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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존재는 샘이고 행위는 샘물이다>의 줄거리:
덜컹거리는 인생을 피할 수가 없을까요? 달구지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가는 것 같은 인생을 어떻게 승용차를 타고 포장도로를 달리는, 아니 더 나가 ktx를 타고 레일 위를 달리는 인생으로 바꿀 수가 있을까요? 각종 변수로 가득한 인생길에서 이런 일이 가능은 한 것일까요? 행위를 잘하면 됩니다. 행위를 잘하는 방법은 존재를 바꾸는 것입니다.
존재는 샘이고 행위는 샘물이다
(로마서 2:17~29)
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존재는 샘이고 행위는 샘물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존재는 샘이고 행위는 샘물이다 (모든 말씀이 지켜지는 삶의 승차감)”
25절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는 말씀은 율법을 범하면 선민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즉 “율법을 지키면 네가 생각하는 대로 선민이지만, 율법을 범하면 네가 생각하는 바와 다르게 선민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제목에서 “모든 말씀이 지켜지는 삶의 승차감”이라는 말은 모든 말씀이 지켜지는 이상적인 상태를 말하고자 함입니다. 이상적인 상태를 말함으로써 우리가 간구해야 되는 내용을 붙잡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고 깨닫고 구하는 삶을 살자는 의미에서 “삶의 승차감”이라는 표현을 사용해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덜컹거리는 인생을 피할 수 있을까요? 마치 달구지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가는 것처럼 덜컹대는 인생을 어떻게 해야 승용차를 타고 포장도로를 달리는 인생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승용차도 도로 상태에 따라 승차감이 바뀔 수 있습니다. 좋은 승차감의 예를 들자면 KTX를 타고 레일 위를 달리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어차피 각종 변수로 가득한 여정입니다. 이러한 변수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인생길을 KTX가 레일 위를 달리는 승차감으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변수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변수는 나의 소관도 아닙니다. 그러나 변수가 생길지라도 레일 위를 달리는 KTX와 같은 승차감의 인생을 살 수는 있습니다. 1장 17절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로마서의 주제입니다. 이 주제와 연관하여 본문에서는 “행위를 잘하면 된다.”라는 의도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행위를 잘하면 각종 변수로 가득 찬 인생길을 KTX가 레일 위를 달리는 것처럼 확고부동하게 전진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변수가 생기면 생기는 대로, 안 생기면 안 생기는 대로 그 상황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생각이 바로 기차 레일입니다. 우리가 하는 행위가 기차 레일인 하나님의 생각을 달릴 수 있으면 겉으로 보기에는 어떠한 변수가 나타나든지 인생길은 KTX의 승차감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내가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자세입니다. 그 행위가 지금 이 순간 이 상황에 대해 하나님 아버지께서 갖고 계신 생각을 달릴 수 있다면 실제로 어떤 변수가 생기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변수가 생기더라도 그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있고, 변수가 생기지 않더라도 그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있기에 레일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기차가 레일에서 탈선하여 사막 위를 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릅니다.
본문에서는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에 대한 경고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본래 선민의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방인과의 관계에서 선민의식을 갖고자 하였습니다. 그 결과 선민의식은 우월감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우월감의 근거가 되는 항목들이 몇 가지 있는데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이고 할례였습니다. 그중에서 오늘 본문은 특별히 율법에 조명을 맞추어서 유대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너희가 선민의식의 우월감을 갖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다는 사실을 자랑한다.”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율법에 근거해 선민으로서 이방인에 대하여 우월감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랑하는 율법을 실제로는 전혀 지키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좋아하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을까요? 21~22절을 보면 율법을 지키지 않는 모습의 예로써 율법에서 금지하는 도둑질과 간음을 행하고, 우상을 가증스럽게 여겨야 함에도 이방인의 신전에서 물건을 훔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십계명과 율법을 보편적으로 지키지 않았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현재와 당시의 종교의 영향력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현재 기독교 종교는 예배당을 중심으로 섹트(sect)화 되어 있습니다. 삶의 여러 방면 중에서 종교라는 한 영역에 국한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배당 중심의 종교적 삶의 영역을 떠나고 나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삶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한 대표적인 예가 천국입니다. 천국은 죽은 다음에나 가는 곳으로 미루어둔 채 삶의 현장에서는 아무도 현실로 느끼고자 하지 않습니다. 한편 사도 바울이 활동하던 당시의 종교는 삶의 영역 중 하나로 국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유대종교는 삶 전반에 걸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종교를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이로부터 의문이 생겨납니다. 유대인은 종교 중심으로 이방인과의 관계에서 선민임을 자랑하며 우월감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우월감의 근거는 율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가 삶 전반에 걸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상황에서 어떻게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일까요? 율법을 읽기만 해도 “하지 말라” 혹은 “하라”고 되어있는 내용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어떻게 이것을 지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여기서 참으로 중요한 원리가 하나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 그토록 율법을 자랑했고 그토록 종교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삶 전체는 종교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준수는 행위의 문제로 여겨집니다. 