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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2

녹취문: 아직 사망에 속했기에 죽음이 두렵다_태승철 (고린도전서 15:20~3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9.16|조회수124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아직 사망에 속했기에 죽음이 두렵다>의 줄거리: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부활의 때에 일어나는 가장 엄청난 일이 바로 사망의 영원한 멸망입니다. 아담으로 인해 인류에게 주어진 사망. 이 사망의 첫 번째 특징은 바로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함입니다. 이 육체의 죽음이 두려움은 부활을 이론으로만 믿고 실제로 일어날 사건으로는 안 믿는다는 증거이고요. 십자가 생활화로 사망의 죽음이 확실할수록 부활은 실제로 믿어지고 육체의 죽음은 두렵지 않게 됩니다.

 

아직 사망에 속했기에 죽음이 두렵다

(고린도전서 15:20~34)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아직 사망에 속했기에 죽음이 두렵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아직 사망에 속했기에 죽음이 두렵다”

우리가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아직도 사망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26절을 보면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이 사망을 이겨야 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사망을 이기는 사람들 이외에는 여전히 온 지구 위에서 사망이 강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람들 이외의 사람들에게서 강하게 역사하고 있는 사망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살아있는 동안에 사망을 멸망시키고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생명의 부활을 얻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사망의 역사가 그대로 진행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부활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을 비롯한 사도 바울의 서신들은 모두 실제 삶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부활신앙도 부활 때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필요한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십자가 생활화가 철저하지 못하여 사도 바울이 내면에 갖고 있었던 영적 차원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의 말씀들을 이해하는 것이 때때로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 말씀을 구절구절 따라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함으로 전체적인 윤곽을 말씀드리면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와같이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합니다. 다만 로마서와는 비교의 내용이 다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아담이 온 인류를 대표하고, 타락한 인류에 대해서 예수님이 온 인류를 대표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담이 온 인류를 대표해서 타락하게 만들었고, 이미 타락한 인류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가 대표가 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21절을 보면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담으로 인해 온 인류에게 사망이 임했고, 그리스도로 인해 온 인류에게 부활이 임했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아담으로 인해 인류에게 주어진 사망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그런데 이 사망과 그리스도로 인한 부활을 대조시키다 보니 그리스도의 부활을 영원한 멸망에 대한 극복으로써의 구원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주어진 사망은 온 인류에게 해당되는 영원한 멸망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온 인류에게 부활이 주어진다는 것은 아담으로 인해 주어진 영원한 멸망이 극복되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5장 29절에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하시며 부활에는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음을 분명히 명시하셨습니다. 생명의 부활이든 심판의 부활이든 몸이 죽어서 시신이 썩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 점이 자주 일어나는 오해와 다른 것입니다.

