 상태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인의 의식과 마음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켜졌다면 하나님이 그를 가지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이 온전히 성령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모든 삶의 내용을 전폐하고 오직 복음전파를 전담하는 사명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사명자입니다. 가정주부로서 아이들을 키우고 가사를 돌보는 일도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사명은 수행됩니다. 하나님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켜지면 자식을 키우고 가사를 돌보는 주부의 일 속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본문은 바로 이렇게 귀중한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 세상에서 사명자로 살아야 합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사명의식의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에게 사명의식이 없습니다. 검사나 판사 같은 고위 공무원이나 교수 같은 지식인들에게 사명의식이 없습니다. 검사가 되어도 권력과 돈을 위해 되고자 합니다. 대통령이 되어도 돈에 얽매여서 감옥에 들어갑니다. 돈에 먹히고 돈의 것이 되어버리는 상태입니다. 그 의식과 마음에서 돈에 대해 영광의 불이 켜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높은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각자가 사명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 사명의식은 지상에 살고 있는 나를 중심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협업이 이루어져야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나님의 영광의 불이 켜질 수 있고, 그래야만 하나님의 복사판 영이신 성령께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이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말씀을 나누는 동안 성령님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를 움직인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영적인 예배의 완결된 상황이며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일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때 우리의 몸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생각이 바로 하나님의 복사판 영이신 성령님입니다. 사도 바울을 이 땅의 삶의 현장에서 움직여 가신 분이 성령님이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의 사명에 관한 언급으로부터 우리의 사명이 수행되는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나를 중심으로 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업이 사명 수행의 내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사명을 말하고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임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22절 이하에서 로마 교인들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24절을 보면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과적으로 로마에서 순교하게 되지만 선교 계획 속에서의 로마는 정착지가 아닌 지나가는 길에 들려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여기서 사귐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 사귐이 어떠한 것인지는 로마서 1장 11절에서 언급되었습니다.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로마 교회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교회는 아니었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기반으로 신령한 복을 나누는 교제를 하고 기쁨을 누리고 싶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마친 후에 자신을 서바나 교회로 보내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로마 교회가 사도 바울을 서바나 지역으로 보내면서 해줄 수 있는 일은 물질적 원조였습니다. 쉽게 말해 헌금입니다. 사도 바울은 25절에서 이 헌금의 당위성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를 거쳐 서바나로 가고 싶었지만 당장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으로 인해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때 사도 바울이 세운 이방교회들이 헌금하였고 이것을 전하기 위해 먼저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로마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6절을 보면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빚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다소 의아한 이유는 복음은 빚이 아닌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영생을 살 수 있고 인생을 회복할 수 있는 은혜입니다. 은혜는 말 그대로 공짜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은혜를 왜 빚이라고 표현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는 전달해주는 중간 역할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그 중간 역할을 하였음을 말합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셨고 사도 바울도 유대인이었습니다.
물론 로마 교회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로마 교회의 성립을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순절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모이는 시기였습니다. 이때 모였던 유대인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사도들의 설교를 듣게 됩니다. 유월절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군중 속에 섞여 있던 유대인들이 하루에 삼천 명이나 회개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분명히 디아스포라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 중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로마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로마 교회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이와는 다른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처음으로 파송한 사람이 사도 바울과 바나바였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첫 번째 교회가 안디옥 교회입니다. 다만 로마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분들 이외에도 자발적으로 로마에 와서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이 은혜를 전하는 전달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전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공짜로 받는 영생과 인생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공짜이기에 빚이라는 표현이 사용될 수 없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은 이방교인들에게 그 복음의 중간 매체가 되어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서는 빚이 있다고 말합니다. 