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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2

녹취문: 죽음과 부활 틈에서 영면하다 깨기_태승철 (고린도전서 15:45~58)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9.19|조회수133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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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죽음과 부활 틈에서 영면하다 깨기>의 줄거리:

육체의 죽음과 부활 이 둘의 간격은 사이라고 하기가 부적절합니다. 사람은 죽음과 함께 영면에 들었다가 깨어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영면에 들기와 성경이 언급하는 영면은 의미가 다릅니다. 영원한 잠자기를 말하는 영면은 시간의 흐름이 끝없이 잠든다는 뜻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밖으로 나가서 잠이 든다는 뜻입니다. 성경적인 영면의 상태에서는 시간이 단 1초도 지나가지 않습니다.

 

죽음과 부활 틈에서 영면하다 깨기

(고린도전서 15:45~58)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죽음과 부활 틈에서 영면하다 깨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죽음과 부활 틈에서 영면하다 깨기”

본문에서는 정말 중요한 여러 가지 비밀스러운 사실들이 드러납니다. 그중에서 제 마음에 와닿는 부분은 58절의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는 부분입니다. 옛날에는 주의 일에 더욱 힘쓴다는 말이 예배당 일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주의 일에 더욱 힘쓴다는 말은 십자가 생활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힘씀과 수고를 언급합니다. 그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습니다.”라고 고백해서 주어지는 구원과 구원을 이룸이 아닙니다. 힘쓰고 수고함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저의 마음에 와닿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힘쓰고 수고하며 살아갑니다. 믿음을 향하여 힘쓰고 수고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향하여 힘쓰고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귀신에게 이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에 힘쓰고 수고하면 이 세상일은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에 의해서 저절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또 본문에서는 비밀로 가려져 있는 영적인 사실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제목을 “죽음과 부활 틈에서 영면하다 깨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영면하다 깨기”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엄격하게 말하자면 “사이”라는 말은 쓰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굳이 “틈”이라는 말을 써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향하여 “영면하다, 영면에 들다, 영면에 임하다” 등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영면(永眠)은 말 그대로 영원한 잠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육체의 죽음에 대해 잠잔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영면은 세상이 말하는 영면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세상이 말하는 영면은 시간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살면서 시간의 흐름을 느낍니다. 시간 자체는 보이지 않지만 얼굴을 보고 머리카락을 보면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영면이란 시간이 끊이지 않고 흐르는 상태에서 잠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하는 영면은 시간의 흐름을 빠져나간 상태의 영원 속에서 잠자는 것입니다. 시간의 흐름이 끝없이 지속되는 상태와 시간의 흐름에서 아예 빠져나간 상태는 전혀 다릅니다. 시간이 끝없이 흘러가는 것은 영원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원이라는 차원을 모르기에 영원을 시간이 끊어지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3차원 세계의 바깥에 4차원 세계인 천국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4차원 세계는 시간의 흐름 바깥에 있는 영원의 차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원은 시간이 끝없이 흘러가는 상태가 아니라 시간 자체가 없고 시간 바깥으로 나간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이 없는 영원 속에 계시다가 창조를 통해 시간이 흘러가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시간 바깥의 영원의 차원에 계시면서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언어는 시간과 공간에 의해 규정되어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매여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언어를 통해 영원의 세계를 묘사하고 그대로 느끼기는 사실 불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성경에는 수없이 많은 비유와 상징들이 동원됩니다. 이러한 영원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비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51절을 보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으로부터 부활의 양상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홀연함이란 급작스러운 한순간의 변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때 이미 육체가 죽은 사람들은 잠자고 있다가 깨어나서 홀연히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부활을 당하는 사람들은 지옥이라는 4차원 세계로 들어갈 몸을 입게 되고, 생명의 부활을 하는 사람들은 천국이라는 4차원 세계로 들어갈 신령한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지 않은 45~49절까지를 보면 사도 바울은 이 신령한 몸의 예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령한 모습을 몇 가지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모습, 변화산에서의 모습, 요한계시록에 등장하시는 모습,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할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영광에 휩싸여 계시던 모습들이 그러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는 오늘 저녁 온라인 교회 모임 때에 좀 더 자세히 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신령한 모습이 왜 이렇게 다양하게 나타나는가에 대해 생각해볼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부활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 공통적 특징은 빛입니다. 제자들이 보았던 부활하신 예수님은 손에 못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같은 살덩어리 육체를 가지신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문을 닫아걸고 있었음에도 벽을 통과해서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록으로부터 예수님의 몸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계셨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변화산에서의 모습이나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모습이나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할 때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을 종합적으로 보자면 빛의 덩어리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빛의 덩어리와 같으셨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달라지신 것이 아닙니다. 영원 전부터 갖고 계셨던 천국에서의 모습을 회복하셨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다만 인간 세상에서 우리의 부활을 보증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거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전 지식을 가지고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50절을 보면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육체로는 4차원 세계의 영원한 것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육체의 용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이 육체를 떠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고, 그리고 마음이 떠나서 주인 없이 남게 된 육체는 하나님의 손이신 성령님께서 장갑으로 끼시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사용하시게 됩니다. 이 두 가지가 육체의 주된 용도입니다.

