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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2

녹취문: 교인의 희귀 유전자와 교회의 소속감_태승철 (고린도전서 16:1~2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9.22|조회수76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교인의 희귀유전자와 교회의 소속감>의 줄거리:

사도 바울은 교회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개념들로 돌아와서 고린도전서를 마칩니다. 즉 이 세상 안에서 교인은 어떤 사람인가를 간단 명확하게 제시하며 또한 지역을 초월하여 흩어져서 사는 모든 교인 전체를 한 가족으로 묶는 소속감을 드러내 강조합니다. 그런데 교인의 유전자가 참으로 희귀합니다. 이렇게 희귀한 유전자에서 비롯되는 소속감이 교회를 하나가 되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교인의 희귀 유전자와 교회의 소속감

(고린도전서 16:1~24)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교인의 희귀 유전자와 교회의 소속감>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교인의 희귀 유전자와 교회의 소속감”

제목은 교인에게는 희귀 유전자가 있으며 그 희귀 유전자에 교회의 소속감이 근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로마서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 이야기가 잠깐 언급되었는데 고린도전서의 마지막에서 이 이야기가 다시 나옵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오랜 기근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 교인들을 위한 구제헌금을 언급하면서 갈라디아 교회들의 예를 듭니다. 같은 이유에서 갈라디아 교회들도 헌금을 모으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로부터 적어도 사도 바울과 연락이 되고 있던 모든 교회에서는 예루살렘 교인들의 기근을 위한 헌금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단순히 구제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헌금을 언급한 것이 아닙니다. 헌금에 대한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특별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어떤 지역에 있든지 모두가 다 하나라는 소속감을 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회가 하나라는 이야기를 표면적으로 드러내서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교회가 하나임을 강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 연보에 관한 내용입니다.

 

“연보”라고 번역된 헬라어 로게이아스(λογείας)는 “모으다, 거두어들이다”라는 뜻의 동사 로규오에서 나온 명사로써 나중에는 세금을 징수할 때에 사용되는 단어로 쓰였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세금을 거둘 때에 사용하는 표현인 로게이아스를 연보 즉 헌금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예루살렘 교인들을 향한 구제헌금이 자발적 감동으로 하는 헌금이 아니라는 인상을 줍니다. 당위적이고 의무감에서 하는 세금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보, 헌금이라는 단어로 번역될 수 있는 헬라어 단어는 이외에도 다양하게 있습니다. 맥락에 따라서는 은혜라고도 할 수 있는 단어를 헌금으로 번역할 때도 있으며, 교제라는 단어도 헌금으로 번역할 때도 있습니다. 축복, 봉사, 섬김 등이 비슷한 용례로 쓰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단어가 헌금을 뜻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굳이 세금을 거둘 때에 쓰는 단어를 선택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고린도 교회로부터 무척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지금의 그리스 반도에 있고 예루살렘 교회는 팔레스타인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고린도 교인들은 예루살렘 교인들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의무적이고 당위적으로 세금을 내는 마음으로 헌금을 하라니 다소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의무감을 강조하는 이유는 헌금을 강압하기 위한 의도가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한 가족임을 말씀하고자 하심입니다.

가족 중에 문제가 생기거나 일을 당하게 되면 나머지 가족은 자발적으로 그 문제에 개입하게 됩니다. 혈연상의 가족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는 자발적으로 개입해서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발성이 교회와 교회 사이에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일은 마음먹고 의무감을 갖지 않으면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와 교회 사이에 가족관계가 성립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세금을 낼 때처럼 가족으로서의 의무감을 가질 수 없다면 이 세상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이 하나의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교회에 대해 의무감을 가지고 계십니까? 가족 중에 문제를 자주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남편이 도박벽이 있어서 매일 문제를 일으킵니다. 아내도 자식도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가족관계는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바로 이렇게 가족으로서 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매여야 할 교회의 실상을 보면 완전히 산산조각으로 깨지고 흩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가족의 의무감을 갖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나 고린도 교회나 예루살렘 교회가 서로 얼굴도 못 본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하나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굳이 로게이아스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연보나 헌금을 뜻하는 수많은 단어들 대신 하필이면 세금을 징수할 때 쓰는 단어를 사용하며 “가족이기 때문에 외면할 수가 없다.”라는 의무감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의무감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교회에서 가족이라는 의무감이 사라져가고, 교인의 희귀한 유전자가 드러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이 가진 희귀한 유전자가 드러나게 되면 반드시 나타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가 한 가족이라는 소속감입니다.

