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도와 성도 모두 보냄 받았다는 의미>의 줄거리:
고린도후서의 주된 내용은 사도 바울이 당신의 사도권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것입니다. 거짓 사도들이 교회에 들어옴으로써 교인들은 고린도전서의 권면과 말씀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바울의 사도권 마저 의심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런 맥락에서 쓰인 내용을 접하면서 우리는 새삼 사도와 성도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주목합니다. 우선 둘 다 보냄을 받았다는 공통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사도와 성도 모두 보냄 받았다는 의미
(고린도후서 1:1~4)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사도와 성도 모두 보냄 받았다는 의미>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사도와 성도 모두 보냄 받았다는 의미”
고린도전서는 55년경 소아시아에 있는 에베소에서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살펴보게 될 고린도후서는 56년 가을쯤에 그리스 반도 북쪽의 마케도니아에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마케도니아에는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가 속해 있었습니다. 또 본문에서는 아가야가 언급되는데 그리스 반도 남쪽의 고린도, 겐그레아 도시가 포함된 지역이 되겠습니다. 이러한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이 마케도니아에서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후서라고 하니까 고린도전서에 바로 이어지는 편지처럼 여겨집니다만 고린도전서와 후서 사이에는 지금은 없어진 기록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기록들을 보면 먼저 보낸 편지가 언급됩니다. 편지는 없어졌지만 고린도후서의 언급을 통해 앞선 편지의 내용을 짐작할 수는 있는데 이를 근거로 “눈물의 편지”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고린도전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들려오는 소식은 좋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권면과 말씀을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소식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거짓 사도들이 들어와서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었고 심지어 사도 바울의 사도권의 정당성까지 의심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급하게 예정에 없던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이러한 행적은 사도행전에도 기록이 없지만 고린도후서의 내용을 통해 추측 가능한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방문해서 거짓 사도들을 축출하지 못한 채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눈물로 호소하는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은 없어진 이른바 ‘눈물의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디도를 통해서 고린도 교회에 전해지게 되었는데 편지를 받은 고린도 교인들은 비로소 회개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소식을 듣게 되었고 기쁜 마음으로 다음 편지를 보냅니다. 거짓 사도들에 의해서 일어난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불식시키고 올바른 방향으로 들어선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이 성숙을 이루고 변화해서 열매를 맺도록 격려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후서입니다.
이러한 고린도후서의 주된 내용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내용입니다. 1~2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중심이 되는 표현은 사도와 성도입니다. 우리는 사도와 성도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정확히 모릅니다. 고린도후서의 주된 내용이 사도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사도와 성도라는 단어에 주의를 집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서 성도가 아닌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 중에서 사도가 아닌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도와 성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아는 것은 고린도후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먼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와 “그리스도 예수의 성도”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사도와 성도라는 말에 집중해봅니다. 본문에서 사도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는 “~으로부터 보냄을 받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선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라는 단어 자체가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란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로 특별하게 구분을 받은 자”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적으로 보면 사도나 성도는 모두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성경은 보냄 받았다는 의미를 드러내기 위하여 “거듭났다” 혹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났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마음이 하늘 천국에 가 있는 상태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마음을 하늘로 보낸 상태에서 이 땅을 산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누누이 반복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마음을 하늘로 보내면 몸은 성령께서 움직이시게 됩니다. 성령께서 몸을 움직이시는데 그것이 왜 보냄 받은 삶을 사는 것이 된다는 것일까요? 몸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말과 행동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성령님을 통하여 전달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몸의 말과 행동이 하늘에서 보내진 뜻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냄을 받은 삶을 위해서는 전제가 있습니다. 마음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있기 때문에 이 땅에 보냄 받은 삶을 산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사도에게나 성도에게나 똑같습니다. 마음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이 있는 곳에 머물게 됩니다. 육체의 고향이 있듯이 마음이 머무는 곳이 마음의 고향이자 본부라 할 수 있습니다. 보냄을 받을 때는 본부가 있어야 합니다. 본부는 바로 마음이 가 있는 곳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가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의식 작용과 욕구 작용이 하나님께만 적용되기에 마음은 하늘로 가야만 합니다. 보물이신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부터 이 땅으로 보냄을 받는 것입니다.
