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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부활은 육체 벗고 광체 입기>의 줄거리:
살덩어리 육체는 진짜 내 몸이 아닙니다. 육체는 내 마음이 하늘을 향해서 등지고 떠나야 할 몸이고 성령님이 오셔서 장갑 삼아야 할 몸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주어진 일시적인 몸입니다. 내 마음이 주저 없이 영원히 가져도 되는 진짜 내 몸은 빛으로 만들어진 광체(光體)입니다. 내 마음이 광체를 진짜 내 몸으로 입는 사건이 바로 부활이지요.
부활은 육체(肉體) 벗고 광체(光體) 입기
(고린도전서 15:35~44)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부활은 육체(肉體) 벗고 광체(光體) 입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부활은 육체(肉體) 벗고 광체(光體) 입기”
육체(肉體)가 살덩어리 몸이라면 광체(光體)는 빛 덩어리의 몸이라는 뜻입니다. 육체 벗고 광체 입기가 바로 부활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부활에 대한 의심과 비난의 질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질문들을 언급하면서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나가고 있습니다. 부활은 이성을 초월하는 초이성적 사건입니다. 당시 고린도는 헬라 문화권의 영향 아래에서 이성적 지혜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러한 고린도에서 부활은 초이성적 사건이라고 받아들여지기보다는 비이성적이고 몰상식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고 모든 사람의 부활을 기정사실로 전하는 복음은 근본적으로 의심과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문의 앞부분에서는 이러한 의심과 비난의 질문에 대해 사도 바울이 인용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5절을 보면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곧이어 이러한 질문이 어리석은 것임을 꾸짖습니다. 부활에 담겨있는 영적인 사실에 대하여 무지함으로 인해서 나온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전하기 위해 농부가 씨를 심는 비유를 듭니다. 농부가 씨를 심으면 그 씨는 땅 속에서 자취를 감춰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씨앗과는 전혀 다른 형체의 식물이 지표를 뚫고 올라와서 모양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렇게 올라온 식물의 형체는 씨앗만을 볼 때에는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상태를 38절에서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육체가 죽을 때에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짐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 땅에 매장되는 상황을 마치 씨앗이 땅에 묻히는 것과 같은 선상에 놓고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장례식의 마지막 하관예배 때마다 이 본문을 택해서 설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관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를 파놓고 유가족과 지인들이 쭉 둘러서서 슬픔에 잠겨있을 때 관을 구덩이 안으로 내려놓고 흙을 덮습니다. 이 모습이 씨앗을 심는 것과 꼭 닮았습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형체를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밀이나 볍씨 안에 유전정보인 DNA가 들어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땅에 심기면 씨앗 안에 들어있던 생명이 자라납니다. 이것이 상식적인 자연현상의 차원에서 말할 수 있는 씨앗의 성질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연현상의 원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씨앗이 땅에 묻혀서 형체가 없어지게 하시면서 또 다른 형체를 주시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주님으로부터도 발견됩니다. 주님께서는 백합화를 보시면서 단순히 씨가 떨어져서 그곳에서 자라난 것으로 여기시지 않았습니다. 한 송이 백합화를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입히고 계신다고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부활에도 적용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끔 부활에 대해 걱정과 염려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죽으면 절대로 화장을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 이유를 들어보니 땅에 심긴 씨앗에서 생명이 나와서 식물이 자라나는 것처럼 부활해야 될 준비를 해야 될 몸이니 태워서 뿌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화형을 당해서 순교한 분들은 부활을 할 수 없습니다. 죽은 육체를 재료로 해서 부활을 하거나 매장되었던 그 자리에서 부활이 일어나야 한다면 화형을 당하고 사자밥이 되어 배설물이 되는 육체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은 부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부활은 결코 이러한 육체의 재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모셔 들이기 위한 공백의 마음인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마음으로 번역되는 표현은 다양하기 때문에 문맥에 따라서 잘 이해해야 합니다만 여기서는 하나님을 모셔 들이기 위한 공백으로써의 영을 염두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마음이 육체를 잃어버리는 상태가 되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가 다음 시간에 보겠습니다만 사도 바울은 이 육체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잠자고 있던 몸이 부활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죽은 육체를 재료로 새 몸을 만드셔서 영에 입히시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할 때에는 새로운 형체를 부여하십니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형체를 주시기 나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이야기를 위해서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들이 각기 다른 형체의 몸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열거합니다.
