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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랑은 하나님 부자 되기의 팔부능선>의 줄거리:
하나님 가지기, 하나님 부자 되기, 하나님으로 배부르기가 왜 내게서 지진 부진할까요? 하나님의 유일하신 있음과 유일하신 좋음과 유일하신 주권자 되심을 믿고 그에 올바로 반응하기 위하여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부진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다. 팔부능선까지 왔습니다. 넘어야 합니다. 팔부능선을 넘는 일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 부자 되기의 팔부능선
(고린도전서 13:4~13)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사랑은 하나님 재벌 되기의 팔부능선>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 재벌 되기의 팔부능선”
우리는 그동안 반복하여 하나님 가지기, 하나님 부자 되기, 하나님으로 배부르기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해왔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왜 하나님으로 배부르지 못하고 지지부진할까요? 우리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을 믿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좋음을 믿어서 소망합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믿고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원초적인 사실에 대하여 그릇됨 없이 올바르게 반응하고 싶어서 주님의 십자가를 늘 염두에 두고자 합니다. 하나님 말고 이 세상의 모든 있음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 말고 모든 좋음에 대하여 죽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살아나려는 나의 주체 됨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일을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고 하는데 여전히 하나님으로 배부르기에 지지부진한 모습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낙담도 금물입니다. 이렇게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믿고 소망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붙잡는 일에 우리의 마음을 쏟고 있다면 그런 분들은 팔부능선까지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재벌 되고,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하나님을 온전히 가질 수 있는 최종 목표지점을 향하여 팔부능선까지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팔부능선을 넘는 일이 바로 사랑하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12장 마지막 31절에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기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다만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이 성령의 은사를 사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의식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기를 쳐다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한 마지막 팔부능선을 넘을 수 없고, 하나님과 하나 되기의 과정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팔부능선을 넘지 못하는 한 십자가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기 위해 준비된 은혜와 선물 전체를 다 받아서 누릴 수는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지난 시간에 살펴본 1~3절에서 사랑이 없다면 어떤 신비한 은사도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어떤 대단한 능력도 아무것도 아니며, 어떤 높은 지위도 아무것도 아니며, 어떤 대단한 희생과 구제도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끝까지 사랑 없이 살다가 죽을 바에는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단 하나의 이유는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알고, 주님의 승천을 믿고, 주님과 함께 지금이라도 하늘로 떠나는 것이 가장 유익한 일임을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직 데려가시지 않는 이유는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지금 제공하고 계시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에 대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반응하는 일은 사랑하는 데까지 밀고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팔부능선에서 중단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던 때와 같습니다. 정탐을 마쳤으면 가나안 땅으로 진격해 들어가서 약속의 땅인 복지를 얻으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데스바네아가 팔부능선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이 팔부능선을 넘지 못했습니다. 결국 가데스바네아에서 좌절한 끝에 사십 년을 광야에서 겉돌다가 20세 이상 모든 장정은 다 죽고 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팔부능선까지 왔어도 사랑하기를 넘지 못한다면 십중팔구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하나님과 하나 되는 지점에는 이를 수 없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를 놓고 세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좋은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정말로 주님께로 와서 쉬고 계십니까? 또 이어지는 29~30절에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쉬게 하신다는 말씀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배워야 할 멍에가 있고 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멍에와 짐을 지는 것이 진정한 쉼이고 참 평강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서 느끼는 어려움은 아직도 여전히 자동적으로 이 세상 것을 짊어지는 죄적인 습관과 예수님의 멍에를 지는 복음 사이에서 마음을 확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갈팡질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는 동안에 져야 할 예수님의 짐과 멍에는 오직 사랑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동전의 앞뒷면같기 때문에 떼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사람 사랑이 이루어지고, 사람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하나님 사랑도 이루어집니다. 이 사랑은 어려워 보이고 이상적으로 보이고 힘들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께서 이제까지 세상일을 짊어지고 책임지고 감당하기 위하여 겪었던 과정의 어려움과는 질이 다릅니다. 사랑은 어려워 보이고 힘들어 보이고 우리로서는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님이 가르쳐주시는 대로 사랑이라는 멍에와 짐을 질 때는 진정한 쉼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쉼이 없고 평강이 없고 하나님으로 배부름이 없다면 팔부능선에서 사랑하기를 주춤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음을 확정합시다. 내가 태어난 이유는 가정을 잘 다스리고 이끌기 위함이 아닙니다. 건강을 유지하여 오래 살기 위함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내로라하는 자리에 들어서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아예 의식 자체를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자식을 잘 키워야 한다, 건강해야 한다, 하는 일이 잘돼야 한다. 이런 모든 의식이 여러분을 지치게 하는 짐이 됩니다. 이제 내가 맡은 짐, 내가 이루어야 될 짐, 내가 지고 가야 될 멍에는 오직 사랑밖에 없다고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사랑은 실제로 해보지 않으면 왜 쉼이고 평강이고 하나님으로 배부르기인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랑의 찬가를 외우고 노래하며 사랑의 중요성을 역설할지라도 실제로 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사랑을 관념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내가 사람을 만났을 때 사랑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사랑의 속성을 열다섯 가지로 예를 들어서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열다섯 가지 속성을 다 살펴볼 수는 없을 것 같지만 이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다만 말씀드린 대로 성령의 은사로서의 사랑은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는 원초적인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그것은 바로 유일하신 하나님만이 스스로 있음이시며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있게 하신다는 사실, 하나님만이 나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좋음이라는 사실, 하나님만이 이 세상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조물주로서 또한 주권자가 되셔서 이끌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원초적인 사실은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무슨 일이 생기든 아니든, 부자든 가난하든, 높거나 낮거나, 실패했거나 성공했거나 언제나 따라다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이 사실에 가장 먼저 반응해야 합니다. 