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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랑이 없어서 생긴 손해불감증 환자들>의 줄거리:
매일 사람 만날 때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일을 우리는 언제까지 지속해야 합니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하시고 사랑이 없으면 어떤 유익도 발생할 수 없다 하시는데, 사랑 없이도 뭔가 되려고 하거나 뭔가 되었다고 느끼기도 하고, 사랑 없이도 이런저런 유익과 손해를 계산하면서 사는 우리는 대체 영적으로 어떤 상태일까요? 사랑이 없어 생기는 손해 불감증부터 느끼는 감각이 살아나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랑이 없어서 생긴 손해불감증 환자들
(고린도전서 13:12~31)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사랑이 없어서 생긴 손해 불감증 환자들>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사랑이 없어서 생긴 손해 불감증 환자들”
오늘 살펴볼 본문 13장은 그 유명한 “사랑의 찬가”라고 불리는 내용입니다. 사랑의 열다섯 가지 특징이 나오는데 오늘은 먼저 1~3절까지의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 마지막 절인 13절을 보면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1절을 보면 믿음과 소망의 단계에 머무르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어린아이에 비유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에 도달하는 것이 온전해지는 단계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본문과 관련하여 “사랑이 없어서 생긴 손해 불감증 환자들”이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사랑이 없어서 생긴 손해란 무엇이고 그 손해에 대해서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사랑을 하고 있는 상태는 바람직하고 좋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이 없어서 생긴 손해에 대하여 불감증에 빠져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직 사랑이 없다면 적어도 이 불감증에 빠진 상태에 대해서라도 감각을 되살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12장 31절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랑 장이라 불리는 13장의 내용이 이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을 간절히 원할 것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도대체 어떤 것이냐를 말하기에 앞서 사랑의 효용성부터 말씀하십니다. 은사로서의 사랑의 가치란 다른 어떤 은사보다도 앞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1절을 보면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고 하였습니다. 방언은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외국어에 능통하게 되는 대단한 은사입니다. 그리고 또한 천사의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것도 엄청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은사조차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3절에서도 이와 같은 맥락의 내용이 이어집니다. 예언이나 믿음을 비롯한 모든 은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는 휴지와 같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러한 말씀을 보면 사랑이 없는데도 은사가 주어질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22~23절에서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 못 들어갈 자들 중에서도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일이 가능한 내막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과는 연관성이 적기에 다른 맥락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다면 하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의 특징입니다. 사랑이 없는 상태는 여러 가지 은사 중에서 사랑이라는 한 가지 은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어떤 대단한 은사를 받았더라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사랑이 없으면 대단한 헌신과 구제를 했더라도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면 “…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는 낫다.” 혹은 “내가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랑이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오직 사랑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사랑이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낫습니다. 또 내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에 태어난 것이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낫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내가 지금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하나도 낫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하나도 아쉬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이 없어도 왕이나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재벌회장이나 대학총장을 비롯한 고관대작과 사회적 명사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사랑 없는 고관대작이나 사회적 명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 없는 대통령은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낫지 않은 상태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 없는 대통령이 없다고 해도 하나도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비단 높은 지위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 없는 남편이나 아내는 있다고 해도 없는 것보다 나을 바가 없습니다. 없다고 해도 아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문 말씀에 따르자면 어떤 지위나 신분이라도 사랑이 없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태어나게 하시고 지금까지 살게 하시는 단 하나의 이유는 사랑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게 사랑이 있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성공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보란 듯이 잘살아 보기 위함이 아닙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끌기 위함이 아닙니다. 모든 세상의 일들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들입니다. 단지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유념해야 될 일은 사랑을 갖는 것입니다. 내게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태어나지 않아도 아쉬울 것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오히려 없는 편이 더 낫고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낫습니다. 사랑 없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다 이 세상과 관계들에 대해 공해만 늘려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없는 말과 행동처럼 독성이 강하고 유해한 공해는 달리 없습니다.
