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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성령의 은사가 뭔지 알면 받기도 쉽다>의 줄거리:
성령과 친해지는 것이 삶에서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는 일에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땅에서 이루고 싶으신 뜻과 계획이 있을 때 실제로 그 것을 땅에 있는 내 몸을 통해서 이루시는 힘은 성령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일상적인 삶 전체 영역을 책임지시는 성령님의 힘을 교회 모임에 국한 시켜 말할 때 은사라고 합니다. 은사가 뭔지 정확히 알면 받기도 쉬워집니다.
성령의 은사가 뭔지 알면 받기도 쉽다
(고린도전서 12:4~11)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성령의 은사가 뭔지 알면 받기도 쉽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성령의 은사가 뭔지 알면 받기도 쉽다”
12장부터 14장까지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오늘 살펴볼 4~11절에서는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특히 앞부분이 어제에 이어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신학교 때부터 전도사 시절과 목사 시절을 거치며 성령의 은사에 꽂힌 사역자들과 일반 교인들을 보았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애씀과 안타까움을 지켜보면서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말 그대로 성령께서 공짜로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공짜로 주시는 선물인데도 그것을 달라고 강짜를 부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예 성령의 은사를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여기는 분들도 보았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고리타분한 종교적 문제로만 여기거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자신과는 무관한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들은 모두 신앙의 오류입니다. 선물을 달라고 강짜를 부리는 것도 이상하고, 성령의 은사를 나와는 무관하거나 필요 없다고 여기는 것도 이상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강짜를 부리며 달라고 할 수도 없지만, 성령의 은사의 귀중함을 몰라서 받지도 못하고 누리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 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와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조물주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자면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하거나 원치 않는 상태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려는 것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나의 모든 상태를 나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려는 것을 받을 수만 있다면 삶에는 어떠한 문제도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상황을 알고 있는 것 같아도 그것은 착각일 수 있습니다. 가령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고 느껴도 실제로 좋지 않은 상황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조물주로서 그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게 항상 무엇인가를 주고자 하십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고자 하시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년 365일 하루 24시간 평생 동안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지금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좋네 마네, 이루고 싶네, 가지고 싶네, 이런 일이 왜 일어나나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상황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심을 믿는다면 주어진 상황에 대해 잊어버려도 됩니다. 내 상황을 보고 계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지금 내게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고 받을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삶에서 문제 될 일은 없습니다. 무엇을 이루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시기로 되어있는 것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야 될 것들 중에 바로 성령의 은사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1~3절을 통해 성령을 받은 자에게서 나타나는 일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자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피해야 될 자리로 여겨집니다. 이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질 수 없는 저주받은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이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대상들이 다른 신이 되고, 그 다른 신을 좋아하여 추구하며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하여 스스로는 추구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귀신에게 이끌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지구의 77억 인구는 예외 없이 귀신에 이끌려서 세상 것을 좋다고 여기고 다른 신을 섬기며 추구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와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 것을 아무것도 가질 수 없고 세상 것을 추구하는 자체가 끊겨버린 자리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바로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1~3절에서 귀신의 이끌림과 성령의 이끌림을 대조시켜 성령이 어떠한 일을 하시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세상 것을 아무것도 갖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가질 수 있기에 축복의 자리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이끌림을 받기 전에는 십자가가 축복의 자리임을 알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은 아버지를 가질 수 있는 준비가 되기 위하여 세상 것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억지로라도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고자 할 것입니다. 세상 것을 가지지 못할수록 복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자가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를 말씀하시기 전에 이러한 이야기를 한 이유는 귀신에 이끌리는 상태가 끊어지고 성령에 이끌리는 상태가 되어야 성령의 은사도 주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에 이끌리면 세상 것을 좋아하고 세상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자발적으로 세상을 추구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귀신에게 끌려가는 것입니다. 이 끌려감이 끝나는 것은 십자가를 좋아함으로 그 증거가 나타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이 세상에 대해 손댈 수 없는 상태가 되고 세상 것을 가지려고 애쓰지 않는 상태가 이 세상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노예임을 자처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끝까지 따라가겠다는 고백을 하게 되고, 실제로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을 하늘로 보냅니다. 이것이 성령의 은사를 이야기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었습니다. 성령님의 선물이 주어질 수 있는 자리까지 가기 위한 첫 번째 단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령의 은사를 목표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고 하나님만을 가지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을 가지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진행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성령의 선물들이 주어지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 단계까지 가기 위한 전 단계들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앎으로써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에 대해 각각 말씀드릴 것입니다.
