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조심스럽게 교회를 다시 하자>의 줄거리:
이상적인 교회는 모든 교인이 지체로서 한 분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지체 간에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한 지체의 고통은 모든 지체가 함께 당하고 반대로 한 지체의 영광도 모두가 다 함께 누립니다. 모든 다양한 지체의 온전한 조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정말 이런 교회의 모습이 역사 속에서 나타난 적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 이유를 따져 교회를 다시 시작하라고 우리를 종용합니다.
조심스럽게 교회를 다시 하자
(고린도전서 12:12~31)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22.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23.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24.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교회를 다시 하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조심스럽게 교회를 다시 하자”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그려주십니다. 이상적이라는 말보다는 진짜 교회의 모습이라 하는 편이 더 맞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조심스럽게 교회를 다시 하자”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다시 해야 되는 이유는 지금 교회라고 불리는 상태가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진짜 교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아예 교회가 없다면 다시 하자는 이야기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라고 불리는 현상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기준으로 바라볼 때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기에 다시 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를 다시 하자”라는 말은 문법적으로 틀린 것입니다. “교회를 다시 세우자”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우리의 힘을 모아 다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이 세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굳이 “교회를 다시 하자”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사들이 땅을 내려다보면서 진짜 교회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교회를 다시 한다는 것은 진짜 교회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기대하시고 고대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하자는 의미에서 “조심스럽게 교회를 다시 하자”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다양한 성령의 은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중에서 영들 분별하는 은사에 대해서는 함께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영들 분별하는 은사가 교회 다시 하는 것과 연관하여 꼭 필요한 내용입니다. 영들 분별함이란 사람의 영의 소속 상태를 꿰뚫어 보는 은사입니다.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속해있는지 혹은 사탄과 귀신에 속해있는지를 분별하는 은사입니다. 사람의 영이 하나님에게도 속하지 않고 귀신에게도 속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의 영은 분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에베소서 2장 2절에서 “그때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앞서 보았던 대로 하나님만을 좋아해야 할 마음이 세상 것을 좋아해서 추구하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해 스스로 추구한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귀신에게 이끌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귀신에게 이끌린다는 것은 곧 사탄에 속한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분별에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영들 분별을 할 수 있는 핵심적 기준을 제시해주었습니다. 따라서 영들 분별함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은사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 마음이 실제로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좋아함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의 사람을 골라내는 것이 바로 영들 분별함의 은사입니다. 따라서 영들 분별함의 은사는 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집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지도자 격인 사람에게 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들은 속고 있는 것이고 오해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들에게는 올바른 복음을 전함으로써 하나님께 속한 자인지 아닌지를 구별해낼 수 있고 돌이키게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말씀을 전하는 지도자가 그 마음이 귀신에게 이끌리고 있는 상태라면 반드시 가려내야만 합니다.