육체는 마음이 떠날 용도로 사용될 때에 하나님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또한 육체는 성령님께서 사용하심으로써 사람 사랑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용도를 마친 육체는 폐기처분 됩니다. 폐기처분이라고 해서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몸, 요셉의 몸, 모세의 몸, 다윗의 몸, 솔로몬의 몸, 이사야의 몸, 예레미야의 몸도 예외 없이 폐기처분 되었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며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 수가성 여인, 막달라 마리아의 몸도 폐기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몸도 폐기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폐기되기 전까지 용도에 맞게 쓰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폐기처분이 당연한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육체로는 맞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잠깐 살다가 끝 날에 이 세상에서의 육체는 용도에 충실하면 될 뿐 사랑할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가 용도폐기 된 이후에 소위 “영면에 들어갔다.”라고 말하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사도 바울은 이 상태를 잠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잠잔다고 표현한 이유는 예수님의 재림 때 깨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이미 죽어서 잠든 자들이나 아직 죽지 않고 깨어있는 자들에게나 동시에 임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상대적으로 다른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는 낮인 시간이 남미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밤입니다. 동남아시아나 미국이나 유럽을 보면 우리와는 시간대가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시간과 공간이 없어지면서 대한민국으로부터 지구 반대쪽에 있는 아르헨티나나 브라질 같은 곳에 사는 사람들도 동시에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에 살아있던 자들은 홀연히 변화를 이루어서 심판의 부활이나 생명의 부활로 나뉠 것입니다. 생명의 부활을 하는 자들은 영원의 세계인 천국에 합당한 신령한 빛의 몸으로 변할 것이고, 심판의 부활을 하는 자들은 마찬가지로 영원의 세계인 지옥에 합당한 몸을 입고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죽은 자들에게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홀연히 변화하는 것처럼 잠자고 있던 죽은 자들 또한 홀연히 깨어나서 합당한 영적인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영, 혼, 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은 빛이시고 영이신 하나님을 모셔 들이기 위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21~22절에서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모셔 들이기 위한 공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영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영을 염두에 두고 육체와 구분하며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영으로써 영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마음은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도록 비어있기 때문에 무엇인가로 채워지고자 하는 욕구 작용을 하는 흡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은 있는 것들 중에 좋은 것으로 채워져야 하기에 있음을 느끼는 의식 작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있음이시기에 또한 우리 마음을 채우실 수 있는 유일한 좋음이십니다. 이것이 영의 의미이자 영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혼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육체와 연합되어 있는 정신적 기능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기능, 감정을 느끼는 기능, 의지하는 기능은 육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세상의 재료들에 대해 생각과 감정과 의지라는 형태로 반응합니다. 이렇게 육체와 연합된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이 활성화되어있는 상태가 혼입니다. 그리고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살아서 활성화돼있는 상태를 위해서는 육체가 살아있어야만 합니다. 육의 사람이라고 할 때는 육체에 의존되어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고 마음의 의식 작용이 육체에 종속돼있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육체가 죽으면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활성화 상태는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그렇다고 해서 영인 마음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도록 공백을 가지고 있는 영인 마음은 없어지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단지 그동안 입고 있었던 육체의 몸을 벗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육체가 없어짐으로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혼의 기능도 작동할 수 없을 뿐입니다. 이 육체와 혼의 기능이 상실되었으나 몸을 벗은 채 남아있는 영의 상태를 사도 바울은 잠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재림 때 일어날 부활과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67~69년 사이에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에 죽은 지 거의 2000년 가까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예수님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사도 바울의 죽음과 예수님의 재림은 너무나 멀리 떨어진 것처럼 여겨집니다. “사도 바울은 2000년이 지나도 아직 부활을 못하고 있는데, 나에게 부활이 어떤 의미를 가지겠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지 못한 것은 사도 바울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도 마찬가지이며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나 수가성 여인이나 막달라 마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부활을 언급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요? 2000년이라는 세월을 생각하면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전입니다. 이렇듯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면 부활의 의미를 놓치기 쉽습니다. 다만 이것은 시간과 공간에 제한된 언어로 생각함에 있어서 나타나는 한계일 뿐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도 바울은 육체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곧 육체가 죽음으로써 육체로 살 수밖에 없는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벗어났음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지 4000년이 지났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작 아브라함은 육체가 죽음으로써 시간의 흐름 바깥으로 나간 영면의 상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면을 시간이 끊이지 않는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잠자는 것은 시간의 흐름 바깥으로 나갔음을 의미합니다. 육체를 벗어버린 아브라함의 영은 시간 바깥에 있으므로 아직 1초도 흘러가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4000년이 흘렀지만 아브라함의 영은 1초도 경과한 것이 아닙니다. 2000년 전에 죽은 사도 베드로나 사도 바울이나 초대교회 신앙의 선진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육체가 죽은 그 순간으로부터 시간의 흐름 바깥으로 나갔기에 단 1초도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시간의 흐름상 4000년 전에 죽은 아브라함이나 2000년 전에 죽은 사도들과 초대교인들과 500년 전 종교개혁 시대의 마르틴 루터나 캘빈이나 모두가 다 시간의 바깥으로 나간 상태입니다. 먼저 죽었든 나중에 죽었든 그것은 시간 속에서만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시간 바깥으로 나갔기에 먼저 죽은 것도 나중에 죽은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시간과 무관한 영적 세계의 특징입니다. 시대적으로는 마르틴 루터가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에 비해 1500년이나 후배이지만 영적인 관점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영원의 세계에서는 먼저도 없고 나중도 없기 때문입니다. 3차원 세계에 길들여지고 국한된 생각을 가지고 영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파악하기는 사실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함에 있어서는 죽고 나서 부활 때까지의 시간적 사이를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라는 3차원과 영원이라는 4차원 사이에 끼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제목에서 이것을 “죽음과 부활 틈”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사이”나 “간격”이라고 한다면 표현적으로 시간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기에 굳이 “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돌아가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죽은 지 10년이 흘렀어도 정작 그들에게는 1초도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해서도 우리에게는 4000년 전의 사건이지만 정작 아브라함에게는 1초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바로 내 앞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지금으로부터 1000년 뒤에 재림하신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고 나서 천년 뒤에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는 순간 마음은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 잠자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잠에 들어간 순간과 예수님이 오셔서 부활하는 순간은 바로 이어지게 됩니다. 인류가 창조된 이후로 지금까지 죽은 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 모든 사람들은 1초도 지나지 않은 영면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모두 다 죽은 순간에 이어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죽고 곧바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4000년 전에 죽었는데 아직도 부활을 못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관점에서 하는 이야기고, 정작 아브라함에게 부활은 죽고 바로 일어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마취입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보다 더 적절한 예를 찾기가 어려워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독일에서 모든 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잠시 한가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 시간 동안 저는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던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의 마취 경험이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과 연관된 잠자는 것의 사실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박사학위보다 수술을 받기 위한 마취에서 영적으로 더 큰 경험을 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척추마취를 위해서 누워있으면 주삿바늘이 들어오는 것까지 느껴집니다. 그런데 마취한다는 의사와 간호사가 계속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왜 수술을 안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간호사가 저를 흔들더니 “수술하고 일곱 시간 지났어요.”라는 대답을 합니다. 저의 의식은 마취를 하는 순간 끊어졌다가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에 붙어버린 것입니다. 저의 의식에서는 수술하는 시간과 이후의 일곱 시간이 사라져 버린 셈입니다.