8~10절에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은사 하나하나를 아는 것은 우리가 은사를 받기 위해서 더 쉬운 조건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려고 해도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제대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것을 좋아하고 이루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는 상태는 귀신에게 이끌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일 먼저 주시려는 것은 귀신의 이끌림을 끊어내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의 문제 또한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세상 것의 좋아함을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것을 좋아하는 이 마음을 끊어내시기 위해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바를 모릅니다. 자기가 세상 것을 좋아하는 것이 귀신의 이끌림이라는 것을 모르니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십자가가 귀신의 이끌림을 끊어내는 사건이라는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복으로 받아들이면 그 다음 단계로 주시는 것이 성령의 은사입니다.
귀신에 이끌려서 세상 것을 좋아하여 추구하는 단계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끊어지고 나면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 하나님만을 바라게 됩니다.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는 단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단계를 거쳐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 단계를 거치지 못한 채 오직 성령의 은사만을 바랐습니다. 그야말로 강짜를 부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계가 지나면 다음 단계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몸을 접수하시는 단계가 나타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4~6절에서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님과 주님과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마음이 성령님에 이끌리면 세상 것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십자가 자리가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복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럴 때 마음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의 몸을 내 몸처럼 입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떠난 몸은 임자 없는 의자처럼 공석이 되어버립니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라는 노래 가사처럼 임자가 없는 몸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의식하고 욕구해야 육체와 지정의의 기능이 따라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성령에 이끌려 예수님 안에 들어가 예수님의 몸을 나의 몸으로 입고 하늘로 올라가 버립니다. 이제 땅에 공석으로 남아있는 육체와 지정의의 기능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접수하시게 됩니다. 이 단계가 이루어져야 성령께서 마음먹고 주시려는 은사들이 주어지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몸을 접수하신다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4절을 보면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라고 하였습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구체적인 능력과 힘으로 몸이 움직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귀신의 이끌림을 끊어내고 성령에 이끌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고 나면 몸을 움직여야 될 마음은 공석인 상태입니다. 그럴 때 육체가 움직이고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는 기능을 성령의 힘이 장악하시게 됩니다.
이어지는 5절을 보면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직분이란 예수님의 공생애를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공생애 때 이 땅에서 몸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그 몸에는 그리스도라는 직분이 주어졌고 제사장과 왕이라는 직분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몸이 죽은 뒤에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내 몸은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몸을 대신하게 됩니다. 직분은 남자일 수 있고 가정에서 남편과 아빠일 수 있고 직장에서 부장일 수 있습니다. 각양각색의 직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몸이 갖게 되는 직분이 완전히 새로운 출발점을 갖게 됩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몸이 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신분과 직분과 위치가 이제 주님의 공생애 때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을 이루시기 위해 준비되어 사셨듯이 나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을 이루기 위한 준비가 됩니다. 그 직분에서 움직일 때 필요한 힘은 성령께서 주십니다.