이렇게 보자면 영들 분별함의 은사는 예언의 은사와 공통점이 있다고 여겨지지만 분명한 차이점도 있습니다. 예언은 교인으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이 땅을 직선으로 잇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서 얼마나 빗나가 있는지를 알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직선의 출발점은 십자가입니다. 이 직선에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측정해서 출발점인 십자가로 간격과 거리를 좁히고 돌아오게 하는 것이 예언의 역할인 것입니다. 한편 영들 분별함의 은사는 주로 말씀을 전하는 지도자에게 적용되는 은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돌이킴보다는 잘라내고자 함에 의미가 있습니다. 영들 분별함의 은사는 예수님의 진짜 교회로부터 거짓 지도자를 잘라내고자 허락된 은사입니다. 입으로만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영원히 주님의 교회에서 잘라내야 될 자들입니다. 영들 분별함의 은사를 통하여 이들을 골라내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진짜 교회의 출발점이 마련될 수 있습니다. 영들 분별함의 은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저의 말씀이 아니고 본문에서 제시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본문을 기준으로 파악한 교회의 진짜 모습을 현재에 적용해보면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영들 분별함의 은사는 귀신에게 이끌려서 사탄에게 속한 자인지 혹은 성령에게 이끌려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속한 자인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 분별을 통하여 갈라설 수밖에 없는 사람을 골라낸다면 지금 교회라고 불리는 예배당 조직에서 지도자라 불리며 말씀을 전하는 자들 중에서 몇 사람이나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천국을 이야기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시 하자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독재체제 아래에서 지배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의 일이 예배당에서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개척으로부터 시작된 교회가 크게 성장했을 때에 목사가 독재자처럼 권세를 휘두르며 교인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독재자 목사의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 속한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목사에게 속해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모든 교인과 장로들과 당회와 기관들이 목사의 뜻대로 움직이는 지체가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진짜 교회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요? 교회라고 불리는 예배당 조직을 하나의 몸으로 보고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교회가 몸이라면 소속된 교인들은 지체입니다. 김 권사님은 오른손이고, 최 집사님은 왼손이고, 박 장로님은 왼쪽 눈이고, 강 권찰님은 오른쪽 눈이라고 해보겠습니다. 이것은 일반 교인뿐만 아니라 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은 입이고 부목사님들은 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에 소속된 교인들은 몸을 이루는 지체입니다. 수많은 지체가 합쳐서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께 연결된 각각의 지체들이 교인이고 이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25~26절을 보면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진짜 교회라면 어떤 교인이 고통을 받을 때에 다른 모든 교인이 그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며, 반대로 어떤 교인이 영광을 받는다면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교인도 그 영광을 내 일처럼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손톱 밑에 가시만 찔려도 몸 전체가 아픔을 느끼듯이 교회라면 목사, 장로, 집사, 권찰, 성도들이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각자가 열심히 하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인 교회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드려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사시는 동안에 이런 교회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모든 지체가 서로서로 아끼고 사랑하듯이 교인들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교회를 보셨습니까?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내가 영광을 받는 것처럼 즐겁고,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내 고통인 것처럼 아파하며 서로 사랑합니다. 또 각자가 열심히 하다 보면 전체가 다 조화를 이루게 되는 교회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고린도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완벽하게 여겨지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도 얼마 못 가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구제받는 일에 차별을 받는 상황이 벌어지자 히브리파 유대인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구제를 담당할 일곱 집사를 뽑게 됩니다. 다만 일곱 집사는 제대로 된 구제를 행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에 곧바로 박해가 주어졌고 일곱 집사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순교하였고 빌립 집사는 말씀을 전하는 일에 집중하게 됩니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예수님은 머리이시며 교회는 몸이며 각 교인은 몸을 이루는 지체이다. 그렇기에 약하고 힘이 없고 능력이 없을수록 존귀하게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라는 소리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그런 교회의 모습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아는 지식의 한도 안에서는 2000년의 교회 역사에서 진짜 교회의 모습과 그렇게 유지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온전한 아름다움의 조화, 지체와 지체 사이의 끝없는 배려와 사랑, 한 지체가 아프면 모두가 아프고 한 지체가 기쁘면 모두가 기쁠 수 있는 유기적인 교회를 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있을 수 없는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며 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모일 때에는 서로를 신경 쓰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였어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이상하게 서로 신경 쓰며 우열을 다투게 됩니다. 우월감을 위한 경쟁을 하면서 이기면 교만해지고 지면 원망하게 됩니다. 일단 예배당이라는 종교의 울타리에 들어오고 나면 아무도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마음이 깨어있어야 한다는 경계심을 갖지 않습니다. 예배당이라는 울타리에 들어온 것으로 영적인 의무와 책임은 다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며 경계심을 풀어버립니다.