이어지는 3절을 보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곧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익이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참 특이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 정도면 이것이 사랑 아닐까요? 그리고 하나뿐인 몸까지도 내주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행동을 하는데도 사랑이 없다는 것일까요? 또 특이한 것은 “…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전 재산을 팔아 구제하고 하나뿐인 몸을 불사르게 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즉에 자기 유익을 구하려는 마음은 관계가 없을 것입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려는 마음이 남아있다면 이런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재산을 다 팔아 구제하고 하나 있는 몸을 희생한 사람이 이 소리를 듣는다면 “내가 언제 나의 유익을 찾으려 하였느냐”라고 콧방귀를 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유익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로부터 사랑이 무엇이며 전 재산을 다 팔아 구제하고 하나 있는 몸을 희생할지라도 사랑이 없는 이유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은사로서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사란 12장에서 반복하여 언급되었듯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선물입니다. 은사란 나를 위한 일이 아니기에 은사로서의 사랑 또한 나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사랑은 다른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에서 다른 사람을 향함으로써 사용할 수 있는 은사입니다. 다만 이 사랑의 은사와 다른 은사는 중요성에 차이가 있습니다. 사랑의 은사가 없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아서 세상에 없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태어난 것을 잘 됐다고 말하고 지금 죽지 않고 살아있음이 잘 됐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우선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씀드렸듯이 은사는 다른 사람을 향해야 하는 일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만날 때는 누구를 만나든지 언제 만나든지 어떤 상황에서 만나든지 변함없이 주어지는 원초적인 상황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이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에 만남 자체보다도 더 원초적이고 근원적이고 우선적인 상황은 바로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시며 하나님이 유일한 좋음이시고 하나님이 유일한 주권자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지금 배우자를 눈앞에 두고 있을지라도 마음에서 항상 더 원초적으로 있는 사실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분으로서 다른 모든 것들을 있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마음의 채움이 되시는 좋음이시다. 하나님만이 지금 이 상황의 유일한 주권자이시고 주체성이시다.”라는 사실은 지금 우리가 말씀을 전하고 듣는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연하고도 원초적인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다는 이유에서 잊힙니다.
바로 이 점에서 사람은 세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사람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과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사실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엄연히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이 틀림없는데도 그 사실을 완전히 뭉개버리고 하나님이 전혀 없고 하나님이 전혀 좋음이 아니며 하나님이 전혀 주권자가 아닌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역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에 대해서는 무시합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실제 삶에서 사람을 대면할 때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있지도 않으시고 좋지도 않으시고 주권자도 아닌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믿고 붙잡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엄연하고도 원초적인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이라는 감각을 통하여 붙잡습니다. 그래서 마치 눈앞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드러내시기라도 하듯이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의 사실 앞에서 어떻게 올바른 반응할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에 대한 가장 올바른 반응의 방식은 십자가를 붙듦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신다고 해서 스스로 주권자가 되려는 나 자신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보이는 세상 것들에서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찾으려고 하는 나를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입니다. 손과 발에 못 박히고 배에 창이 찔리고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의 모습을 나의 모습이라고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으로부터 나타나는 일이 소망과 사랑입니다. 13절을 보면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붙잡을 때는 두 방향으로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하늘을 향해서는 하나님을 가지기를 소망하고, 땅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게 됩니다. 믿음에서 출발하여 소망의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소망이 어떻게 사랑으로 연결이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과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의 원초적인 상황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엄염한 사실로써 존재합니다. 돈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누구와 함께 있을 때나, 어디에 있을 때나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은 나의 환경이 되고 상황이 되어 주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소망으로 발전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보면 믿음과 소망만으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한 것처럼 보여집니다. 실제로 믿음과 소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믿음은 어떤 대상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에 대한 인정입니다. 그리고 소망은 그렇게 믿는 대상에 대한 추구입니다. 돈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듯이 돈을 믿습니다. 그리고 돈을 믿는 사람은 실제로 돈을 많이 갖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보자면 믿음과 소망을 사랑에 포함 시킬 수 있다고 보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분리하여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은사라고 하였습니다. 은사라 함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되도록 주어진 선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에 대해 진심으로 반응할 때에 믿음과 소망의 상태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사랑이란 이러한 믿음과 소망의 상태를 다른 사람 앞에서 유지하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기도하면서 믿음과 소망을 발동하여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은사로서의 사랑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사랑은 다른 사람을 향한 은사로 작용할 때에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특이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다른 사람 앞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실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에 우선적이고 올바르게 반응할 때에 믿음과 소망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 상태를 다른 사람 앞에서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할 때에 마주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은사로써 사랑을 얘기할 때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을 따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구분하지 않는 사랑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 떼려야 뗄 수 없고 분리될 수 없는 내막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사람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유지함을 통해 생겨납니다. 그리고 사람 사랑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 사랑이 완성되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사랑은 사람 앞에서 완성되고, 사람 사랑도 하나님 앞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차이는 나 혼자 갖느냐 다른 사람 앞에서 갖느냐의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나 혼자 하나님에 대해 갖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아가씨에게 애인이 있습니다. 아가씨는 애인과 보내는 둘만의 시간이 너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가씨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 애인을 소개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심지어 다른 사람 앞에서는 남자 친구가 있음을 숨기거나 스스로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릴 정도입니다. 그래서 마치 애인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애인의 있음과 좋음과 애인에게 속해있음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하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아가씨는 그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혼자 있을 때의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남자를 외로움 퇴치용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에 제일 먼저 나타나는 특징은 사람들 앞에 드러내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지인들을 불러놓고 결혼식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드러냄으로써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을 믿고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이심을 인정하기에 소망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이 유일한 주권자이시기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사람 앞에서 하면 하나님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사람들 앞에서 애인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는 아가씨의 예를 든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애인이 있어서 좋고 애인에게 속해있음을 망각한 채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사랑일 수 없듯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외로움 퇴치용으로 쓰고 있을 뿐입니다. 또 하나님을 나 자신의 마음의 평안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함이 아닙니다. 똑같은 믿음과 소망일지라도 다를 수 있습니다. 똑같은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에 대한 반응일지라도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혼자 있을 때의 믿음과 소망은 중요합니다. 혼자 있을 때 하나님이 좋았다면 나가서 사람들 앞에서도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에 대해 믿음과 소망을 지켜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람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지켜나가면서 하게 되는 말과 행동은 이후에 언급되는 열다섯 가지 특징들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람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 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2장 35~40절을 보면 율법사가 예수님께 어느 계명이 큰지에 대해 묻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37~40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라고 대답하십니다.