그리고 6절을 보면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몸의 직분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대신하게 됩니다. 남자나 여자, 아빠나 엄마, 회사나 가정을 비롯하여 세상에서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모든 직분은 공생애 때 예수님의 몸을 대신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직분과 위치와 신분에서 오늘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에 대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뜻과 계획을 가지고 결정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사역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귀신의 이끌림이 끊어집니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예수님의 몸을 내 몸으로 채택하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럴 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몸을 접수하셔서 삶이 진행됩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서 접수된 몸이 움직이는 상황은 일반적인 삶의 영역 모두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굳이 교회의 모임에 국한 시켰을 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바로 본문에서 언급되는 은사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일반적인 삶의 영역으로 넓혀서 이야기하자면 “성령의 힘” 혹은 “성령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으로 살되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살기에 내 몸으로 살되 몸에 주어지는 직분은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몸을 대신하게 됩니다. 일반적인 삶의 영역에서는 이것이 남자나 여자, 남편이나 아내와 같은 신분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저의 경우에는 설교하는 사람으로서 목사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신분이 예수님의 공생애 때를 대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교회의 모임에 국한 시켜서 말하자면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의 직분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든 몸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접수된 상태는 동일합니다. 일반적인 삶의 영역에 적용하느냐, 교회의 모임에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용어가 달라질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것을 정확히 알 때 올바르게 바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단계는 귀신에 이끌려 세상 것을 좋아해서 추구하는 상태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끊어지는 단계입니다. 둘째 단계는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고 땅에 남아있는 몸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몸과 지정의를 접수하시는 단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려 하고 이루시려고 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이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 상태가 어떻다는 것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이런 것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저런 것이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상황을 다 알고 계심을 믿고 안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상황을 하나님께 계속해서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내 상황을 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붙잡을 때 귀신의 이끌림은 끊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마음은 예수님의 몸을 내 몸으로 삼아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단계에서 땅에 공석으로 남아있는 몸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접수하십니다. 무엇을 이루어야 될 것인가는 하나님의 뜻이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몸은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몸을 대신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직분과 신분과 위치를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직분과 신분과 위치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도록 성령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몸과 지정의의 기능을 접수하신 상태가 되면 성령의 은사를 달라고 강짜를 부리지 않더라도 은사를 주십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아홉 가지 은사가 8~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사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드려보고자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은사 중에 어떤 은사를 받은 사람이었을까요? 병든 자를 고쳤으니 병 고침의 은사를 받은 것일까요?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였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는 일도 있었으니 능력 행함의 은사를 받은 것일까요? 말씀을 전했으니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받은 것일까요?
하나의 은사가 한 사람에게 고정적으로 주어질 수도 있지만, 때에 따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할 때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상황과 문제와 이루어야 할 일들의 성격에 따라서 아홉 가지 은사 중에 어떤 은사라도 주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홉 가지 은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님과 친해지고 성령님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은사가 주어지느냐는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은사가 다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사는 때와 장소를 따라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같은 장소에 모여 있어도 각각 다른 은사를 주실 수 있습니다. 모든 교인에게 공통되게 같은 은사를 주시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교인들이 모여 있을 때는 그 모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려고 하는 큰 그림이 있을 것입니다. 큰 그림을 위해서 각각 성령님께서 주시는 은사의 종류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아홉 가지의 은사를 통해 구분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게 어떤 은사가 있느냐를 따지고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르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단계가 성취되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첫 단계는 귀신의 이끌림이 끊어지는 단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세상 것을 좋아한다면 무조건 귀신에 이끌리는 빗나간 상태입니다. 마음에서 좋아함이란 본래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만 적용되어야 할 좋아함이 귀신에게 이끌려서 세상을 좋아하게 되었다면 빗나간 상태이기에 십자가를 바라볼 때 세상은 끊어질 수 있습니다. 