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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2

녹취문: 방언 현상이 선민 멸망의 전조이다_태승철 (고린도전서 14:1~40)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9.10|조회수113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방언 현상이 선민 멸망의 전조이다>의 줄거리:

방언 자체는 성령의 은사가 맞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너무나 뜬금없이 방언 현상을 멸망 당할 전조로 말씀하십니다. 방언 현상이란 방언이 하나님이 주신 언어가 분명한데 그 의미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복음인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연쇄 과정이 분명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의미가 전혀 마음에 와닿지 않게 됩니다. 이런 방언 현상은 바로 멸망의 전조라는 것이지요.

 

방언 현상이 선민 멸망의 전조이다

(고린도전서 14:1~40)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5.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방언 현상이 선민 멸망의 전조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방언 현상이 선민 멸망의 전조다”

우리가 읽은 본문 22절을 보면 “표적”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표적은 표시, 조짐, 전조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표적이라는 말이 좀 더 피부에 닿기 위해서 전조라는 말로 바꾸어 제목을 정해보았습니다. 선민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멸망하게 된다면 전조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방언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방언 현상은 방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은 12장에서부터 시작된 성령의 은사에 관한 이야기들의 결론이 내려지는 장입니다. 성령의 은사에 관한 이야기는 고린도 교인들이 특별히 방언을 좋아함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이 받지 못한 자들 앞에서 교만하게 되고, 마치 방언을 못 받으면 구원을 못 받은 것처럼 여기는 풍조가 발생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12장부터 14장에 걸쳐 성령의 은사 전반에 걸쳐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드디어 방언에 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해나갑니다.

 

사도 바울이 방언을 이야기하며 마음속에서 붙잡고 있는 핵심 사안이 있습니다. 방언은 입에 담고 귀로 듣는 언어이지만 그 의미를 전혀 모른다는 점입니다. 방언 그 자체는 성령의 여러 은사 중 하나인 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방언의 유익함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저의 경험과 교우들로부터 접한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방언으로 기도할 때에는 오래 기도할 수 있는 유익함이 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는 방언기도를 가르쳐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주기도문을 구절구절 붙잡고 의미를 생각하며 간구하며 드리는 기도도 방언 못지않게 오래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습관이 되어있지 않은 경우에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할 때에는 5분이나 10분도 힘듭니다. 굉장히 오래 기도했다고 생각하는데 눈떠서 시계를 보면 5분밖에 지나지 않았음을 누구나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보다 더 길게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방언의 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방언의 특성에 대해 지적합니다. 30분이고 한 시간 기도했고 그것을 영적인 기도라 하더라도 방언이 자기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남기느냐는 것입니다. 방언은 한두 시간 기도했을지라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소망은 인격적으로 내 안에서 발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죄적 체질 때문에 기도의 방향 자체가 하늘을 향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전혀 의미를 모른 채 한두 시간씩 하는 방언의 기도가 영적 성숙을 위하여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의아합니다.

실제로 방언으로 기도해서 대한민국 교회가 영적 성숙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들 중에는 방언을 중시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와 같이 방언을 못하면 구원을 못 받은 것으로 여기는 곳조차 있습니다. 대형교회 중에서도 그런 곳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방언이라는 성령의 은사를 유행처럼 받고자 하는 교회들에서 영적 성숙이 이루어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고 조짐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방언 현상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방언 현상이란 선민이 멸망당할 때에 나타나는 표시입니다. 21절을 보면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으로부터 선민이 어떤 상태일 때 멸망 당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방언 현상이 나타날 때 선민은 멸망을 당합니다.

그렇다면 방언과 방언 현상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방언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신 하나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언어이기 때문에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전혀 모릅니다. 이것이 방언 현상에서도 나타나는 일입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방언은 하나님이 주신 언어이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주신 언어의 의미가 전혀 내 마음에 와닿지 않는 상태를 방언 현상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언 현상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성령님을 인정한다는 선민도 멸망의 전조가 됩니다. 14장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부정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특별히 방언을 좋아하는 경향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살펴보며 방언 현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우리에게 적용될 경우에 어떤 식으로 나타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을 보면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하여 비교의 대상으로 성령의 은사인 예언을 동원합니다. 예언은 하나님과 마음의 간격이 벌어지고 있고 거리가 생겼다는 사실을 포착하여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거리 좁히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언을 언급한 목적도 동일합니다. 방언 현상이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져서 멸망의 전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은 하나님과 거리가 벌어진 사람에게 그 거리를 측정해주고 좁히라는 권면의 역할을 합니다. 그 거리와 간격이 벌어진 상태를 유지한다면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짐으로써 선민이 멸망하게 될 때 나타나는 일이 방언 현상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예언과 방언을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앞서 나누었던 내용들을 기억해보면 좋습니다.

