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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2

녹취문: 세상도 교회도 왜 분쟁하며 분열할까_태승철 (고린도전서 1:1~17)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6.16|조회수117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도 교회도 왜 분쟁하며 분열할까>의 줄거리:

십자가를 생각하지 마세요. 십자가를 이해하고 해석하며 십자가에 대한 의견을 가지려 하지 마세요. 십자가는 지금 일어나는 사건으로만 만나집니다. 십자가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입니다. 십자가를 기억하여 의식했으면 충분합니다. 이제 그 십자가 사건 현장 안으로 실제로 지금 뛰어 들어가세요. 일단 점프하여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그다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세상도 교회도 왜 분쟁하며 분열할까

(고린도전서 1:1~17)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도 교회도 왜 분쟁하며 분열할까>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도 교회도 왜 분쟁하며 분열할까”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광고 말씀드립니다. 지금까지 수요일에 말씀을 나누고 목요일에는 십자가 온라인교회 모임을 통하여 그 내용을 다시 한번 되새겨봤습니다. 이렇게 누가복음 중간부터 시작해서 사도행전과 요한복음과 로마서까지를 마쳤습니다. 이제 고린도전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목요일에 십자가 온라인교회 모임을 갖지 않고, 아침 7시에 오늘의 번제 방송을 하겠습니다. 오늘의 번제 방송은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주일에 이루어지게 되고, 십자가 온라인교회 모임은 주일 저녁 7시 30분에 하게 됩니다. 한 주간 동안 네 번에 걸쳐서 방송된 내용을 중심으로 나눔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 점에 차질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제목에서 “세상도 교회도 왜 분쟁하며 분열할까”라고 하였습니다. 세상과 교회를 같은 분열의 장으로 보고 이러한 제목을 정해보았습니다.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시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따라서 고린도 시에 대한 약간의 선이해가 있으면 좋습니다. 고린도 시는 지중해 연안에서 지금의 미국 뉴욕과도 같은 도시였습니다. 고린도는 헬라 문화권에 속한 도시로 로마에 저항하다가 주전 146년에 망했습니다. 그 후 1세기 동안 폐허로 유지되다가 율리우스 시저가 지정학적인 특수성과 항구 도시로서의 경제적 측면 그리고 로마 제국의 통치권을 위한 정치적인 목적 등을 인식하고 재건합니다. 폐허가 되었던 고린도는 주후 1세기경에는 불과 40~50년이 지났을 뿐인데 로마 제국 내에서도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에 이어서 네 번째로 큰 도시로 발전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를 전도할 무렵에는 인구가 60만 명이 있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고린도는 다른 대도시들에 비해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오래된 전통이 100년 동안 단절된 상태였다가 경제적인 측면이라는 이유에서 급조된 도시였습니다. 그렇기에 뿌리 깊은 토박이가 없었고 끊임없이 외지에서 몰려온 사람들의 다민족 다문화 사회였습니다. 이처럼 고린도는 항구 도시로 풍요와 다양한 문화적 특성을 갖는 신흥 도시였기에 정치적인 권세와 위엄이나 문화적인 성숙보다는 물질적인 부를 무엇보다 숭상하는 배금주의가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습니다. 따라서 명예나 전통 같은 인본주의적인 가치보다는 일신의 영욕을 우선시하는 개인주의가 퍼져있었고, 지중해 근경에 존속하던 각종 우상숭배들도 들어와 종교적 혼합주의를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고린도에서는 이러한 특성을 바탕으로 극도로 타락한 성문화가 형성됩니다. 그리스 로마 신들을 섬기는 열두 개의 신전이 있었고, 그중에 고린도 산 위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천여 명의 여성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이 여성 사제들은 종교의식 때에 몸을 파는 창녀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성문화가 어찌나 유명했는지 돈만 알고 순간의 쾌락을 탐닉하는 천박한 생활을 가리켜 “고린도 사람처럼 산다.”라는 속담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아프로디테 여신을 숭배하며 추악한 음행을 두고 “고린도화 하다.”라고 부르기도 했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던 시기에 로마 제국 전체는 모두 타락한 죄악의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악의 도시들 중에서도 특별히 고린도는 “방탕아”라는 별명으로 불리었습니다. 