여기서 “둘째는 그와 같으니”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율법사의 질문은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대답하십니다. 이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둘째로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며 첫째 계명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의 기준이 율법사가 생각하는 기준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사는 단순히 가장 큰 계명을 알고 싶었을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에 비해 조금도 비중이 모자라지 않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이 이웃 앞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조금 이해가 힘들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일서 4장 20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하나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마주 대하고 있을 때 하나님 사랑의 기회가 생겨나며,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마주할 때 사람 사랑의 기회도 주어집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보이는 사람 사이에서 동시에 사랑은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살면서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과 만나려고 태어난 셈입니다. 하나님이 아직도 데려가지 않는 이유 또한 만날 사람이 있고 만날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말씀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서 혼자 살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혼자 살고 계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살려두고 계신 이유는 만날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만나서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믿고 소망하며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을 동시에 이루어야 될 하나님의 바람이 있기 때문에 아직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기도를 통하여 믿음과 소망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있음을 믿고 하나님의 좋음을 표현하고 하나님을 소망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무척 귀중한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과 교제를 했다면 이제 문밖에 나가서 사람을 만날 때에 사랑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은 혼자 있을 때에 믿음으로 붙잡던 엄연한 사실입니다. 또한 혼자 있을 때 그 좋음을 믿기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소망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주권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과 소망을 그대로 사람 앞에서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이루어져야만 동시에 사람 사랑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 없이 전 재산을 팔아서 구제하고 몸까지 내주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이라는 엄연한 사실에 대해서 믿음과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과 소망을 사람 앞에서 표현하는 대신에 사람의 처지를 보고 그 사람을 위해 전 재산을 팔아 구제하고 몸까지 희생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은 하나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사랑도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비어있는 마음은 채워지기를 추구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구제하고 몸까지 내어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구제와 희생을 통하여 마음을 보람으로 채워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본래 마음은 하나님으로만 채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고귀한 형태의 보람을 위하여 구제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귀한 형태의 보람도 마음을 채우는 유익이 될 수는 없습니다. 도와주어야 될 사람을 보기 전에 먼저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있으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은 엄연히 마음을 채우실 수 있는 유일한 좋음이십니다. 또 그 하나님은 엄연히 나와 내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 하나님이 눈앞에 나타나신 것처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붙잡고 그 하나님을 소망하고 그 하나님의 주권을 소망하는 중에 사람을 만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진정으로 하나님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망의 단계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해서도 그를 위한 최선의 말과 행동을 할 수 있기에 진정한 사람 사랑도 이루어집니다.
사랑이 없음으로 발생하는 손해는 엄청납니다. 믿음과 소망의 단계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아직 어린아이의 단계입니다. 이 단계를 지나서 사람 앞에서 믿음과 소망을 유지함으로써 하나님 사랑을 완성하여 진짜 하나님을 가지게 되는 경험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돈을 소망하던 사람이 돈을 벌면 기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소망하는 단계를 넘어 하나님을 가지는 사랑의 단계를 경험하시고, 그럼으로써 모든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들에게 최선이 될 수 있는 말과 행동으로 삶의 내용을 채워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그저 믿음과 소망의 단계에서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안타까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통 중에 지냈는지 모릅니다. 사랑이 없어서 오는 손해에 대한 민감함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사랑의 은사를 받음으로써 사람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람 사랑을 완성하여 인생이 사랑으로만 충만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