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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2

녹취문: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 시뮬레이션_태승철 (고린도전서 15:1~11)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9.12|조회수145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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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 시뮬레이션>의 줄거리:

시뮬레이션이란 실제의 상황을 간단하게 축소한 모형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반복하여 반응하게 함으로써 실제 상황에 대한 적응 능력을 키우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마치 내게 제공된 시뮬레이션과 같습니다. 그 안에서 나의 죽음과 나의 부활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의 원초적인 실존 조건에 올바로 반응하기 위함이지요.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 시뮬레이션

(고린도전서 15:1~11)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 시뮬레이션>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 시뮬레이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시뮬레이션이 바로 복음입니다. 시뮬레이션이란 실제 상황을 간단하게 축소시킨 모형을 만들고 그 안으로 들어가서 반복하여 반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제 상황이 주어졌을 때에 적응능력이 커지게 됩니다. 복음이 이와 닮았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3~4절에서 “…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붙잡고 있고 담고 있고 전달하고자 하는 복음은 나의 죽음과 나의 부활을 실행하는 시뮬레이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를 본문과 연관 지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마지막에서 부활에 관한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를 시작하며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 것과 일치합니다. 1장 23절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를 마치면서 다시 복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이야기로 시작된 고린도전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말씀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보여주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란 결국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는 내용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전할 수 있는 말씀의 내용 또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외에는 없습니다.

 

1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했으면 이미 알고 있는 것인데 새삼스럽게 알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복음을 받고 그 가운데 선다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올바른 태도를 의미합니다. 복음을 전했으니 그 복음을 받고 그 가운데 서야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게 한다는 것은 복음을 받아서 그 안에 서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마땅히 복음 안에 서야 했으나 그러지 못하게 된 고린도 교회에 다시 복음을 알려주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음을 받고 그 안에 서는 일은 시대를 거쳐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교인들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2절을 보면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만일”이라는 표현으로부터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을 굳게 지키지 못했고 헛되이 믿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는 것이야말로 복음을 받아서 그 가운데 서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 안에 서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너희는 내가 전한 말을 굳게 지키지도 않았고 헛되이 믿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복음을 전했기에 아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너희는 복음 안에 서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너희에게 전했던 복음을 다시 알게 하고자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게 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로 알게 하거나 기억나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알게 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그노리조(Γνωρίζω)는 체험적 앎을 뜻하는 히브리어 야다(ידע)와 동일한 뜻입니다. 야다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동침하여 서로 아는 것을 의미하듯이 이론적 앎이 아니라 체험적 앎을 가르쳐 주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했고 고린도 교회는 그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만 받아들였기에 복음 안에 서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복음을 모르는 것과 같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2절에서 복음을 굳게 붙잡고 헛되이 믿지 않아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복음을 굳게 붙잡았다면 결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굳게 붙잡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어떤 순간에도 잊지 않고 기억함을 의미합니다. “굳게 지키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카테케테(κατέχετε)는 “단단히 붙잡다” 혹은 “확실하게 가지다”라는 뜻입니다. 삶의 상황이 어떠하더라도 말로 들어 알게 된 복음의 내용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헛되이”라고 번역된 에이케(εἰκῇ)는 “목적이나 계획성 없이”라는 뜻입니다. 믿었지만 아무 목적이나 계획성이 없어서 도달해야 될 목표지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여 믿게 되었다면 도달해야 될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그러한 목적의식을 갖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어떤 상황에서도 붙잡는 것이 굳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굳게 지키기 위해서는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이 목적의식은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린 인간의 실존과 연관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원초적인 실존의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시기에 다른 모든 것은 있게 된 것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유일하게 인간이 채움을 위하여 욕구할 수 있는 좋음이십니다. 또 하나님만이 참새 한 마리 땅에 떨어지는 것과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바 되시는 세상의 유일한 주권자이십니다. 간단히 말해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이 인간의 원초적 실존의 조건입니다. 이 조건에 가장 올바르게 반응하려는 목적의식을 가질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굳게 붙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놓치지 않으려는 이유는 우리의 원초적 실존의 조건에 올바르게 반응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있음이시고 다른 모든 것들은 있게 된 것들이라는 조건, 하나님은 유일한 좋음이셔서 유일한 채움과 만족이 되신다는 조건, 하나님만이 유일한 주권자로 주체성이 되신다는 조건에 맞추기 위하여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목적의식을 가지고 언제 어디서든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놓치지 않는 것이 복음 안에 서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 선다는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역사성에 대해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역사적으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증인들을 열거하며 고린도 교인들에게 역설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 이유는 교인의 정체성과 연관이 있습니다. 교인은 모두가 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실제 사건 안에 서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곧 나의 죽음과 부활을 실행하는 시뮬레이션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나의 죽음을 실행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나의 부활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고 유일한 주권자 되심에 올바로 반응하기 위함입니다. 이 조건에 올바로 반응하지 못한다면 삶도 영도 혼돈과 환난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원초적 조건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 올바른 반응을 위한 시뮬레이션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비행기 조종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시뮬레이션 교육을 합니다. 조종을 해 본 적이 없는 새내기를 몇천억씩 하는 비행기에 직접 태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다큐멘터리에서 보면 다면체로 된 시설 안에 비행기 조종실과 똑같은 환경을 만듭니다. 그리고 시설 자체가 비행기의 움직임을 똑같이 구현합니다. 난기류를 만나면 흔들리고 좌우로 흔들리면 기울어집니다. 이렇게 실제 상황을 재현함으로써 조종사가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도록 적응능력을 키워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접할 수 있는 예는 스크린골프입니다. 스크린골프장에 들어가면 화면 안에 골프장 필드가 그대로 재현됩니다. 그 스크린을 앞에 두고 공을 치면 필드에 나갔을 때와 거의 비슷한 효과가 나타납니다.