아담으로 인해 사망이 주어졌다는 말씀에 대해 참으로 많은 학자들과 목사님들이 오해를 합니다. 아담으로 인해 주어진 사망을 육체의 죽음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온 인류에게 부활이 주어졌다고 하니까 아담에 의해서 주어진 사망을 육체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로는 복음 전체가 뒤틀립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사는 십자가 생활화의 축복된 삶의 내용도 불투명해지고 맙니다. 육체의 죽음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온 인류에게 임하게 된 사망이 아닙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증거들이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이란 결국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3차원의 세계에서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도 3차원의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서 언젠가는 자취를 감추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신 것입니다. 아담으로 인한 유전 죄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예수님조차도 3차원 세계에 태어나셔서 공생애를 사시다가 3차원으로부터 온전히 자취를 감추시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하늘에 살아 계시지만 그 하늘은 영적 세계인 천국입니다. 3차원의 세계에서 보자면 자취를 감추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가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담으로 인해 주어진 사망이 아닙니다. 만약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아담은 지금까지 살아있을 것이고 에녹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다윗 같은 사람들도 여전히 살아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학자들이 육체의 죽음을 아담의 죄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오해가 발생하는 이유는 육체의 죽음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죽음을 저주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불행한 일을 당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 자체가 아담으로부터 주어진 유전 죄에 찌들어있다는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이유는 나사로의 육체의 죽음을 슬퍼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나사로가 죽음으로써 십자가 복음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늘로 이어지는 통로의 출입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셨던 나사로가 이 출입구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음에 대해서 슬퍼하신 것이지 결코 나사로의 육체의 죽음을 슬퍼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이 슬픈 이유는 주님이 이루신 하늘로 이어지는 통로의 출입구인 십자가를 생전에 붙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라는 천국 출입구로 들어가지 못하고 놓쳐버린 채로 육체가 죽는 것은 더는 천국 출입구를 붙잡을 기회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붙잡았다면 육체 자체의 죽음은 슬프거나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아담으로 인해서 주어진 사망의 증거는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을 보면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역사를 통해 해방시켜 주시면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는 분으로서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3차원의 세계에서 종적을 감추시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여서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연쇄 과정을 몸소 따라가는 사람들은 죄 사함이 온전히 이루어진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과 똑같이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는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바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빌립보서 1장 23~24절을 보면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 둘 사이에 끼었다는 것은 육체의 죽음과 살아있음 사이에 마음이 끼어있다는 뜻입니다. 속마음을 말하자면 육신이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가장 유익하게 여기지만, 아직도 하나님께서 육체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사람 사랑의 계획이 남아있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아담으로 인한 사망에서 빠져나온 사람의 증거는 바로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좋게 여기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26절을 보면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멸하시는 사망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곧 하나님에 대한 죽음입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죽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하여 죽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우리의 원초적 실존 조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분이시기에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것들입니다. 비가 내려도 있게 된 것이고, 눈이 내려도 있게 된 것이고, 나라가 망하거나 흥함도 있게 된 것입니다. 대통령이 되고, 살고 죽는 모든 이야기가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오직 있음을 느껴야 할 대상은 있게 된 것들이 아니라 스스로 있는 분이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이 있다고 마음의 의식 작용이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에 대해 살아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주무르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있음을 모른 채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사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좋음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놔두고 이 세상에서 몸으로 만나는 것들에 대하여 좋음을 믿고 느끼면서 추구합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유일하게 이 세상에 대한 주권자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 삶을 내가 이끌어가려 합니다. 이 사실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사망입니다.

우리의 육체가 죽으면 이 세상에서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것들에 대해서 반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진정한 사망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이것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진정한 사망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에 대해 반응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유일하신 하나님이 스스로 있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의식 작용이 하나님 외의 다른 대상을 향하는 것을 사망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가족 문제, 돈 문제, 직장문제는 모두 피조물로 인한 것입니다. 이렇게 창조주보다 피조물의 있음을 우선시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망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저항이고 반항입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에 반응하지 않는 사망의 상태는 하나님 대신에 피조물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고 스스로 주체가 되고 주권자가 되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사망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상태를 하나님에 대한 저항과 반항을 하는 세력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도 사망에 속해있을 수 있습니다. 사장님을 볼 때 마음에 하나님보다 사장님의 존재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단순히 사장님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에 대한 저항이고 반항이고 반역입니다. 돈이나 건강 혹은 이런저런 것들을 좋다고 여김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죽음일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저항이고 반항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망의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 사망을 멸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이 더는 숨겨져 있지 않고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24절을 보면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하였습니다. 통치는 곧 주권자 됨입니다. 권세로 번역된 헬라어 엑수시아(ἐξουσία)는 “있음”을 뜻하는 우시아(ουσία)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존재감이 가장 큰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힘이 바로 권세입니다. 어떤 장소든지 어떤 단체든지 존재감이 제일 큰 사람이 권세를 갖게 됩니다. 예를 들어 재벌그룹에서는 모든 권세가 회장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룹 내에서는 회장님이 가장 무거운 존재감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권세가 있음은 존재감과 연결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능력은 좋음과 연관이 있습니다. 능력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변화를 이루거나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은 오직 성령의 힘입니다. 단 한 가지도 성령의 힘이 아닌 것으로 살아가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제외해놓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에 저항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 대신에 이 세상에 있는 존재감들을 느끼고,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에 저항하면서 스스로 주체로써 살아가거나 다른 주체에 복종하려 하고, 성령의 힘 대신에 내 힘으로 이 세상을 살려고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사망의 역사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이 더는 숨겨져 있지 않고 만천하에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되고 이러한 사망의 능력은 모두 제거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았던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을 받게 됩니다. 지옥으로 들어가기에 합당한 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인 유일한 주권자 되심과 하나님의 권세인 유일한 있음과 하나님의 능력인 유일한 좋음과 성령님의 힘으로 이 세상을 삽니다. 이것이 하나님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원초적 실존 조건에 대해 바르게 반응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마음에 대해서 육체가 죽은 뒤에 생명의 부활을 받게 됩니다.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새로운 몸을 입혀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강하게 이야기해주고 있는 주제는 사망과 육체의 죽음과 부활의 관계입니다. 부활신앙은 부활할 때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필요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부활신앙이 있다는 것은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육체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부활신앙은 서로가 지양하는 관계이기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부활을 믿으면서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부활신앙을 갖고있는지 확인하려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혹은 사도 바울처럼 지금이라도 육체가 죽어서 주님과 함께 거하기를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육체가 우리에게 걸림돌이 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하여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해보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비싼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대상일지라도 마음이 흘러 들어가면 그것이 대단히 귀중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은 착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투입했기 때문에 귀중하게 느껴지는 것이지 실제로 그 자체가 귀중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남녀가 사귀며 한창 뜨거울 때는 상대가 세상에서 제일 큰 보물같이 여겨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떤 계기를 통해서 갑자기 마음이 식어버리면 가장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모든 일이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은 세상의 모든 금은보화를 다 모아놓아도 따라갈 수 없는 값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으로 인해 주어진 사망 속에서 마음은 육체로 만나는 세상 것들에게 투자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마음만 거둬들이면 아무것도 아닐 것들이 소중하게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입니다. 객관적으로 소중하고 값진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입니다. 그런데 진짜 값진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사망의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의식이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가장 값진 대상이신 하나님께서는 내 몸보다도 내 마음에 가까이 와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내 마음은 하나님께 반응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망입니다.