한 마디로 로마 제국 안에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도시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에 이처럼 “방탕아”라는 별명을 가졌던 고린도 시에 복음을 전했고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이때 사도 바울의 동역자는 로마서에서 보았던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복음을 전했고 주후 50년경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2년 6개월 정도 체류하게 되는데 이때 고린도 교회로부터 들리는 소식을 듣고 쓴 편지가 바로 고린도전후서입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볼 때 이해와 해석의 포인트가 되는 부분은 고린도 시의 강력한 세속적 성향입니다. 말씀드렸듯이 고린도 시는 물질적 풍요로움과 극에 달한 문란함으로 인해 로마 제국 내에서도 방탕아로 불리며 소돔과 고모라 같았던 곳이었습니다. 동시에 헬라 문화권의 영향으로 철학적 명석함으로 자기 생각을 주장하고 관철하려는 언어능력을 가진 수사학이나 변론에 뛰어난 자들이 각광을 받았습니다. 또한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풍조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러한 세상의 퇴폐적 기운이 강력하게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한가운데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이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이 방탕아라는 별명을 가진 고린도 시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성도이자 선민이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켜나갈 수 있으며, 이 세상의 기운을 뿌리치고 성도의 모임인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을 것인가가 고린도전서를 보는 관전 포인트입니다.

 

강력한 힘을 뿜어대는 이 세상의 온갖 퇴폐적인 기운에 둘러싸인 고린도 교회에서 첫 번째 문제로 등장하는 것은 분쟁과 분열입니다. 그리고 분쟁과 분열은 이 세상의 특징 중에서 가장 퇴폐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분쟁과 분열은 낯선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전쟁을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정치권에서도 당파 간에 서로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상적인 뉴스거리이기에 우리는 으레 그러려니 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의 분쟁과 분열이야말로 죄악으로 빚어지는 퇴폐적 특징 중에서도 가장 우선적인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마지막에서 로마 교회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16장 17~18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로마 교회에서는 거짓 교사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분쟁을 일으킬 것을 경계하라고 하였습니다만 고린도 교회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교인들 스스로가 분파를 만들어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스스로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베드로) 혹은 그리스도의 분파이기를 자청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나 아볼로나 베드로의 분파를 자칭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파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교인들 중에는 바울파나 아볼로파, 게바파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이들이 옳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 분파에서는 이들을 부를만한 적당한 이름이 없었기에 자기들과 분류되는 한 분파로 만들기 위해 붙인 이름이 그리스도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13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라고 말합니다. 사실은 모두가 다 그리스도에게 속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분파를 만든 사람들은 오히려 분파를 만들지 않은 사람들을 그리스도파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과 교회를 같이 보면서 분쟁과 분열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은 왜 분쟁하고 분열하며 싸우는지를 알면 이 세상의 기운에 둘러싸여 있는 성도와 교회가 어떻게 해야 될지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분쟁과 분열은 영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퇴폐성 1호입니다. 고린도전서는 방탕아라고 불리는 세상의 퇴폐적 기운이 극성하고 있는 도시 한 가운데 세워진 하나님의 교회에 보내진 편지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고린도 시의 이 세상적인 퇴폐성 중의 첫 번째는 분쟁과 분열이었습니다.