저에게는 10시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아브라함은 이것이 4000년일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의식이 끊어지면서 죽음에 들어갔던 그 순간으로부터 부활의 순간이 달라붙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은 방금 죽었다는 의식도 못하는 상태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과 이어서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저 돈 생각만 하다가 갑자기 심장마비가 와서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돈 생각하던 순간과 의식이 부활하는 순간이 붙어버릴 것입니다.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돈을 생각하는 상황이기에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항상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58절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차피 힘쓰고 수고해야 하는 시간이라면 세상을 위해 힘쓰고 수고하지 말고 항상 깨어있기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이 육체가 하나님 사랑의 용도와 사람 사랑의 용도로 제대로 쓰이다가 아무런 미련 없이 폐기될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세상을 위해 힘쓰고 수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오늘은 뭘 먹을지 고민합니다. 불고기를 먹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가 죽어서 깨어나는 순간 예수님의 재림을 마주한다면 어떨까요? 그 사람이 잠들어 있던 시간이 100년이 됐든 1000년이 됐든 죽었다는 의식도 없이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제가 마취의 순간을 느낄 수조차 없었던 것처럼 죽음을 느낄 수조차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우리의 영이 시간 바깥으로 나갔다가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곧바로 일어나는 일이고 죽자마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죽어서 언제쯤 부활할까? 예수님의 재림을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라는 이야기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있기에 부활을 생각할 때에도 시간을 염두에 둡니다. 예수님이 내일 오실까, 100년 뒤에 오실까, 1000년 뒤에 오실까를 걱정합니다. 그런데 부활은 죽자마자 일어납니다. 육체가 부활하는 것이 죽자마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이 오기 전까지 육체를 본래의 용도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몸을 떠남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드러나게 됩니다. 몸을 통해 만나는 어떤 것들도 있음도 아니고 좋음도 아님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오직 아버지의 주권에 있음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떠난 몸에 대해서는 온전히 성령님이 주체가 되셔서 몸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을 마음껏 사랑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쓰기 위하여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부활 생각이 꼭 필요합니다.