정확히는 행위 차원의 문제로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율법은 결심하면 행할 수도 있고 결심이 약하면 행할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기에 행위가 잘못되면 책임을 물어 벌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한 것이고, 얼마든지 안 할 수도 있었는데 행했기 때문에 벌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행하기 어려운 일을 결심하고 잘 행했기에 상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의 행위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나타나는가를 살펴보면 율법의 준수가 단순히 결심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행위가 결심으로 되는 일이 아님을 몰랐고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행위는 지속되고 있는 존재의 상태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선민임을 자부하면서도 율법을 지키지 못했고 지키고자 하지도 않았던 이유를 이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행위의 차원 이전에 존재의 차원에 속한 일임을 이해하지 못했고 혹은 이해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 속에 있는 존재의 상태를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존재의 상태가 바뀌지 않는 한 율법을 지키는 행위는 나타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인격은 존재와 행위로 나누어집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모든 행위는 그 사람이 처해 있는 존재의 상태로부터 나옵니다. 즉 행위는 존재라는 나무의 열매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존재는 의식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의식은 있음의 존재감을 늘 구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좋음의 충만함을 늘 구합니다. 인격의 내부에서는 어떤 대상이 있다는 존재감과 어떤 대상이 좋다는 충만감을 구하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존재 상태입니다. 그리고 행위는 바로 이러한 있음의 존재감과 좋음의 충만함을 구하는 상태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있음의 존재감과 좋음의 충만함은 샘과 같습니다. 행위는 바로 이 존재의 샘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샘물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원하셔서 디자인하시고 그려보셨던 고유한 모습이 어떠한가에 대해서도 말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의식은 하나님만의 존재감만으로 가득 차고 마음은 하나님의 좋음으로 충만해지기를 간구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의 상태에서 행위를 하도록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하였고 하나님의 존재감과 좋음을 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타락 후에도 인간이 가진 존재의 구조 자체는 동일합니다. 의식은 무엇인가 있다는 존재감을 원하고, 마음은 무엇인가 좋다는 충만감을 느끼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선민이라는 사람들도 타락한 아담의 후손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 의식과 마음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의식에서는 돈과 재물의 존재감을 붙잡고자 하였고, 마음에서는 돈과 재물의 좋음으로 충만해지기를 간구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존재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밖으로부터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특이한 점이기도 합니다.
모든 인간의 행위는 안에 있는 존재의 상태로부터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그로부터 비롯된 말과 행동은 존재의 상태에 의한 지배를 받습니다. 예를 들어 돈과 재물의 존재감을 가장 크게 의식하고 마음으로 좋아하면 말과 행동도 돈과 재물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은 이러한 존재의 상태와 상관없이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율법에서 “무엇을 하라” 혹은 “하지 말라”는 행위에 대한 규정은 내 존재의 상태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존재의 상태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바깥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졌다고 해서 행동이 율법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존재의 상태가 바뀌지 않고 이 세상의 대상들을 의식과 마음으로 붙잡고 있는 상태에서는 행동은 율법을 따를 수 없습니다. 율법이 아무리 “무엇을 하라” 혹은 “하지 말라”로 규정하고 있을지라도 행위는 그것을 따르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기 존재의 상태를 거슬러서 행위 할 수 없습니다. 행위는 내 속에 있는 존재의 상태로부터만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그러한 나의 존재와 상관없이 밖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1절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34절에서는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 대신 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에게는 이것이 지켜지지 않고 내일 일을 염려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지켜지지 않는 이유는 내면의 존재의 상태가 바깥에 계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은 행위에 포함됩니다. 그 모든 것은 존재의 상태, 즉 내 의식과 마음이 무엇을 붙잡고 있느냐에 의해서 지배를 받습니다. 아무리 바깥에서 이야기를 하더라도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용도로 쓸 수 없었고 자랑의 용도로만 쓸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길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율법을 주신 분은 외부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나의 존재의 상태 안으로 들어오셔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행위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존재의 상태로부터 바깥으로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벗어날 수 없는 절대기준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나의 내부로 모셔 들이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더라도 그것은 지켜질 수 없습니다. 