물론 세상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권과 섭리를 통한 계획을 이루실 때 재료로 귀중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채우는 좋음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이 세상 것들은 하나님에 비하자면 휴지조각에도 미치지 못하고 애초에 마음을 채울 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세상 금은보화를 다 모아놓은 것보다도 더 귀한 마음을 세상에 투자해버리니 실제로는 귀하지 않은 세상 것들이 귀하게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세상 것들과 단절되는 육체의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31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날마다 우리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로 올라가야만 하는 이유도 바로 사망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만 마음은 사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육체의 죽음을 무서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의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삶과 육체의 죽음이 내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유익한 사건이라고 믿어지고 받아들여지는 삶이 얼마나 가볍고 경쾌하고 신바람 날지 여러분께서 상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사망으로부터 나와야만 합니다. 그리고 사망으로부터 나왔다는 증거는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 사건 안으로 들어가면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게 됩니다. 내 마음은 몸을 버리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이 땅에 남은 몸은 성령님의 힘으로만 움직여지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물이 됩니다. 그럴 때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에 대해서 가장 온전하게 반응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살다가 육체가 죽은 뒤에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예쁘게 여기셔서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신령한 몸을 입혀주실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망의 세력에 속한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에 저항해서 이 세상 것들을 있다고 느끼고,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에 저항해서 이 세상 것들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에 반항하며 스스로 주체가 되거나 다른 사람의 주체성에 굴복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한 악한 사람들의 마음은 지옥에서 영원히 살 수 있기에 합당한 몸을 입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육체의 죽음이 두려울 수 있습니다.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칼로 무 자르듯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끊임없이 아담으로 인한 사망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아담으로 인한 사망이란 유일하신 하나님의 세 가지 속성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는 것이고,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힘이신 성령님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 사망의 상태에서 빠져나오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저는 매일 기도할 때에 “지금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데려가신다면 기꺼이 육체의 죽음을 받아들이겠느냐?”라고 스스로 묻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물으며 기도하는 중에 육체의 죽음을 거리낌 없이 맞이할 수 있는 상태가 서서히 확장되어 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곧 십자가 생활화가 깊게 진척되어간다는 것이고 부활신앙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지금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나에게 부활신앙이 있느냐 없느냐, 부활신앙이 참이냐 거짓이냐,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르익어 가느냐 아니면 정체되어 있느냐 혹은 끊어졌느냐를 한 방에 알려줍니다. 육체의 죽음을 기꺼이 맞이할 준비가 되었거나 그러한 방향으로 가려고 한다면 십자가 생활화와 부활신앙이 존재함을 알려주는 지표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지금 육체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계십니까? 담대하게 “아, 잘됐다!”라고 하실 수 있다면 제가 그 믿음을 시기하며 쫓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무조건 두렵다면 아담으로 인한 사망으로부터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육체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참 신앙의 길로 진전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지표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육체의 유용함을 또 다시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육체가 죽는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떠올리면서 지금 사망에서 빠져나왔는지를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깊어졌는가를 늘 확인하게 하시고, 말로만 믿는 부활신앙이 어느 정도로 진실인가를 확인하며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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