1절에서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라고 하였는데 신령한 것들이란 은사를 뜻합니다. 사랑을 추구하는 중에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추구한다고 번역된 헬라어 디오케테(Διώκετε)는 “박해하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박해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닌 사냥꾼이 사냥감을 추적하는 모습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 디오케테는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서 전력을 다해 도망가는 사냥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사냥꾼이 온 주의를 집중하여 집요하게 쫓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추구하라는 말씀은 마치 사냥꾼이 짐승을 집요하게 추적하듯이 사랑을 집요하게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는 목숨의 위협을 느껴 전력을 다해 도망가는 사냥감과 같습니다. 조금만 주위를 흐트러뜨리면 사랑하기는 도망가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므로 도망가는 사냥감을 추적하여 붙잡으려는 사냥꾼의 집중력을 가지고 사랑하기를 할 수 없다면 놓쳐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하기의 내용 속에서 가장 큰 부분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소망입니다. 소망은 간단히 말해 하나님 아버지로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와 간격이 없는 상태를 유지함을 소망하고, 이 땅에는 아버지의 뜻이 내려와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와 관련하여 아버지 자신을 소망하고 아버지의 뜻을 소망하는 중에 이 땅을 살아갈 힘이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사람 앞에서 믿음 소망을 전력을 다해 실천하느라 살아갈 힘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의 은사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세상의 삶은 교회에서 모이든 어떤 삶의 현장에 있든지 성령의 힘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기 위한 대전제는 마음이 하나님을 믿고 소망함에 다 들어가는 상태가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사건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마음으로 십자가의 주님의 몸을 나의 몸으로 채택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소망은 성취됩니다.

 

1절 하반절을 보면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언의 은사를 강조한 이유는 방언의 은사보다 예언의 은사가 덕을 세움에 있어서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본래 은사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기 위하여 허락된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기를 전제로 하여 은사가 주어지는 것이기에 사랑하기가 없다면 은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방언은 하는 사람조차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 언어입니다. 그렇기에 덕을 세운다는 입장에서 보자면 제일 그 가치가 작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절에서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방언의 효용이란 무엇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참 희한한 대답을 내놓습니다. 20절을 보면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지혜란 앞서 언급된 지혜의 은사가 아닙니다. 지혜는 헬라어 프레신(φρεσίν)으로 이해력을 말합니다. 은사로써 받은 지혜를 의미하는 소피아(σοφία)와는 구분됩니다. 풀어보자면 방언이 신비하다고 해서 의미도 모른 체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상태는 잘못된 것이니 방언 현상에 대해 영적이고 신앙적인 이해를 하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21절을 보면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 28장 11~12절의 말씀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입니다. 자유롭게 인용했다 함은 작위적으로 뜻을 바꾸었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의미를 살려서 인용했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28장을 보면 북 왕국 이스라엘에 관한 내용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남 왕국 유다와 마찬가지로 선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북 왕국 이스라엘에 선지자들을 보내서 예언을 하게 하셨습니다. 선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거리가 멀리 떨어졌음을 깨닫게 하심입니다. 이사야 29장 13절에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으니…”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선민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부르고 있었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선지자들을 통해 주어진 예언의 말씀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선지자들의 예언은 지금 상태는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서 멸망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멸망을 당하지 않으려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말씀을 듣는 북 왕국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예언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마치 방언을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으면서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북 왕국 이스라엘은 결국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되는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앗수르 사람들에게 나라가 망하고 지배를 당하면서도 예언에 담겨있던 하나님의 의도와 취지를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민으로 보이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 전조가 방언 현상임을 강조합니다. 방언의 의미와 가치는 예언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것에 있습니다. 참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리실 수 있지만 이것은 제가 여러분에게 방언에 대한 개인의 생각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말씀을 그대로 풀어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22절을 보면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간단히 말해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고,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는 내용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그대로 놔두면 멸망할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진 것을 측정하여 말해주는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믿는 자들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거리가 벌어졌고 그 결과 멸망할 것이라는 의미가 마음에 닿으면 거리를 없애기 위해 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믿는 자들에게서 예언이 아닌 방언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서 선민으로 여겨지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언의 말씀을 전해도 마음으로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앞서 방언은 하나님이 주신 언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주신 언어로써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자기 귀로 듣습니다. 다른 사람이 방언을 말할 때도 그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다만 방언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언어임에도 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예언도 방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시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이 언어가 신약에서 은사로써 주어지는 방언을 말하고 들을 때와 같이 전혀 마음에 와닿지 않는 방언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방언 현상이란 방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이라는 언어의 의미를 모름으로써 마음에 와닿지 않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언어인 예언에 대해 마음의 깨달음이 없고 와닿지 않는 방언 현상이 일어나면 그것은 멸망의 전조입니다.

진짜 선민은 하나님과 간격이 벌어졌음을 측정하여 말해주는 예언의 말씀을 들으면 반드시 그 말씀이 마음에 와닿고 벌어진 간격을 좁히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선민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으로 전해도 그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방언을 자기 입으로 이야기하면서도 그 의미를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의미를 모르는 일이 발생하는 방언 현상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멸망하게 될 전조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의도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방언 현상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방언을 좋아함에 그치지 말고 조금만 더 이해력을 키워서 방언에 얽혀있는 현상을 받아들여 보라는 것입니다.