그 반응의 태도가 바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보이지 않는 사실이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어서 그 사실을 붙잡았다면 이제 소망의 단계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보다는 세상 것들의 있음을 먼저 붙잡으려 하고 먼저 마음에 닿게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좋음보다는 세상 것들의 좋음을 소망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죄적 체질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슨 일만 당하면 나의 주체성이 불끈불끈 살아납니다. 이것도 죄적 체질 때문입니다. 이러한 죄적 체질 때문에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께 나를 던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죄적 체질 때문에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에 올바르게 반응할 수가 없습니다. 죄적 체질을 스스로 이기고 하나님께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붙잡고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믿고 소망하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상태가 사람을 만났을 때도 유지되면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은 팔부능선을 넘어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이루어질 때 사람에 대한 사랑도 이루어지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나타나는 사랑의 열다섯 가지 속성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믿고 소망하는 상태를 적용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열다섯 가지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소망한다면 그 믿음과 소망을 사람을 만났을 때 적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과 소망을 적용할 때 사람에 대해서 나타나는 태도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모든 내용을 다 다루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사람 앞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믿고 소망함을 철저하게 유지한다고 가정해보고 사람 앞에서 어떤 태도가 나타날 것인가를 기본 패턴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주일 저녁 온라인 교회 모임을 통하여 다루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사람 앞에서 유지할 경우에 그것이 어떻게 사랑으로 나타나느냐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사랑의 대표적인 속성 몇 가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언급한 사랑의 첫 번째 속성은 오래 참음입니다. 헬라어에서 사랑은 여러 가지 표현으로 구분됩니다. 절대적인 신의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αγάπη), 친구와의 사랑을 의미하는 필로스(Πύλος), 남녀 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에로스(ἐρως) 등이 있습니다. 다만 어떤 사랑의 표현이든지 로맨틱한 달콤함이나 황홀함 혹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을 떠올리게 합니다. 반대로 사랑이 없는 상황에 대해서는 가슴 시린 느낌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도 바울은 사랑의 첫 번째 속성으로 이러한 가슴 뭉클함과는 동떨어진 오래 참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래 참음이라는 말 자체가 참기 어려운 말입니다. 사이다처럼 시원한 느낌을 주는 말이었으면 좋겠지만 다짜고짜 오래 참으라니 멀리하고 싶어질 지경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유지하고 있다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일은 바로 오래 참음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먼저 눈으로 봅니다. 그리고 눈으로 보는 대로 마음에서는 즉각적인 반응이 일어나게 됩니다. 비단 눈으로 보고 외모를 판단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하는 말을 듣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마음에 들어오고 나면 괜찮다고 여겨서 수용을 하든지 좋지 않다고 여겨서 거부하는 반응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오래 참음이란 바로 이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조물주이자 주권자이심을 믿는 사람은 내가 만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있게 하셨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조물주이신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시고 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사람에 대한 반응을 직접적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오래 참음이란 상대에 대한 반응의 억제이고 반응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그 사람을 지으셨고 주권자로서 그 사람을 이끌어 가시는 분이시기에 그 사람을 알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마주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을 믿는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존재임이 믿어집니다. 이는 곧 그 사람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심을 믿습니다. 이 믿음을 가졌다면 내 속에서 일어나는 판단과 분석과 단정 짓기를 통한 반응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반응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언제까지 참으라는 것일까요? 오래 참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될지를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실 때까지 반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을 있게 하시고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실 때까지는 반응하기를 참아야 합니다. 이렇게 오래 참음 없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대로 그 사람의 외모와 말과 행동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인다면 그것은 사랑의 실패입니다. 그 사람 앞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무시하고 지나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사랑도 중단되고 그 사람에 대한 사랑도 시작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 먼저 경계합니다. 그러나 경계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반응하고자 하는 나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 불끈불끈 올라오는 반응을 경계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판단하고 분석해서 단정 지으며 반응하려는 마음을 누르는 일을 위해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사람 앞에서도 저는 아버지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있게 하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태도를 유지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말과 행동이 나오기 전에 나는 주님과 함께 죽겠습니다. 내 마음은 이 순간에도 하나님이 좋아서 이 자리를 떠나 아버지께로 가오니, 남아있는 몸을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과 행동을 하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의 내용이 오래 참음이라는 표현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에 꼭 이렇게 기도하지 않더라도 오래 참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는 있어야 합니다. 이 단어가 담고 있는 뜻을 순간적으로 떠올리며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에 대해서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판단 기준과 경험과 단정 짓기의 습관을 따라서 반응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첫 번째 은사로써 나타내는 사랑의 속성입니다.