 

마취가 되면 의식이 끝나는 순간이 깨어나는 순간과 달라붙게 됩니다. 마취상태에서는 수술이 일어난 것조차 의식하지 못합니다. 부활이 이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시 깨어날 때는 2000년 동안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가 그 판도 안에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만들어지게 되고, 중세가 시작되는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죽는 순간과 예수님이 오시는 순간이 붙어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도 죽고 나서 바로 부활하는 것이고, 사도 바울도 죽고 나서 바로 부활하는 것이고, 우리도 죽고 나면 바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부활하기 직전까지 써야 할 몸을 어떤 용도로 쓰느냐가 과제입니다. 영면은 영원한 4차원 세계와 시간과 공간의 3차원의 틈에서 잠자는 것입니다. 죽자마자 부활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활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에 관련된 이야기 이외에도 본문과 연관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참 많습니다. 이 영면은 천국에서의 잠이냐 예수님이 말씀하신 낙원에서의 잠이냐 혹은 지옥이냐 음부냐에 대한 이야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핵심적인 것은 부활은 죽자마자 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부활이 기다려집니다. 사도 바울이 왜 지금이라도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내게 가장 좋은 일이라고 말씀하신 뜻을 조금이나마 이론적으로라도 이해하며 느끼며 수긍할 수가 있게 됩니다. 아무쪼록 죽자마자 일어나는 이 부활을 마음에 담고 살아있는 동안 육체에 부여하신 그 용도를 따라 정말 실컷 하나님 사랑하며 사람 사랑하며 살다가 폐기되는 육체가 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고 살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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