 

방언은 그 의미를 모르기에 신비롭습니다. 늘 쓰던 언어가 아닌 배운 적도 없는 언어가 입에서 나오는 현상은 신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고린도 교인들은 그러한 표피적인 신비함을 추구하느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깨달을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 년 반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교회를 세울 때 알파와 오메가는 바로 이 한 가지였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살아계신다는 것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워진 고린도 교회에서 어느덧 그러한 가르침은 잊히고 파벌로 인한 분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거리를 신경 쓰기는커녕 표피적인 방언의 은사만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소식을 듣고 고린도 교회에서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나타났던 것 같은 일들이 나타나게 되었음을 지적합니다. 선지자들은 북 왕국 이스라엘 선민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의 마음에 예언은 와닿지 않았고 결국 앗수르의 침공을 당해 나라가 멸망하게 됩니다. 앗수르에 의해 나라가 멸망 당한 상황은 직접 몸으로 겪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몸으로 직접 겪으면서도 그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렇게 하신 의도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망하려면 귀부터 막힌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못하면 망할 징조라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이와 마찬가지의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방언의 신비함만을 추구하는 방언 현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지적하며 20절에서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방언의 신비함만을 추구하지 말고 방언이 주어진 이유에 대한 이해력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울 때 한 이야기는 결국 십자가 복음과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던 말씀의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십자가 복음과 십자가 생활화에 대한 말씀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이 언어가 방언 현상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마치 방언처럼 듣기는 들어도 그 의미가 마음에 와닿지 않고 수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도 바울의 태도는 참 이상합니다. 방언의 은사를 말하려면 방언으로 기도하고 방언으로 말함으로써 생기는 유익이나 가치를 많이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방언의 가치를 예언 밑에 두고 북 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사건을 연결시키면서 방언 현상을 지적합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방언의 은사에 관한 이야기를 예언으로 해주고 있습니다. 방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덕을 세우는 입장에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방언이 주제가 된 것이 아니라 방언을 소재로 삼아서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히라는 예언의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의 주제는 방언 현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언어는 하나님이 주시는 언어입니다. 이들이 늘 사용하는 언어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져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정작 마음에서는 십자가 복음이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고 그 의미가 전달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방언을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으면서도 그 의미를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방언 현상으로 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북 왕국 이스라엘이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어를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들의 언어로 들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그 말씀의 의미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방언 현상입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하고 남 왕국 유다도 바벨론에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어를 들려주어도 그들의 마음에는 그 의미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이 방언 현상이 유지되면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처럼 망할 것이라는 전조입니다. 망하지 않을 사람은 지금 현재 하나님과 거리가 벌어졌더라도 하나님의 언어가 전해지면 그 의미를 붙잡습니다.

 

지금 현재 기독교 종교의 상태를 보면 모두가 선민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북 왕국 이스라엘 사람들과 남 왕국 유다의 사람들도 자신들이 선민임을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알겠다고 하였고 사도 바울이 전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십자가 생활화였습니다. 지금 기독교 종교 내에서 이 언어가 있습니까? 이들은 성경을 들고 다닙니다. 그들이 듣는 설교도 성경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성경의 핵심은 십자가인데 정작 그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는 사람들에게서 십자가 복음의 의미와 십자가 생활화의 언어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멸망의 전조가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기독교 종교인들을 미워해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 복음을 붙잡고 십자가를 생활화하고자 애쓰기에 우월하다는 소리를 하고자 함도 아닙니다.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을 지금 기독교 종교에서 일어나는 방언 현상에 적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방언 현상은 하나님이 주시는 언어가 분명함에도 그 의미가 와닿지 않는 상황입니다. 이 상황이 유지되고 지속되면 그것은 무섭고도 두려운 멸망의 전조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에게 십자가 복음과 생활화를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오래 참고 견뎌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전해봐야 할 것입니다. 방언 현상이 지속되다가도 돌아오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래 참고 그 사람의 불신앙 상태를 견디며 사랑하기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방언 현상이 지속된다는 것은 멸망과 구원의 확률이 반반으로 진행되고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언젠가 구원으로 돌아올지 멸망으로 끝날지 모르기 때문에 확률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과 십자가 생활화의 언어가 이해되지 않아서 괴로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구원을 받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언어가 방언 현상이 아니라 “내가 십자가를 붙잡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힐 수 없구나!”라는 예언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진짜 선민입니다. 지금도 십자가 복음 방송을 하고 있고 십자가 온라인 교회 모임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내용은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십자가를 붙잡자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예언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믿는 자의 표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에게서 방언 현상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 주변에 방언 현상이 나타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이 당할지도 모를 멸망을 염두에 두고 오래 참고 견디는 사랑을 이어나가며 십자가 복음과 십자가 생활화의 언어를 기회 있을 때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전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방언의 은사를 통하여 방언 현상을 알려주시고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할 수 있을 가능성과 구원을 위한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해주니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이 방언 현상이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서 가능한 한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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