이 보냄 받음에는 꼭 들어가야 할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것에는 원치 않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어떤 곳을 생각하고 마음에 떠올리면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근무를 하는데 마음속에서 늘 “미국 지사로 발령이 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아이들도 미국에서 교육을 시키고 생활비도 넉넉히 받으면서 살기를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꿈꾸던 미국지사 발령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회사의 직원이라는 입장에서는 보냄을 받는 것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가고 싶어 하던 곳으로 가게 된 것이기에 자발적으로 가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사도와 성도의 보냄 받음은 이러한 상황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보물이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예수님 따라 올라간 마음이 하늘에 있기에 이 세상에서 보냄을 받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원치 않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삶이 분명하려면 이 땅에서의 삶이 내 마음에서 원하는 삶이 아니어야 합니다. 마음은 있음을 느껴야 되고 좋음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하늘에 남아있는 상태에서만 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성립합니다. 마음은 하늘에 있지만 땅에서 살아야 하기에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보냄을 받았기에 이 세상의 현지인이 아닙니다. 선교사님들이 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면 현지인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현지인들 속으로 보냄을 받은 자임을 분명히 느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났던 대부분의 선교사님들의 현지의 환경이란 대한민국보다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보냄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현지인이 아닙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서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간 상태에서는 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자발적이라면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자발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못 살던 70~80년대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되실 것입니다. 그 당시에 미국을 간다면 자발적으로 가는 것이지 가기 싫은데 억지로 보냄을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뒤도 안 돌아보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것은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말구유에 태어나셨고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은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셨고, 오직 이 세상에서는 보냄 받은 자로서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만이 소중함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이 세상의 삶을 대할 때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이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이 있고 좋아하는 것이 있어서 자발적으로 삶을 대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보냄을 받은 자라면 가족을 대함에 있어서도 자발적일 수 없습니다. 가족을 대면하는 순간에도 가족보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좋겠다는 소망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뜻이기에 할 수 없어서 가족도 대하고 직장에도 다닙니다. 이것이 보냄을 받은 자의 속마음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 아버지를 대하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 가족을 대하시기를 원하시니 가족과 마주하겠습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반대로 가족을 대할 때에 의욕이 넘쳐난다면 보냄 받은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자식들을 잘 키워서 기쁨을 얻겠다. 내 자식은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자발성은 보냄 받은 자의 태도일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 살기 싫지만 할 수 없어서 사는 것이 보냄 받은 자입니다. 이 세상을 향한 창조적 생각도 없고 주체적 자발성도 없습니다. 아버지가 뜻을 알려주시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 생활화를 한다고 하면서도 이러한 모습은 쉽게 발견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이 세상 삶에 대해 의욕을 보입니다. 의욕이 있다는 것은 세상 삶에 대해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삶에 대해서 이러한 자발성과 주체성의 끼가 아직 남아있다면 보냄 받은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보냄 받으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좋게 여기신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보냄 받으신 분이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발성을 띠고 추구하고 성취하고 이루기 위하여 달려갈 만한 무엇이 있다면 보냄 받은 자가 아닙니다.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리듯이 미국 가고 싶은 사람에게 발령을 내리는 일이라면 진정한 의미에서 보냄 받은 자의 삶은 아닙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용만을 보자면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함을 최고로 좋은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이 바로 보냄 받은 자의 의식입니다. 이렇게 보면 보냄 받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있기에 “위로부터 거듭난다, 다시 태어난다, 보냄을 받았다”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와 성도의 공통점이 보냄 받음이라면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말씀드렸듯이 사도와 성도는 모두 공히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다만 성도에게는 보냄 받음이 구분됨이고 현지인이 아님으로 드러납니다. 이 세상 토박이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구분됨입니다. 성도가 보냄 받은 자로서 사는 자라면 사도는 모든 사람을 보냄 받은 자가 되게 하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는 평생 하는 일이 만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냄 받은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있는 상태여야만 이 땅에 대해서 보냄 받은 자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편 사도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머물 수 있기 위하여 주님의 십자가에서부터 시작해서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이르는 길을 주야장천 선언하고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에 들어가게 하고, 또한 마음이 유일한 보물이신 하나님께 가서 머물러있게 함으로써 이 세상의 삶이 보냄 받은 자로서 살 수 있게 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냄 받은 자로서의 사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대로 사도는 건강이나 장수를 몰라야 합니다. 사도는 돈을 몰라야 합니다. 사도는 출세나 명예나 인기도 몰라야 합니다. 사도는 이 세상의 성공과 형통이 무엇인지도 몰라야 합니다. 사도는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만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선언하고 선포함으로써 듣는 사람 앞에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사건을 지금의 사건으로 재현시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도가 하는 일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재현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이 십자가 사건 안에 들어와 하늘로 올라가고 세상에서는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