여전도회를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전도회의 존재 의미는 이 땅에서 여자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십자가 생활화를 잘해보자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아내로서 남편 앞에서 어떻게 해야 십자가 생활화를 잘하겠는가? 엄마로서 자녀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 십자가 생활화를 잘하겠는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여자라는 신분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잘 받아들여서 십자가 생활화를 잘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하는 것이 본래 여전도회에서 이루어져야 할 의논일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여전도회를 보신 적은 없으실 것입니다. 기껏해야 군부대에 과자 사가는 것을 선교로 여기고, 김장철에 새우젓 공동구매하는 것을 일로 여기고, 교인들 상대로 바자회 하는 것을 일로 여깁니다. 매일 임원들끼리 모여서 식사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가 강남에 계신 권사님께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요즘 대세인 두 남자 트로트 가수가 있다고 합니다. 권사님들이 이 트로트 가수 중에 한 사람의 팬클럽에 가입하지 않으면 대화거리가 없다고 합니다. 또 권사님들이 이 가수들의 공연이 있으면 반드시 참석한다고 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고 뭐 하자고 모였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다시 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행전 2장 46절을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만 모임에 힘쓰는 궁극적인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이지 않으면 말씀을 나눌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복음에 대해서 알고 있어도 지식으로 알고 있는 복음이 생활 속에서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선포되고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지금의 사건으로 활성화될 수 있습니다. 지식 속에 있는 십자가 사건이 마음에서 지금의 사건으로 활성화되려면 말씀을 전하고 들음이 있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설령 목사나 전도사가 없더라도 성도들끼리의 나눔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이다 보면 이렇게 말씀의 나눔만을 하다가 헤어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신경 쓰게 됩니다. 하나님의 있음보다 사람들의 있음을 더 먼저 의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좋음보다 사람들과의 모임에서 어떻게 두각을 나타내는가를 신경 쓰게 됩니다. 결국 본래 목적인 십자가 복음을 되살리는 말씀은 잊히고 사람과 사람의 부딪힘만이 남게 됩니다. 고린도전서는 로마서 이후에 나오는데 여기에 기록된 모습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분파와 파벌로부터 시작하여 고린도 교회 전체에 하나의 흐름이 휩쓸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교인들 사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가?”라는 흐름이 모든 교인들의 우선적인 관심사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단체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는 흐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회장을 뽑고 실세를 찾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똑같아져 버렸기에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이 모이면 우열을 따지는 경쟁은 반드시 생깁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교회는 부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었습니다. 그 옛날 은사를 따지면서 우열을 가리던 고린도 교회처럼 부유함은 새로운 은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출신이나 사회적 신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들이 새로운 은사와 축복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많은 축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는지, 누가 더 형통한지, 누구의 자녀가 더 잘 되는지를 놓고 경쟁을 합니다. 심지어 전도를 하는 것도 경쟁적으로 시킵니다. 전도 왕을 뽑고 전도 상을 줍니다. 그렇기에 전도를 해도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배당이라는 조직 안에서 우열을 가리는 경쟁에서 1등을 위해 전도를 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지체와 지체 간에 아낌과 사랑이 오고 가며, 각 지체가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밥상을 놓고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들려고 하는데 왼발이 가만있지 못하고 숟가락을 든 손을 차 버린다면 어떨까요? 발이 걸을 때 손이 나도 걸어보겠다고 하면서 땅을 짚고자 한다면 어떨까요? 눈이 귀에게 너만 듣니, 나는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겠다고 하면서 듣고자 한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몸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유는 모든 지체가 한 머리에 연결되어 있고, 머리에 있는 뇌와 신경의 중추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의 문제는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라는 중추신경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연결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몸은 모여도 마음은 제각기 관심거리가 다르다면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몸이 아무리 많이 모이고 열심히 모일수록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모든 지도자들이 많이 모이게 하는 일에만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의 관심사가 몸의 모임에 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진짜 교회의 모습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조심스럽게 교회를 다시 하자”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몸이 모이자는 이야기 전에 마음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일에 익숙해져야만 합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좋게 여겨져야 합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모임의 목적은 십자가 복음을 말씀으로 나눔으로써 서로서로 십자가 사건이 지금의 사건으로 활성화되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지식 속에서 화석처럼 묻혀있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사건은 마음이 붙잡아야 될 실제 사건으로 활성화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모임의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복음을 붙잡고 그리스도 안으로 마음을 보내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보다 사람을 먼저 신경 쓰게 됩니다. 사람들이 사람들을 신경 쓰는 모임이 되면 세상 모임과 똑같아집니다. 그러면 누가 더 우월하고 열등한가를 갈라내야 하는 경쟁이 교회를 지배하게 됩니다.