39절을 보면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고 하였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망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40~41절을 보면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생물체에 국한되지 않고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형체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광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새나 물고기의 육체가 땅에 속한 것이라면 해와 달과 별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체들을 이야기한 후에 이에 대한 영광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이 영광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동물의 육체에 영광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사자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동물원에 가서 사자를 보면 “와 저것 좀 봐, 사자다!”라고 감탄합니다. 이렇게 사자를 의식하여 보게 되는 상황이 영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 꽃 좀 봐! 저 물고기는 정말 이상하게 생겼네! 저 하마 생긴 것 좀 봐!”라고 다양한 반응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인간의 의식이 집중되는 상황을 영광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의 영광은 형체로 나타나게 됩니다. 반면에 하늘에 있는 해와 달과 별들의 영광은 땅에 있는 것들처럼 상이한 형체로 사람 눈에 띄는 것이 아니라 빛이 발산됨으로써 눈에 띄게 됩니다. 땅에 있는 것들이 각양각색의 모습이 살덩어리로 이루어진 형체라면 하늘에 있는 것들은 빛덩어리의 형체와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땅과 구분되는 하늘에 있는 것들의 영광을 언급하며 하늘에 속한 예수님을 따라서 부활하게 될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을 언급한 이유는 부활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인 영이 입게 될 몸은 빛으로 만들어진 몸으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몸은 살덩어리로 만들어진 육체입니다. 그러나 부활 때 우리의 마음인 영이 입게 될 몸은 빛 덩어리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몸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육체의 몸은 진짜 내 몸이 아닙니다. 육체로 살고 있는 지구상에서의 생애는 메인 게임을 결정하기 위한 오픈 게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할 일이란 하늘 쪽을 향해서 마음과 몸의 유착 상태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몸은 떠나야 할 용도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떠나야 하는 이유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마음이 몸을 떠남으로써 이 땅에 남아있는 몸은 하나님의 손이신 성령님께 드려져야 할 몸입니다. 하늘을 향해서는 떠나야 될 몸이고 땅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손이신 성령님께 드려져야 할 몸이기 때문에 내 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몸이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삶은 진정으로 내가 누릴 수 있는 삶이 아닙니다.
따라서 지금 생애의 주된 관심거리는 내가 진정으로 누릴 영원한 삶이 어떠한 것이 되느냐는 것이어야 합니다. 지상에서의 삶은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는 마음이 떠나야 하고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이 육체의 역할을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면 우리는 천국에서 아버지와 주님과 성령님과 천군 천사와 뭇 성도들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때 빛으로 만들어진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짐승과 사람의 육체는 살덩어리라면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의 형태는 빛 덩어리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빛 덩어리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에 대해 말씀하시며 하늘의 별을 바라보라고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바라보았던 별 중에 나도 들어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스타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을 보면 부활을 기점으로 부활 이전의 몸과 부활 이후의 몸을 네 가지로 비교합니다. 첫 번째는 썩음과 썩지 않음입니다. 부활 이전의 살덩어리인 몸은 썩을 것이나 부활 이후의 빛 덩어리의 몸은 썩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욕됨과 영광스러움입니다. 부활 이전의 살덩어리인 몸은 모욕적인 대상이었으나 부활 이후의 빛 덩어리인 몸은 영광스럽습니다. 세 번째는 약함과 강함입니다. 부활 이전의 살덩어리인 몸은 약했으나 부활 이후의 빛 덩어리인 몸은 강합니다. 네 번째는 육의 몸과 신령한 몸입니다. 부활 이전의 살덩어리인 몸이 생각과 감정과 의지라는 인격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면 부활 이후의 빛 덩어리인 몸은 빛으로 만들어진 신령한 영체와 인격의 정신작용인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합쳐지는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인 썩음과 썩지 않음입니다. 42절을 보면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라고 하였습니다. 살덩어리인 육체는 누구의 육체든지 반드시 언젠가는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세상이 너무 좋아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았기에 불로장생을 꿈꾸게 됩니다. 불로장생을 위해서 신하 서곡이라는 사람에게 수천 명의 동남동녀를 딸려 보내며 불로초를 구하러 동방으로 보냅니다. 서곡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제주도까지 왔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신선이 사는 땅으로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하면서 불로초를 찾던 진시황은 고작 49살에 죽고 맙니다. 여러분도 살덩어리인 육체로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런 마음을 갖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진시황은 안타깝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빛 덩어리로 만들어진 영체가 진짜 나의 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랄 것은 건강이나 장수가 아니며 혹은 몸을 아름답게 오래 유지하는 것도 아닙니다. 육체는 가짜 몸입니다. 마음이 떠나야 할 몸이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몸임을 알아야 합니다. 진짜 몸은 빛으로 만들어진 몸입니다. 이 몸을 입고 살 부활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진짜 몸은 빛으로 만들어진 신령한 몸입니다. 이 영체가 진짜 나의 몸이라는 생각이 강하면 강할수록 살덩어리 몸에서 마음이 떠나고 하나님께 드림은 더 잘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썩음과 썩지 않음을 첫 번째 비교의 내용으로 제시합니다.