복음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이라는 원초적인 실존의 조건에 대한 시뮬레이션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초적 실존은 언제 어디서든 올바르게 반응해야만 하는 조건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 하나님의 유일한 주체성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복음이 제시해주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는 끊임없이 죄가 일어나기에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이 있다고 느끼고,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이 좋다고 느끼고, 스스로 주체가 되려고 합니다. 이러한 죄적 체질을 갖고 있는 내가 원초적 실존 조건에 바르게 응답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내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하나님의 있음 대신에 다른 것들의 있음을 느끼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좋음 대신에 다른 것들의 좋음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말고 스스로 주체가 되고자 합니다. 이러한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연습을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 안에 서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시뮬레이션으로 삼아 나의 죽음과 부활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실패했습니다. 이들은 복음 말씀을 듣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헬라 문화권의 성향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이론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복음이 실제 내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져야 되는 시뮬레이션임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 안으로 들어가야만 나의 죽음과 부활도 이루어질 수 있음을 모른 채 이론으로만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원초적 실존 조건에 맞춘 행동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하면서도 전혀 실존 조건에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며 진행되어 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회에 대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이론으로 받은 복음을 이제 체험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이론이나 교리가 아닌 죽음과 부활을 실행할 수 있기 위한 시뮬레이션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던 많은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을 복음과 연결시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이 성경대로 일어난 사실이며, 또한 부활하심도 성경대로 일어난 사실임을 강조하며 고린도전서를 끝맺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언제 어디에서든지 굳게 붙잡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건 안에 의식과 마음이 들어가 서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파탄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던 방언 현상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복음 사건을 시뮬레이션으로 삼아 들어가서 예수님을 따라 죽음과 부활을 실행했다면 고린도 교인들에게 믿음과 소망은 활성화되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형제 교인들을 마주할 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생성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시뮬레이션으로 삼지 못했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방언이 하나님의 주시는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의미를 모르는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다는 하나님의 언어를 들으면서도 참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복음의 참뜻을 이해했다면 복음이 마치 조종사의 연습이나 스크린골프와 같이 죽음과 부활이 시뮬레이션의 사건임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복음을 이론으로만 받아들였기에 시뮬레이션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따라 마음이 죽고 부활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사도 바울은 3절 이하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역사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복음이란 이처럼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하는 일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8절에서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표현합니다. 자신이 철저하게 바보 멍텅구리와 같았으나 복음을 통해 사도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우리가 읽지 않은 9~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9절을 보면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짐을 모르고 교회를 박해하였으니 이런 바보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모르면서 이 세상과 성경과 신앙과 영적 세계에 갖고 있었던 모든 생각도 다 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바보 같았던 바울이 사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렵고 힘든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시뮬레이션인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안에 들어가 서 있기를 언제 어디서든 놓치지 않았기에 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설교에 관한 고정관념이 깨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설교를 하는 사람으로서 너무나 오랜 기간 동안 잘못된 고정관념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설교를 끊임없이 새롭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듣는 교인들이 새로움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나 바울을 비롯하여 어떤 사도들도 새로운 내용을 설교하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듣는 사람은 새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 1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귀로 들어 알게 된 복음을 다시 알려줌으로써 그 복음 안에 설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지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 비해 설교를 새롭게 하고자 했던 저는 오랜 기간 동안 설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설교를 했던 셈입니다. 그때 가졌던 강박관념이 바로 설교가 새로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동네에 스크린골프장이 있습니다. 그 스크린의 내용은 골프의 필드를 재현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 때마다 바뀐다면 필드에 대한 적응능력은 향상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시뮬레이션의 목적은 똑같은 환경을 반복하여 제시함으로써 적응능력을 키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숙달되고 익숙해지고 능숙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비행기 조종사가 받는 시뮬레이션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 동안 연습해서 조금 숙달될만하면 다른 기종의 시뮬레이션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적응능력이 커질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러한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죄적 체질을 갖고 있는 우리가 원초적 실존 조건에 반응하기는 어렵습니다. 원초적 실존 조건에 반응한다면 믿음과 소망을 이루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만 이루어지면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살아가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의 힘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속에 존재하는 강력하고 끈질긴 죄적 체질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에 올바르게 반응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새내기 조종사가 처음 조종간을 잡았을 때 어색하고 무지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원초적 실존 조건에 대해 어색하고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위해 제시된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의 실제 사건을 복음으로 제시해주셨고, 사도들 또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복음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복음 전파이고 설교입니다. 그렇기에 복음 안에 들어가야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이라는 원초적 실존 조건에 대해서 올바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마치 새내기 조종사가 끊임없이 시뮬레이션 연습을 하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나의 죽음과 부활로 연습하면서 언제 어디서든지 주어지는 원초적인 실존 조건에 익숙한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오늘 처음 조종실 시뮬레이션에 들어간 사람이 한 달을 연습했다고 해서 다른 기종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그런 요구를 해왔습니다. 저도 그랬고 설교를 듣는 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설교는 새로워야 한다는 잘못된 고정관념이 아직도 대한민국 교계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극장에서 영화 보듯이 의자에 앉아서 목사님이 오늘은 어떤 새로운 설교를 하는지 기다립니다. 목사님들은 진땀을 흘리며 새로운 설교를 하려고 애를 쓰지만 교인들의 원초적 실존 조건에 대한 적응능력은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새로워져야 하는 것은 말씀이 아니라 원초적 실존 조건에 대한 적응능력입니다.