스웨덴이 복지국가인데 처음부터 복지국가였던 것은 아닙니다. 스웨덴의 페르 알빈 한손(1885~1946) 총리는 “국민의 집(Folkhemmet)”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국가를 한 가족개념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강원도에 살고 있더라도 충청도에 살고 있는 아이가 우리 아이라는 셈입니다. 이처럼 나라 안에서 살고 있는 모든 국민에 대해서 한 가족의 아이로 생각하고 교육을 시키고 돌보고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 “국민의 집”이라는 정책이었습니다. 의료제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치매환자가 생기면 국가 전체의 일이지 치매환자를 가진 가족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족개념에 근거를 두고 복지제도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 땅에 있는 나라가 가족개념이 될 수 있다면 교회는 더더욱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소속감입니다. 교인의 희귀한 유전자 때문이라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이 희귀한 유전자가 무엇일까요? 그 대답을 마지막 부분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고린도전서를 끝내는 문안인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안인사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무섭습니다. 21~22절을 보면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번역된 마라나다(Μαρανα θα)는 초대교인들에게 널리 쓰였던 인사입니다. 이 인사는 살아있을 때 주의 재림을 소망한다는 뜻입니다. 살아있을 때 주님이 오시면 육체가 죽었을 때와 똑같은 효과가 나타납니다. 지금 무엇을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못하든, 무엇을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어떤 대단한 꿈을 가지고 있었든지 아니든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순간 삶은 멈추게 됩니다. 죽을 때에는 세상을 떠나지만 주님이 오실 때는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고 시간과 공간의 세계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주의 재림을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마치 육체의 죽음을 달가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무섭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육체의 죽음이 실제로 일어나는 순간을 바라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는 동안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붙잡고 그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날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체가 완전히 죽는 날을 기다림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니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렇게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늘 마음으로 의식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늘 마음에 바라는 것은 주님의 재림 때입니다. 주님의 재림 때는 육체가 끝나는 때이며 하나님과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있기 위해 부활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빛으로 만들어진 몸을 입는 순간입니다. 이것을 지난 설교에서 “부활은 육체(肉體) 벗고 광체(光體) 입기”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 포인트는 이 세상이 완전히 없어지는 순간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순간을 소망하고 기다리지 않으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초대교인들이 주님을 사랑했던 방식이 모든 교인들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인격적 유전자입니다. 그런데 이 인격적 유전자는 너무도 희귀합니다. 지난 시간에 진시황의 예를 들었습니다만 진시황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인격적 성향은 교인들과는 반대입니다. 자기의 죽음의 때를 소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교인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이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지고 이 세상이 다 없어지고 육체가 죽는 순간을 소망함으로 나타납니다. 이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바로 교인이고 이러한 특징을 비유적으로 교인의 희귀 유전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희귀한 유전자를 가진 교인들은 죽음의 때를 인생 최고의 대박의 순간으로 믿고 바랍니다. 그 순간에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것이고 부활하여 육체가 아닌 광체의 새로운 몸을 입고 하나님 아버지를 대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러한 교인의 희귀한 소망이 바로 인격의 유전자입니다. 이 죽음의 소망을 두렵고 떨림으로 주저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받아들이는 인격적 특성이 바로 교인의 희귀한 유전자의 내용입니다. 육체의 죽음을 달갑게 생각하는 상태가 되고자 함은 두렵고 주저할만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각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인다면 선민이라는 증거이고 희귀한 유전자로 비유할 수 있는 인격적 특성입니다.