두 번째는 욕됨과 영광스러움입니다. 육체가 모욕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마음은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살덩어리인 육체에 달라붙음으로써 욕됨을 자처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모욕적인 일임을 모르는 것이 문제일 뿐 이것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모욕적인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는 곳이기에 값집니다. 이 지구를 다 팔아서 돈으로 환산하더라도 마음의 값어치에 비하자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렇게 값진 마음을 한낱 살덩어리로 이루어진 몸에 붙임으로써 마음은 더러워지고 악해지고 천박해지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영이시고 빛이신 조물주 하나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좋으심의 값은 제외하고라도 마음의 값어치는 지구를 다 팔아도 부족합니다. 그러한 마음이 언젠가는 없어질 살덩어리 몸에 달라붙어서 평생 하는 짓을 생각해보시면 왜 모욕적인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마음이 몸에 달라붙을 때마다 더러움과 부패함과 죄악이 나타납니다.
반면에 빛으로 만들어진 진짜 내 몸을 입게 될 때는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상하게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천군 천사들을 향해서 모든 것을 향하여 부정도 없고 부패도 없고 더러움도 없고 악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도 아름답고 천군 천사들이 볼 때도 아름답고 성도가 서로를 볼 때도 아름다운 영광스러움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 세계의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으며 학문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믿음으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려져 있지만 영적인 실제 사실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약함과 강함입니다. 부활 이전의 우리의 육체는 부활 이후의 빛으로 만들어진 진짜 몸에 비하자면 비할 수 없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살덩어리 육체는 능력과 활동력이 시간과 공간의 차원 안에 갇혀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많은 병과 각종 장애에 시달릴 수밖에 없으며 계속해서 늙어갑니다. 이것이 육체가 가진 약함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여 받을 몸은 어떠한 제약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의 제약도 없고 공간의 제약도 없으며 병도 없고 장애도 없으며 늙지도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특성은 지루함과 낡음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4차원 세계에서는 시간을 따라 일어나는 지루함이나 낡음이 없습니다. 빛으로 만들어진 몸을 입고 사는 천국의 상황을 인간의 언어로 묘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근사하게 묘사한다면 이상하게 계속하여 새로움의 느낌이 드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빛으로 만들어진 몸은 공간을 초월하기에 원자폭탄 100개가 터져도 죽지 않는 강한 몸이 됩니다. 이것이 진짜 내 몸이라는 것이 영적인 사실입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각자가 책임질 일이고 각자의 자유이지만 영적인 사실입니다.