지금은 온라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팬데믹 사태도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으로 모임을 서두를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상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배당에 모이지 않고 모임이 없더라도 구원은 유지되고 믿음은 유지되어야만 하며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말하고 나눔으로써 마음에서 지금의 사건으로 활성화되게 하는 것은 모임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에는 온라인을 통해서 얼마든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몸의 모임을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몸의 모임을 서두르면 마음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어색하고 잘 되지 않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모이면 차질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러면 그 모임은 그저 인간 집단이 되어버리고 결과적으로는 귀신에게 이끌리는 모임이 되어버립니다. 귀신에게 이끌린다는 것은 마음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이 땅에 있는 것들에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추구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교회라고 하는 기독교 종교의 규모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몇몇 스타 목사님들은 여전히 인기를 끌고 세력을 떨치고 있습니다. 그 목사님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령 상태를 생각해봅니다. 대체 어떤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전부 마음이 땅에 붙어서 귀신에게 끌려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영들 분별함의 은사를 통해서 볼 때 설교를 들어보면 1분만 들어봐도 알 수 있습니다. 유명한 첼리스트가 콩쿠르 심사에서 첫 음만 들어도 연주자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 말씀을 들어보면 1분도 안 되어서 그 사람의 영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귀신에게 이끌려 설교하고 귀신에게 이끌리는 사람들이 호응하는 귀신의 잔치가 됩니다.
제목에서 “조심스럽게 교회를 다시 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를 세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기대하시는 교회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죽으면 죽으리라 마음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끊임없이 경계심을 풀지 않고 마음이 이 세상 무엇에 붙어있는지를 확인함을 통해 영의 상태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얼마나 빗나가 있는가?”를 자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임으로 교회는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면 그런 사람들 전체를 보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파악하시고 세워 가실 것입니다. 그럴 때 몸이 만나는 모임도 원활하게 됩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시의적절하게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주님께서, 성령께서 모이게도 하시고 헤어지게도 하시고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어느 한 곳에 몸이 모이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이러한 인상을 깨뜨리고 지우고 부숴버려야 합니다. 몸은 모이지 않을지라도 마음이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렇게 될 때 두세 사람이 만나고 서너 사람이 만나고 열 사람이 만나더라도 모인 대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체질이 되어서 중단되지 않을 때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 서로가 서로를 돕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모임에서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함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와는 또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열 명이 모이든 스무 명이 모이든 중요한 것은 마음 상태입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였더라도 영적인 책임과 의무를 다한 것은 아닙니다. 모일 때마다 마음은 더 긴장하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령으로부터 은사도 주어지고 한 하나님, 한 예수님께 속할 수도 있습니다.
몸의 모임으로 영적인 책임이 다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모임 콤플렉스를 벗어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두를 것 없습니다. 섣부르게 몸이 모이려고 계획할 것이 아니라 각자 처소에서 십자가 생활화가 완전히 체질이 되도록 날마다 순간마다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마음이 세상을 떠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 안에 모이는 일에 우선 나 한 사람의 자리를 보태는 것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조심스럽게 교회를 다시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 교회를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은 지금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 각자가 지금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삶의 자리에서 교회를 다시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마음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우리의 체질이 되게 하여 주시고, 이 체질이 유지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임과 흩어짐도 나타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