사랑의 두 번째 속성은 온유함입니다. 온유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크레스테워매(χρηστεύομαι)는 직역하면 “친절함, 따듯하게 상대를 받아들임”이라는 뜻입니다. 상대방이 내게서 저항감을 느끼는 대신에 받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이 온유함은 오래 참음으로부터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났을 때 상대에 대한 반응함을 죽여서 오래 참으면 거부를 비롯한 판단과 단정 짓기가 적용되지 않고 객관적으로 나와 분리되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몰랐을 때는 마음에 들든지 들지 않는 상태였을 수 있습니다. 내 반응이 살아나면 상대가 객관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내 기준을 가지고 주관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멀쩡한 사람도 나쁜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으로 오해해서 달라붙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잘못된 반응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반응을 죽이고 나면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객관적으로 보게 된 그 사람의 모든 상태는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난 모습이 아닙니다. 마치 바로의 강퍅함조차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셨듯이 내가 마주하는 상대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든 마귀를 통해 간접적으로 움직이시든 하나님의 주권 바깥에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시는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있게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믿고 소망하고 있다면 이 사람에게서 특별히 판단이 없어지고 그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살려두셨다는 것은 주권 안에서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태임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유지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살려두고 계심을 알고, 이 사람을 이러한 상태로 허락하고 계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이처럼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받아들임이 사람을 만날 때에도 계속 적용되면 오래 참음과 온유함의 속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랑의 세 번째 속성과 네 번째 속성은 쌍을 이루고 있습니다.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시기나 질투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상대방이 가졌을 때, 내가 이루고 싶은 일을 상대방이 이루었을 때, 내가 대단하다고 여기거나 좋다고 여기는 일이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는데 상대방에게 일어났을 때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어떤 대단한 것을 가지거나 대단한 일을 이룬 사람을 만났을 때도 내가 여전히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믿고 있다면 시기나 질투는 생기지 않습니다. 시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있음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좋음을 소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질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질투는 내가 소망하지만 이루지 못한 일을 다른 사람이 이루었을 때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좋음을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 것을 이룬 사람을 시기하거나 부러워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100억 원을 손에 넣었다고 해보겠습니다. 통장에 들어온 100억 원을 기뻐하고 있는데 노숙자가 땅에 떨어진 500원 동전을 줍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게 100억 원이 있는데 500원 줍는 것을 부러워할 사람은 없습니다. 100억 원이 생긴 사람은 아는 사람에게 1억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500원 주운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났을 때 철저히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믿고 소망한다면 세상 것을 가진 자를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않습니다. “부러워하면 지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 사람 중에 부럽거나 질투심이 난다면 사랑이 아예 시작도 되지 않았거나 허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시기와 질투의 방향이 반대입니다. 자랑은 사람을 만날 때에 그가 갖지 못한 세상 것을 내가 가지고 있을 때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이 또한 생기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어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는 이유는 유일하신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고 소망의 대상이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유일한 좋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가기 위한 세상에 대한 죽음을 가져다줍니다.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죽게 해주는 십자가가 자랑거리가 되었기에 무엇인가 세상 것을 가졌음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좋으심만을 믿고 소망하는 바람에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는 상태의 사람은 이 세상 것이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아니라 두신 것임을 압니다. 그렇기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사람 앞에서 내가 세상 것을 조금 더 가지고 있더라도 결코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와 연관된 사랑의 다섯 번째 속성은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만은 높아짐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믿고 소망하는 사람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 하늘을 향해서는 하나님을 소망하고 땅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세상 것을 가지고 그 위에 쌓아서 올라서는 높아짐을 실행할 수는 없습니다. 자랑이 세상 것을 가진 것에 도취된 상태에 초점을 맞춘 단어라면, 교만은 세상 것을 가지고 위에 올라서서 다른 사람을 아래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을 믿고 소망을 유지해가는 사람이 교만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다섯 가지를 살펴보았는데 나머지 항목들에 대하여는 여러분께서 하나씩 적용하며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온라인 교회 모임 때에 더 나눌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 재벌 되기에 넘어야 할 팔부능선입니다. 이제 마음을 확정하십시다. 사랑이 힘들어 보이고 이상적으로 보이고 불가능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만 확정되면 고속도로 뚫리듯이 길은 뚫립니다. 사랑하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사랑하기처럼 쉬게 해줄 수 있는 다른 행함은 없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사랑의 열다섯 가지 속성은 외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닌 내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가짐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사랑하기를 통하여 우리 모두 하나님 재벌 되기의 팔부능선을 넘어가십시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사도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받아들여진다면 사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팔부능선을 넘기 위한 첫 발걸음이 온전히 목표지점까지 이를 수 있도록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