영적인 것을 받았다면 육적인 것으로 감사의 표현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도움을 서바나 지역의 선교를 위해 요청하고 있습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도운 것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명의 수행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업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서바나 지역의 선교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사명은 사도 바울 같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사명의 삶을 살아가야 하고, 로마 교회는 로마 교회대로의 사명의 삶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따라서 로마 교회가 사도 바울의 선교사역에 물질로 동참하고자 한다면 여기에는 반드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업이 필요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동의 없이 움직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로마 교회가 받은 복음이 유대인들을 통해 전해진 것이라고 해서 사도 바울의 말만 듣고 동참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또한 전도자들을 통해 복음을 전도 받았습니다. 영생을 얻고 인생을 얻었습니다. 우리 또한 사도 바울처럼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업 가운데 성령님께서 허락하시는 한도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헌금은 성령님께서 하라고 하셔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지 않은 28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전달하는 일을 마치고 로마 교회로 가겠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열매를 확증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열매는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헌금입니다. 27절을 보면 이 헌금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가 잘 드러납니다.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계심이 분명하다면 반드시 복음을 전달해준 중간 매체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협업한 사명의 삶을 살고 있다면 중간 매체가 되는 사람이나 집단에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되고 헌금으로 표현을 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억지로 헌금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를 중심으로 협업하시는 사명의 삶을 살고 있다면 영생과 인생을 가져다 준 사람에 대해서 분명히 감사한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를 열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불어 사명의 삶을 살게 됩니다. 사명의 삶을 살 때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하나님의 생각이신 성령께서 주장하십니다. 그럴 때 반드시 복음을 전달해준 사람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열매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헌금을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헌금에 대해 자유로우면 됩니다. 성령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런 부담을 갖게 되지도 않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내 주머니에 들어온 돈이 아깝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돈을 지불할 때는 그만한 가치를 얻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헌금은 이미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지 어떤 가치를 얻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결코 경제적인 이유를 목적으로 내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피같이 여깁니다. 피 같은 돈을 내면 그만한 가치가 돌아오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헌금만큼은 이러한 보편적 경제 원리가 해당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에는 피 같은 돈이 아깝지 않을 만큼 영적으로 받은 은혜에 대한 실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말로는 감격스러운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실제로 마음에서 은혜의 실체가 묵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피같이 아까운 돈을 헌금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으로 전달되는 은혜의 실체가 마음에서 느껴짐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복음은 말로 전달됩니다. 말로 전달되는데 그것이 마음에서 육체의 어떤 성취보다도 강렬하게 실감되고 묵직하게 담겨진다면 돈이 아깝지 않고 감사의 표현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헌금을 아깝게 느끼거나 주저함이 있다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헌금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들어온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게 말씀만으로 전달되는 은혜가 허공을 치는 소리가 아니라 실체로 느껴지고 무게감을 지닐 때만 헌금은 감사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감사의 마음이 생기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헌금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를 중심으로 사위일체로 사명의 삶을 살 때 그 서클 안에서 움직이는 돈의 순환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내게 돈이 오게 하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은혜의 실체를 느끼게 하시며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생기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표현이 헌금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사위일체 하나님의 서클 속에서 움직이는 돈의 순환 중에 헌금이라는 단계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생기지 않고 아깝다면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헌금을 하라고 시키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헌금을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헌금은 여러 용도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에 사용될 수도 있으며, 선교에 쓸 수도 있고, 로마 교회가 서바나에 선교를 떠나는 사도 바울을 돕기 위해 쓸 수도 있습니다. 헌금으로 들어온 돈은 경제 원리에 의해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뜻을 염두에 두면서 사용될 것입니다. 예배당에 드려지는 돈만이 헌금이 아닙니다. 아프리카나 전쟁의 난민들을 돕는 돈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할 때 헌금이 됩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사위일체의 사명의 삶을 사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너무 좋고, 그 은혜의 실체가 무겁게 느껴져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하여 구제 헌금을 할 수도 있고 난민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사위일체의 사명 안에서 성령의 은혜 받음이 감사해서 하는 일이면 헌금이 될 수 있습니다.
헌금은 성령이 시키는 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헌금은 성령께서 말씀으로 전달된 은혜의 실체를 무게감 있게 느끼게 해주실 때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명의 삶을 통하여 사명자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명자의 삶은 나를 중심으로 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업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일을 위하여 성령님께서 은혜를 무게 있는 실체로써 내 마음에 부딪히도록 역사하셨다면 그 사람에게는 헌금이라는 열매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붙잡고 사명자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복음을 통하여 전달된 은혜의 실체가 너무 크고 무겁고 소중해서 기꺼이 기쁨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위하여 헌금을 드릴 수 있는 마음까지도 열매로 맺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