이 단계를 지나서 공석인 몸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접수하시면 성령의 은사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성령의 은사 중 첫 번째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8절을 보면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지혜와 지식이 언급되는데 이 구분 때문에 성경학자들이 골머리를 앓습니다. 그런데 참 외람된 말씀이지만 골머리를 앓는 이유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받아본 사람은 이것의 구분이 전혀 어렵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지혜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백성들이 가져오는 문제의 해결과 재판을 위해 지혜를 구했습니다. 약관의 나이에 왕이 되어 백성들의 재판을 올바르게 판단할 능력이 없음을 하나님께 고백하였습니다. 열왕기상 3장 9절을 보면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여기서 솔로몬이 구한 지혜란 듣는 마음입니다. 모든 송사와 문제를 판단하고 해결해야 될 상황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기를 구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지혜의 말씀의 은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문제에 대한 경험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지식이 많은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도 아닙니다. 설령 그것이 경험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일상적인 문제일지라도 지혜 있는 사람은 그 문제와 나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듣고자 합니다. 이것이 근원적인 지혜입니다. 반대로 문제가 주어졌을 때 “이건 많이 보던 문제이니 내가 잘할 수 있지. 지난번에 이렇게 하니까 잘 되었어.”라고 하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란 지금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나 일이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듣는 것입니다. 내 안에는 어떻게 애를 써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문제와 일과 상황을 마주할 때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하나님과 뜻과 계획이 내 생각의 기능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가장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유리하고 좋은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이 지금 몸으로 마주하는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생각과 뜻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은사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실 수 있습니다. 지금 어떤 문제를 대하든지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이 있으시다.”라고 깨닫는 것은 지혜의 원초적 은사입니다. 그렇게 깨달은 사람의 생각 안으로 실제로 그 문제에 대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들어오게 됩니다. 밖에서 볼 때는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생각 안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말하는 것 같은데 실은 하나님의 뜻과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이루고 싶으신 계획과 뜻을 언제나 생각 속에 넣어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이 땅에서 복사되어 움직이시는 영이 성령이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어떤 일을 대하든지 무슨 문제를 만나든지 그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뜻을 생각 속에 집어넣어 주십니다. 이것이 선물로 주어지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입니다.
내가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하고 잠재력을 발전시키고 개발시켜도 수없이 당면하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담아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듣는 일은 오직 성령의 선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는 첫 번째, 두 번째 단계를 넘어가야 합니다. 귀신의 이끌림이 끊어져서 마음이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몸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접수하실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지혜의 은사도 주어질 수 있습니다. 두 단계는 아홉 가지 은사가 선물로 주어지기 위한 절대 필요조건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는 첫 번째 단계가 이루어지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단계입니다.
아빠라면 자식의 문제를 앞에 놓고 어떻게 해야 될까요? 솔로몬이 백성들의 송사 문제를 놓고 판단하지 못함을 고백한 것처럼 자식의 문제를 판단할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단계와 두 번째 단계를 거칠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식의 문제에 대해 갖고 계신 당신의 뜻을 넣어주십니다. 이것이 지혜의 말씀의 은사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교회의 모임에 국한 시켜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교인들 간에 일어나는 문제를 만날 때에 제일 보편적으로 많이 등장해야 될 은사가 지혜의 말씀의 은사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예배당에 국한 시켜서 말씀하시지만, 지혜를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은사는 삶 전반에 걸쳐 적용되어야 하고 누구나 받아야 할 은사입니다. 교회의 모임에서는 모든 사람이 동시에 지혜의 은사를 받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지혜의 은사로 말을 하면 모두가 다 공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개인의 삶을 살 때는 지혜의 은사가 없이는 공생애 때의 예수님처럼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행하시는 일이 되기 위해서는 지혜의 은사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 전반에서 지혜의 말씀의 은사, 지혜의 행동의 은사, 지혜의 생각의 은사가 나타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첫 번째 단계가 이루어지면 자동적으로 두 번째 단계도 이루어집니다. 자동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몸을 접수하시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어떤 신분과 위치와 직분을 갖고 있더라도 그 직분에 문제가 닥칠 때는 하나님의 뜻이 생각 속에 들어오는 성령의 능력과 힘이 작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은사를 멀리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은사를 강짜로 구하려고 하시지도 마시기를 바랍니다. 은사는 주님을 제대로 믿으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귀신의 이끌림이 끝나고, 세상을 좋아하지 않게 되는 십자가가 유일한 복이라는 사실을 믿고, 주님의 노예로 생각해서 주님이 가시는 곳에는 어디든지 가겠다고 해서 마음이 하늘로 가고 나면 몸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접수하는 일은 당연히 일어납니다. 그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접수할 준비가 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과 힘으로 성령을 주십니다. 그 다음부터 나오는 여덟 가지의 은사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성령님께서 은사를 선물로 주고 싶어 안달이 나시는 그 자리에 십자가를 붙잡고 가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