네 번째는 육의 몸과 신령한 몸입니다. 육의 몸이라 번역된 헬라어 푸쉬키콘(ψυχικόν)은 정신 활동을 뜻하는 푸쉬코(ψύχω)를 어원으로 합니다. 정신활동이 왜 육의 몸이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육체로 살고 있는 상태에서는 정신적인 활동이 나타납니다. 정신적인 활동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움직임을 통해 나타납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활성화되고 있는 상태가 곧 정신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철저하게 육체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재료가 없으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고 어떤 것도 의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정신활동인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철저하게 육체에 의존합니다. 이것이 바로 육의 몸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몸은 이와는 다릅니다. 부활해서 빛으로 만들어진 몸에서도 여전히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는 정신활동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빛으로 만들어진 몸은 썩지도 않고 영원히 지속되고, 욕되지 않고 영광스러우며, 약하지 않고 강합니다. 이러한 몸에 의존하여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해서 빛으로 만들어진 영체를 입고 사는 생애 속에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움직일 때마다 평강과 기쁨과 행복을 자아내게 될 것입니다. 생각할 때마다 기분이 좋고 행복하고 기쁩니다. 감정이 움직일 때마다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의지가 발동할 때마다 의지의 활동으로 인해서 생기는 감격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육체에 의존하는 동안에는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뉴스만 보아도 걱정과 근심이 생겨납니다. 파키스탄에서는 홍수로 국토의 1/3이 잠기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물가가 치솟고, 우리나라 안에서도 이런저런 문제가 가득합니다. 이러한 육체의 감각에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의존하는 동안에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빛으로 만들어진 몸으로 접하는 천국에서 보고 듣는 것들에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일 때는 이와는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볼 때마다 기쁘고 들을 때마다 행복하고 생각하며 감정을 움직이고 의지가 움직이는 인격적인 정신활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기쁨은 시간 속에 있기 때문에 결국 지루해집니다. 아무리 맛있는 것도 서너 번 먹다 보면 지겨워집니다. 이것이 시간의 특성이기에 시간 속에서는 어떤 것도 좋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조차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다 보면 처음에는 새롭고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한계 안에 갇혀있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그 감격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시간이 보통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모든 기쁨과 감격을 퇴색시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은 부지런히 시간에 갇혀있는 육체를 벗어나야 합니다. 이 벗어남에서 확실해지지 않으면 어떠한 감격도 다 시들해져 버립니다. 시간 속에서의 감격과 기쁨이라는 것은 절대로 지속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시간 속에서 머무르지 않고 떠나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복음이 주는 살아있는 기쁨과 평강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 말하면서 가만히 앉아있으면 저절로 주어질 것이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30절에서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지신 멍에와 짐을 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평강이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나의 마음이 정말로 몸을 떠났는가? 나의 몸은 하나님께 드려졌는가?”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날 생각도 하지 않고 드릴 생각도 하지 않는다면 복음으로 인한 평강이 느껴질 수 없습니다. 마음이 시간 속에 갇혀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면서 나타나는 결과는 마음이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되는 일은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의 몸을 내 몸 삼아 이 땅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만 빛으로 만들어진 영체가 내 몸으로 주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공로 위에서만 우리에게 빛으로 만들어진 영체는 입혀질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주님을 올라타는 일에 자꾸 실패하고 좌절합니다. 이 세상으로 마음을 끌어당기는 죄적 체질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올라타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세상에 올인해서 기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얻으려는 삶에 비하자면 훨씬 쉬운 일입니다. 어려워서 할 수 없다고 하신다면 세상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으로 돌아가서 죄적 체질이 이끄는 대로 세상을 붙잡기 위해 살아본다 해도 얼마나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이룬다고 하여도 그 기쁨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한 번 해보신다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저도 뉴스를 보거나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접할 때 마음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마음이 안 상하는 쪽으로 이 세상일이 이루어졌으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면 저의 마음은 세상으로 더 깊이 빨려 들어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 상황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아서 마음 상하는 것이 오히려 감사한 일이고 은혜가 됩니다. 마음이 원하는 방향대로만 세상일이 잘 되어서 마음 상할 일이 없다면 우리의 마음은 세상에 박혀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끝장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옥으로 들어갈 영체를 갖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령한 몸이 아니라 악령적인 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일을 보며 마음이 상할 때에는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일이 이루어진다면 나는 점점 더 깊이 세상에 빠질 것이다. 내 마음이 세상에 빠져들지 못하도록 마음 상할 일도 생기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십자가를 붙잡고 주님과 하나 되기 위한 선한 싸움은 우리를 빛으로 만들어진 몸을 입게 되는 부활로 다가가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이제 진짜 몸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몸은 떠나야 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몸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소망은 진짜 몸인 신령한 몸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와 주님과 성령님과 더불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야 할까요? 부활을 바라보며 살덩어리 육체를 떠나야 할 몸으로 드려야 할 몸으로 살면서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을 표현하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빛으로 만들어진 몸을 약속해 주신 부활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