나의 내부의 존재 상태에서 의식과 마음이 돈과 건강과 형통과 자녀와 가족과 직장과 승진 등과 같은 세상의 가치들을 붙잡고 있는 한 바깥에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그것을 행위로 지켜나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고 삶의 현장에서 매 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지시를 알아듣고 그대로 따라 행하는 길은 존재의 상태 안으로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것뿐입니다. 존재의 상태 안에서 돈과 재물 같은 이 세상의 가치들을 담는 대신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야만 밖으로 흘러나오는 행위로 율법은 지켜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관련해서 질문을 하나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은 내부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행위로만 살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강압이나 원칙이나 규칙을 따라서 행위를 하며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사장님이 어떤 일을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일이 너무나 싫습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직장인은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지시를 지키고 행합니다. 9시까지 출근하라고 하면 더 자고 싶을지라도 9시까지 출근합니다. 내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님에도 외부의 지시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모든 행위는 내부의 존재 상태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규칙은 적용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경우에도 이 절대 규칙은 적용되고 있습니다. 사장님의 지시나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지켜나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과 비교하면 사장님의 지시는 정말 잘 지켜집니다. 그 이유는 사장님이 월급을 주기 때문입니다. 내 의식과 마음이 가장 소중하게 여겨서 붙잡고 있는 것이 월급인데 그 월급은 사장님이 줍니다. 사장님의 말을 듣는 것 같아도 실은 월급의 말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사장님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월급 때문에 사장님이 내 존재 안으로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사장님이 월급과 상관이 없다면 사장님의 어떤 말도 지킬 필요도 없고 지켜지지도 않습니다. 사장님의 지시를 따를 수 있는 이유는 월급 때문입니다. 월급 때문에 사장님이라는 존재가 내 안으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그렇기에 내 존재의 상태로부터 사장님의 지시에 따른다는 행위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사장님의 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의 상태, 즉 의식과 마음이 붙잡고 있는 월급이 행위를 시키는 것입니다. 이렇듯 행위는 반드시 존재의 상태로부터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극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강도가 총을 들고 협박을 합니다. 이러한 상태는 완전히 나의 외부로부터 요청이 주어지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모든 행위는 내부의 존재 상태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규칙은 여전히 적용됩니다. 나의 존재의 상태인 의식과 마음이 목숨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숨이 소중하다고 여겨서 붙잡고 있기 때문에 목숨을 위협하는 강도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듯 월급이 율법을 줄 수 있고 목숨이 율법을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존재의 상태 안에서 의식과 마음이 붙잡고 있는 대상의 율법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세상 만물과 모든 순간과 모든 일의 유일한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는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의 존재의 상태 안으로 들어오셔서 주시는 율법과 생각과 지시가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한 그 모든 대상에 대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생각과 어긋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승차감을 달구지 타고 비포장도로를 가는 것처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가 됩니다.
행위에서 삶의 승차감은 결정됩니다. 그런데 행위는 존재의 상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행위가 달려가야 할 정해진 길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만물과 모든 사건과 모든 순간에 대해 하나님의 생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준비된 길인 하나님의 생각을 레일로 타고 달려간다면 인생의 승차감은 확고부동하게 전진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존재의 상태 안에서 세상 것을 다 없애야만 합니다. 돈과 재물과 건강과 승진과 형통과 성공과 명예 등을 비롯한 세상의 가치들을 없애고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나의 존재가 구하고 바라는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모든 순간에 준비돼있는 기차 레일인 하나님의 생각을 달리는 행위가 샘물처럼 솟아 나올 수 있게 됩니다.
삶에서 무슨 변수가 등장하더라도 우리는 이 행위의 원칙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존재의 상태에 하나님 아버지를 모셔 들일 수 있다면 어떤 변수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KTX가 레일을 달리는 것 같은 승차감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가 나올 수 있기 위해서는 세상이 들어와 있는 나의 존재의 상태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여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을 읽는 사람들을 십자가로 끌어가기 위하여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행위는 삶에서 필연적입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행위를 하며 살아갑니다. 이 행위가 나의 인생의 승차감을 결정합니다. 덜컹거리는 인생일 수도 있고 매끈하고 확고부동하게 전진하는 인생일 수도 있습니다. 이 확고부동하게 달려가는 인생은 어떤 변수에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길은 존재를 바꿈으로써 하나님의 생각에 맞추어진 행위를 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행위는 내 존재의 상태로부터 샘물처럼 솟아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과 계명과 하나님의 지시가 들리지 않고, 그 지시대로 할 수 없다면 존재의 상태가 심각한 문제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존재를 바꿈으로써 행위를 바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율법과 계명과 매 순간 허락하시는 지시를 알아듣고 지킬 수 있는 기적 같은 삶이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존재를 바꿈으로써 행위를 바꿀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