새로운 설교를 들으면서도 세상에 나가면 복음을 굳게 붙잡고 복음 속에 서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사장님만 보여도 친구만 보여도 하나님의 있음은 잊힙니다. 돈 이야기, 건강 이야기, 승진 이야기가 나오면 하나님의 좋음은 잊힙니다. 모든 일에서 내가 판단하고자 합니다. 기도도 내가 판단하고 분석해서 답을 만든 다음에 이루어달라고 기도를 할 뿐입니다. “이렇게 해주십시오, 저렇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종으로 부리고자 하는 것을 기도라고 착각합니다. 나의 상태는 하나도 변하지 않으면서 오직 누가 설교를 새롭게 하느냐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습니다. 조종사가 매일 시뮬레이션이 새로워지기를 바란다면 훌륭한 조종사가 될 수 없습니다. 골프를 배우는 사람이 스크린골프장의 필드가 매일 새로워지기를 바란다면 골프 실력이 늘어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몰랐을 때의 자신을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과 영적인 사실들에 대하여 오류로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이 사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시뮬레이션인 복음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늘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여기고 예수님의 부활을 나의 부활로 실행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떠나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였다. 부활한 나의 마음에서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믿음의 대상이고 소망의 대상이시다.”라고 복음을 붙잡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사람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 사랑을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시뮬레이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바울은 새사람이 되어 사도로 바뀔 수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새 설교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새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새사람이 되는 것은 복음이라는 고정된 시뮬레이션에 열심히 들어가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나의 죽음과 부활로 실행해내는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외의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여러분이 저를 질책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복음이라는 시뮬레이션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나의 죽음과 부활로 실행하려고 하는데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그것을 제시하지 못한 채 딴소리를 한다면 비난하고 질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찌하든지 복음을 굳게 지켜야만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마음과 의식은 복음을 붙잡아야만 합니다. 조종사가 조종 시뮬레이션 안에 들어가 서듯이 복음 안에 서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내 죽음과 부활을 실행하는 것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이라는 원초적 실존 조건에 맞추어 바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열매가 맺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께서 다 이끌어 가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의 몸에 어떤 상황이 주어져도 복음을 굳게 붙잡고 그 복음 안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내 죽음과 부활을 끊임없이 시뮬레이션 하는 일이 우리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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