헬라 문화권에서는 철학을 중시하였습니다. 철학은 결국 자기의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이 철학의 특징이 분쟁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시키고 관철시키기 위하여 언어능력이 중시되었습니다. 그래서 헬라 문화권에서는 수사학이나 변증법이 특별히 존중되었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시킬 수 있는 사람이 곧 훌륭한 사람이자 위대한 스승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고린도 시는 이 세상의 가장 퇴폐적 성향의 대표였습니다. 세상에서는 분쟁과 분열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분쟁과 분열이 없는 것이 마땅한 이유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퇴폐적 풍조 안에서 살고 있는 모든 고린도 사람들의 머리털 끝부터 발끝까지 주권적으로 관장하고 계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손길이 세포까지 주장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조물주 하나님이 엄연히 살아계심에 대하여 의식하지 못하는 죽은 자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세포 하나하나를 주장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길은 막혀버립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고린도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75억 명 전체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포 하나하나를 주장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죽은 것에 비유합니다. 이전에 죽음의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제가 본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들과 딸이 오열하며 어머니의 몸을 붙잡고 흔듭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더 이상 몸을 붙잡고 흔드는 아들과 딸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의식하지 못함이 죽음으로 비유되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세포 하나하나를 주관하고 계시는데도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기에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의 흐름을 막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주권은 나로부터 흘러서 나의 몸으로 관계하는 대상들에게로 흘러가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에 대해 죽으면 하나님의 주권이 흘러야 될 관계의 통로를 다 막아버리게 됩니다. 75억 명이 세포 하나하나를 주관하시는 조물주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주인 되신 권리를 자발적으로 인정한다면 분쟁과 분열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데도 분쟁과 분열이 일어난다면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과 충돌한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고 인류가 번성했다면 75억 명이 살고 있는 이 지구에서 모든 사람 각자가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고 조화와 균형이 아름다운 특징으로 나타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류는 타락하였고 하나님의 주권은 각 사람에게서 막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각자가 주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면 두 사람이 분쟁합니다. 열 사람이 만나면 세 파, 네 파로 갈라져서 분쟁합니다. 75억 명이 사는 세상에는 75억 명의 주권자가 나타나기 때문에 분쟁과 분열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로부터 분쟁과 분열이 왜 퇴폐적인 기운의 첫 번째로 꼽히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거부하고 뭉개버릴 때 일어나는 일이 분쟁과 분열이기에 다른 퇴폐적인 일들보다도 우선적인 퇴폐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시는 이런 퇴폐적 기운에 의한 개인주의가 절정에 달해있었습니다. 이런 도시 한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분쟁과 분열은 일어나면 안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이야기까지 합니다. 10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아온 경험과 지식에 비추어 볼 때에 이것은 불가능한 말입니다. 부부나 형제간에도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설령 부부가 같이 하나님을 믿고, 온 가족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갖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파와 아볼로파와 게바파와 그리스도파가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은 낯설지 않습니다. 종교개혁 당시를 보면 루터, 캘빈, 츠빙글리, 마틴 부처, 후스 등으로 분파가 나누어졌습니다. 이렇게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자기의 영역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 이러한 분쟁과 분열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일까요? 가톨릭과 개신교는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갖는 일에 실패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들도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갖는 일에 실패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퇴폐적인 기운이 종교개혁자들의 서클 안에도 들어와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뉜 것과 종교개혁자들이 루터파, 캘빈파, 츠빙글리파로 나뉜 것은 다른 일이 아닙니다. 개신교는 셀 수 없이 많은 교단으로 갈려졌고, 개신교의 한 교단인 장로교 내부에서도 셀 수 없는 분파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복음이 시작되는 초장인 주후 55년경에 고린도전서를 기록하며 고린도 교회가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누어지는 일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의 교회 역사는 나누어짐에 대해 아무런 반성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가톨릭이 썩었다고 하여 반발을 일으킨 종교개혁자들도 세상의 퇴폐적인 기운 중에 첫 번째 기운인 분쟁과 분열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끔찍하고도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독일에 가서 이러한 분파 간의 분쟁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교수님들 사이에서 루터파가 강세를 보이는 가운데 캘빈파들이 열악한 궁지에 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보자면 저는 장로교 소속이기에 굳이 말하자면 캘빈파일 것입니다. 그런데 애초에 루터파나 캘빈파가 생긴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분쟁과 분열로 드러나는 퇴폐성이 그들 속에 그대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에 대한 저의 사상이나 관점이 아니라 성경 말씀대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도 아볼로도 베드로도 사역자였습니다. 