한편 성도는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해봅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면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요셉에게는 보디발 장군의 집이 특정한 삶의 현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이 특정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로서 살았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뜻을 보디발 장군의 집이라는 현장에서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시 감옥이라는 특수한 현장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전달되는 뜻을 따라 보냄 받은 자로서 살아갔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보냄 받은 성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요셉은 구약의 사람이었기에 사도가 없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사도와 성도의 역할을 구분하기 위해서 요셉의 상황을 말해볼 수는 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집에 있든지 감옥에 있든지 총리의 자리에 있든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내려와서 말과 행동을 하는 보냄 받은 자로서 살았습니다. 한편 사도는 사람들이 이렇게 요셉과 같이 보냄 받은 자로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삶의 현장에서든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지는 뜻을 따라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또 다른 예로 스데반 집사님을 들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보면 구약의 모든 신앙의 주인공들이 이미 다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사람들이 기대함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면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기억함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5~56절에서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는 모습을 보면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인자라고 표현한 이유는 모든 인간은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인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구약을 예로 들며 이야기합니다. 이는 곧 구약 속에서도 이미 보좌 우편에 계신 인자를 통해서만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관계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관계한 것도 실제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출현을 기대하는 구절들은 창세기부터 시작됩니다.
정리해봅니다. 성도는 이렇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붙잡고 있는 동안에 이 땅에서는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뜻만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 삶의 자리는 나만의 자리입니다. 성도 각자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는 성도가 보냄 받은 자로서 살 수 있도록 오직 그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유일한 길이신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과 그것을 붙잡고 사는 것만을 입에 담고 이야기하는 자들입니다. 이 하나를 위해서 보냄 받은 자가 사도입니다. 성도는 똑같이 보냄을 받았으나 각 현장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몸을 대신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육체를 가지고 사실 때 하셨던 말 한마디, 행동 하나, 기적 하나 모두가 아버지의 뜻에 의한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담고 계신 성령이 오셔서 하시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보냄 받은 자의 특성입니다. 보냄 받은 자는 하늘에서 보내지는 내용을 받아서 이 땅에서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는 육체로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보냄 받은 자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직장이든 가정이든 나에게만 주어진 삶의 현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현장을 보고 계시고 그 현장에서 이루고 싶으신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받아서 사는 것이 보냄 받은 성도의 삶입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자비와 위로를 언급하는 이유는 보냄 받은 자의 특징과 관련이 있습니다. 보냄 받은 자의 특징은 보내진 현지가 안 좋다는 것입니다. 나의 몸이 있는 곳은 나의 마음이 가 있는 나의 집, 나의 본향, 나의 아버지의 집보다 좋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 현지에서의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비와 위로를 제공해주십니다. 이 세상은 내 마음이 원치 않는 곳입니다. 이 세상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가야 된다는 생각으로 보냄을 받아서 살고 있는 곳입니다. 이렇게 보냄 받아 살아가는 모든 사도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자비와 위로를 제공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름 휴무기간 동안 이미 보았던 팔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위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본문에서 “위로”라고 번역된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는 옆으로 부른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심각한 재정문제에 처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 위로를 한다는 것은 “너는 돈 문제만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도 당하고 있다. 그런데 ‘나’라는 존재는 너의 편이며 너의 아픔을 같이 한다. 너는 내 안에 들어와 숨을 쉬어도 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위로의 하나님이신 이유는 이 세상은 내가 자발적으로 원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계신 것은 마음이 완전히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더라도 마음의 방향을 하늘로 잡은 사람에게도 어려움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하나님이 되어주십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당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 옆에서 말씀해주십니다.