누가 육체의 죽음을 달갑게 여기며 “당장 그렇게 돼야겠어!”라고 하겠습니까? 그렇기에 두렵습니다. 주저하게 됩니다. 여전히 죽음이 저주같이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오시옵소서.”라고 하며 재림의 순간을 바라게 됩니다. 재림의 순간은 세상이 끝나는 때입니다. 세상은 재림 때에 없어지면서 끝나지만, 개인적으로는 육체가 죽을 때에도 끝나는 것입니다. 살아있다가도 주님이 오셔서 홀연히 육체가 변하게 된다면 세상은 끝납니다. 그러므로 살아있으면서 주의 재림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육체와 연관된 세상이 없어지고 죽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희귀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로부터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한 마음의 죽음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고자 하면서도 육체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함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음을 이룰 때, 그 마음이 세상에 대해 정말로 죽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라는 고백에 대한 진실성 여부를 알 수 있는 기준은 육체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육체의 죽음이 친근하고 달갑게 느껴지는가를 통해 십자가에서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어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얼마나 진실된 것인가를 분별하고 점검해볼 수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부활 승천의 과정을 따라 보좌 우편까지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반복하는 일에 진정이 담긴다면 이 사람에게는 점차적으로 육체의 죽음이 달가운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이 희귀한 일이 실제로 일어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진실하고 철저히 하려면 반드시 육체의 죽음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 상태를 기준으로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체의 죽음을 달갑게 생각하는 정도에 따라 세상에 대한 마음의 죽음도 분명해집니다. 세상의 있음과 좋음과 나 자신의 주체성에 대해 죽고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에 대해 사는 실제 변화가 육체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통해서 점검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육체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린 상태에서 진행되는 십자가 생활화는 커다란 위험에 봉착하게 됩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마인드 컨트롤의 일종이 되어버립니다. 마인드 컨트롤의 목표는 마음의 평정을 찾고 그 평정을 기반으로 생산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러한 마인드 컨트롤을 위한 방법이 많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면 결국 십자가 생활화는 문제에 매이고 끌려 들어가서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의 상태를 평정의 상태로 만들어주는 수단이 돼버립니다. 문제에 대한 내 마음을 끊어버림으로써 평정을 유지하게 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생활화에서는 실제로 육체가 죽었을 때와 같이 마음이 세상을 떠나는 효과가 나타나야만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어렵다고만 할 일이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점검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 죽는다면 마음이 어떠한가에 대해서 보고 “내가 아직도 세상에 대해 이 정도로 많이 관여하고 있고 좋아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사실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육체의 죽음은 졸업이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졸업하고 하늘이라는 높은 등급의 학교로 진학하는 셈입니다. 세상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를 두려워하는 고3 학생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체의 죽음을 끝으로만 생각하여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가 개입되지 않았다면 당연하게 천국을 좋아하고 하늘에 대한 소속감을 강하게 가졌을 것입니다. 여전히 육체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아직도 세상에 소속된 상태입니다. 최고의 대학에 입학이 결정되었는데 굳이 대학을 가기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고3에 머물러 있겠다는 마음 상태라면 그 사실을 제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육체의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 그 효과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대해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고 고백하면 일시적으로나마 마음에 평정이 주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재미로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는 십자가 생활화의 진면목에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죽는다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를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인격의 상태가 세상과 하나님과 주님이 계시는 천국 사이에서 육체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3~24절에서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바라기는 육체를 떠나 하늘로 가고 싶으나 교인들을 위하여 할 일이 있기에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희귀한 유전자가 전혀 발동되지 않는다면 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죽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때 육체의 죽음에 대한 인격 상태를 점검할 수 없다면 입으로는 세상에 대해 죽고자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하는 기형적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생활화를 제대로 해나가기 위해서는 단지 문제에 끌려가는 마음의 죽음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에 대한 반응을 확인해야 합니다. 육체의 죽음에 대해 마냥 무서워하고 있다면 그만큼 육체로 만나는 세상에 대해 깊이 관여하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주님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사도 베드로처럼 언제 하나님 아버지가 부르시더라도 너무나 달갑고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아무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게 준비된 자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희귀한 유전자에 근거될 때 교회는 하나로 묶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든지 고린도에 있든지 예루살렘에 있든지 모두가 육체의 죽음을 달가워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이런 희귀한 인격적 유전자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고 싶다는 유전자의 특성에 근거해서 하나로 묶이게 됩니다.

전 세계의 교회는 놔두고 대한민국 교회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교회를 진짜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교회는 기독교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교회라고 이름 하지만 그 상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구교와 신교로 쪼개졌으며 신교도 수없이 많은 교단으로 쪼개졌습니다. 교단 안에서도 지역별로 노회로 쪼개졌으며 결국 마지막에는 한 목사님 한 예배당을 중심으로 하는 개교회로 다 쪼개져 있습니다. 옆 동네의 교회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개입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옆 교회의 교인을 빼앗아 오더라도 우리 교회가 커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과연 옆 교회 교인들을 가족처럼 여기며 의무적이고 당위적으로 그들의 어려움에 개입하겠다는 소속감을 갖지는 않습니다.