이들 중 누구도 자기의 분파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퇴폐성에 영향을 받은 교인들이 분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한편 종교개혁자들을 보면 스스로들 분쟁을 일으키며 분파를 형성하고 말았습니다. 이 분쟁과 분열은 죄악에서 생겨난 퇴폐성의 첫 번째이고, 성도와 교회와의 관계에서 첫 번째로 꼽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마지막에서도 이 점을 경계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을 갖고 온전히 합한 자들이 될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1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두 번이나 자신의 분파가 세워질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그리스도이지 바울이 아니며, 바울에게 세례를 받는다고 바울파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볼로에게 세례를 받는다고 아볼로 파가 되는 것도 아니고,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베드로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 이어서 17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말씀드렸듯이 헬라문화권에서는 자기주장을 남에게 관철시키기 위하여 설득력을 굉장히 고귀한 능력으로 생각했습니다. 말로써 말을 이기는 것을 좋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전한 십자가는 이론으로 받아들일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는 사건이고 사실이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놓고 이런저런 토론은 필요 없었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건과 사실을 받아들여 나도 십자가에서 죽은 자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말을 지혜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십자가는 이론 체계가 아닌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이론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분쟁과 분열을 일으키게 됩니다. 십자가를 사건으로 받아들여서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고 인정하는 것은 이론이 아닌 고백입니다. 물론 그로부터 이론이 나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애당초 십자가를 이론으로 받아들이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세상에 대해서 항상 죽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모든 이론과 생각도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나의 이론과 생각이 죽으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생각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사건으로 받아들일 때는 예수님과 함께 죽느라고 다른 생각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 나의 몸의 행동과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주권적 생각에 의한 것이 됩니다. 십자가를 이론이 아닌 사건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사건 속의 예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라는 말씀처럼 쉬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자아의식이 유지되었다면 분쟁이나 분열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졌다면 루터파와 캘빈파는 생길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종교개혁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중에 서로를 마주 대할 수 있었다면 개신교는 나누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쟁과 분열은 세상의 퇴폐성 1호입니다. 이 분쟁과 분열의 기운이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이유는 교회의 바탕이 되는 십자가 사건이 이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나의 죽음의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않기에 교회 안에 분쟁과 분열이 생겨납니다. 반대로 각자가 십자가 사건을 사실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이론과 생각들을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분쟁과 분열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에 대해서만 같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대해서만 같은 말을 하고, 십자가에 대해서만 같은 마음을 갖고, 십자가에 대해서만 같은 뜻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아니고, 십자가가 잊혀지고, 십자가를 잃어버린 상태에서는 반드시 세상의 퇴폐풍조 1호인 분쟁과 분열의 기운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십자가를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마음가짐으로 모여 있는 곳에는 분쟁이 생기지 않을 수 없고 분파가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져야 할 유일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갖고 있는 한 설령 상대방이 십자가를 모를지라도 분쟁과 분열은 생기지 않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기억하고 있다면 나를 마주 대하는 사람이 분쟁을 일으키려 하더라도 나는 그 분쟁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그리스도파는 타인들에 의해서 그리스도파라고 불렸지만 그들은 적어도 분파에 휩쓸리지 않고 있었던 남은 자들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결국 사람 사이에서 분쟁과 분열이 생기고 사람들이 분쟁에 휘말리는 이유는 십자가를 붙잡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분쟁과 분열이 없어야만 사람 사이에도 분쟁이 없어지고 분쟁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분쟁과 분열이 가득합니다. 믿는다는 사람들끼리도 분쟁과 분열이 가득합니다. 한 집안의 가족끼리도 분쟁과 분열이 가득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하여 나의 주권을 내세우는 분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체질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분쟁은 종식되어야만 합니다. 그 유일한 힘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힘뿐입니다. 십자가 죽음이 잊힌 모든 곳에는 퇴폐성 1호인 분쟁과 분열은 끊임없이 나타납니다. 사람을 만나서 분쟁하지 않더라도 여러분 마음속에서 누군가를 향한 미움과 증오와 못마땅함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 사람 앞에서 표현하지 않더라도 이미 분쟁과 분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한 분쟁이 마음속에서 생기는 동안에는 결코 평강 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퇴폐성이 기운차게 휘몰아치는 가운데서 성도로 사는 우리들이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첫 번째로 가짐을 통하여 나와 하나님과의 주권 분쟁이 종식되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만나는 사람이 분쟁을 일으켜도 휘말리지 않음으로 하늘의 평강을 유지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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