보냄 받은 자의 의식이 분명한 사도와 성도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느낄 수 있도록 위로가 되어주십니다. 환경적으로 당하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있어도 육체가 겪는 어려움이 고통임은 사실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찾아오십니다. 곁으로 부르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내 곁으로 오신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서 내가 하나님 곁으로 가든지, 하나님이 내 곁으로 오셔서 내가 하나님 곁에 있게 되든지 상황은 같습니다.
위로의 하나님이라는 뜻은 이렇게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당하게 되는 환난과 고통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특별히 더 당신의 있음을 강하게 부각시켜 주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지금 당하고 있는 상황보다 하나님의 있음이 더 강렬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알려주십니다. 그 환난은 위로의 하나님에 의해서 무게가 가벼워지고 작아집니다. 의미가 축소되고 우울증으로 발전하지 않게 됩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중에 진정한 친구가 찾아왔을 때 고마움을 느끼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환난이 임했을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당신 자체가 우리에게 위로가 되도록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위로가 되어주실 때 우리는 환난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당신 자신을 위로의 장으로 내어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오직 아버지의 뜻만을 이루고 싶어 하는 보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땅에 사는 기간은 하늘에 머무는 것보다 안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땅을 좋아하는 대신에 하늘을 유일한 좋음으로 느끼고 하늘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보냄 받은 자의 사명은 강해집니다. 땅을 좋아하는 잔재가 남아있으면 남아있을수록 보냄 받은 자는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보냄 받은 자가 아니면 하나님의 위로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정말로 하늘이 좋다면 사도 바울처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싫어지고 빨리 떠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보냄 받은 자의 의식이 커집니다. 싫지만 살아야 되는 우리의 처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위로가 되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싫은 곳에서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세상을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로로 내어주십니다.
아무쪼록 우리도 보냄 받은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고 지금이라도 몸을 떠나고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하늘 아버지 앞에 거하는 것을 좋게 여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럼에도 아직도 나를 통해 이루고 싶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 때문에 이 세상에 어쩔 수 없이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점점 더 커져야 할 것입니다. 보냄 받은 자로서의 모습이 뚜렷이 드러나고 하나님을 위로로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보냄 받은 자의 생각을 갖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만 생각하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마음이 보내지는 곳이 귀하게 여겨지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객관적으로 좋지 않은 곳에 마음을 보냄으로써 착각에 빠져있습니다. 하나님은 객관적으로 유일한 좋으심입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길을 따라 마음을 보내야만 하늘이 점점 더 좋아지고 땅이 점점 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점점 더 보냄 받은 자의 의식은 커지게 됩니다. 그리고 보냄 받은 자의 의식이 커짐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로로 내어주시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나의 위로의 아버지이시고 자비의 아버지이십니다. 이제 이 세상의 어떤 사람과 어떤 사건에서도 위로를 기대하지 않겠습니다. 철저히 보냄 받은 자가 되게 하여 주시고, 매일 매일을 싫은 세상의 삶 속에서 아버지만을 위로로 받으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