교회의 소속감이 깨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천국 출신임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국 출신이기 때문에 천국을 향해야만 합니다. 이 소속감을 잊어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에는 무서운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22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꼭 붙잡고 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날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저주를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이 오실 날을 가장 소망하는 이유는 육체의 죽음이 진짜 좋은 인생을 시작하는 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라는 희귀한 유전자가 없으면 교회는 끊임없이 분열될 수밖에 없습니다.

 

캘빈과 루터와 츠빙글리 같은 종교개혁자들도 결국은 자기들의 분파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교리를 가지고 가톨릭과 싸웠던 것처럼 자기들끼리도 교리를 가지고 싸웠습니다. 또 개혁의 방식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어떤 사람은 급진적 개혁을 주장했고 또 어떤 사람은 온건한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톨릭에서 필요한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어떤 사람은 철저하게 가톨릭을 쳐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에 분쟁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일은 교리논쟁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지 마음이 땅에 대해서 죽고 하늘로 올라가야만 하고, 육체의 죽음이 인생의 대박 사건임을 강조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교인이 갖고 있는 인격적 유전자의 핵심은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나고 몸이 이 세상을 떠나는 죽음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 죽음이 인생의 정점이라는 확신이 교인의 희귀한 인격적 유전자의 특성입니다. “죽음이 인생의 대박이다.”라는 생각은 희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미쳤다고 할 정도로 희귀한 생각입니다. 이 희귀함의 유전자가 발동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세상일에서 서로 자기 지분을 확보하려는 싸움이 생겨납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슨 싸움을 걸어올 때마다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육체의 죽음이 대박이라는 확신입니다. “세상에서 싸울 일이 아니라 세상에서 육체가 죽어서 마음이 완전히 세상을 떠나는 것이야말로 내게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이다.”라고 생각하며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교리가 다르더라도 이 하나의 공통점은 성립될 수 있습니다. 루터도 캘빈도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생활 속에서 이것을 적용하기보다 교리를 가지고 싸웠습니다. 죽음을 인생의 정점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면 교리가 다르더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라고 여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교리가 어떻든 분명한 한 가지는 지금 죽는 것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 마음의 죽음이 진실로 확인되기 위해서는 육체가 죽는 것이 최고라는 것을 받아들임이 어느 정도로 진척되고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천지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와 교인들에게 요구되는 단 하나의 공통적 유전자입니다. 사람마다 교리에 대한 생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죽는 것이 최고라는 이 생각은 다를 수 없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었으면 있음도 좋음도 세상에서 느낄 수 없습니다. 이는 곧 육체의 죽음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죽었다고 하면서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육체의 죽음을 통해서 십자가의 죽음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중에서 교인들이 공통적으로 바라야 할 일은 육체의 죽음입니다. 육체의 죽음의 순간을 바란다는 것은 시간 바깥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잠들어 있다가 예수님이 오실 때 하나님의 빛으로 만든 광체를 입고 부활하는 순간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을 바라지 않는다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희귀한 유전자가 존재하는지 확인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육체의 죽음을 얼마나 달갑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보고, 죽음이 달갑지 않은 상태라면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는 십자가 기도를 드릴 때 그러한 상태가 같이 죽는 기도를 반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날마다 육체의 죽음이 인생의 절정이라는 생각이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여지는 단계까지 가려고 시작하는 것이 선민이자 교인의 희귀 유전자입니다. 이 유전자는 인격적인 유전자이기 때문에 생물학적 유전자처럼 눈에 보이게 드러나는 일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조심스럽고 무서울 수 있으며 다분히 거부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가 죽는 순간이 인생의 정점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육체가 죽는 순간에 아버지를 만나고 주님을 만나고 아버지의 빛으로 만들어진 광체를 입고 부활한다는 생각입니다. 여전히 세상에 대한 죽음이 두렵고 주저하게 되고 무섭지만 이 생각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서 육체의 죽음이 인생의 정점이 될 순간을 향해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을 죽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바로 교인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의 생각을 갖고 있으므로 온 세상의 교회는 어디에 있든 어떻게 살든 어떤 상태에 있든지 하나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교인의 희귀 유전자가 활성화되게 해주시고 이 유전자에 근거되어 모든 교인들이 하나로 묶이는 하나의 교회가 이 세상에 윤곽을 드러내는 은혜의 시간을 우리가 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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