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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겉 낡음도 속 새로움만큼 좋은 이유>의 줄거리: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이 구절을 읽다 보면 어감이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겉사람이 낡아지기에 낙심하려다가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짐을 보면서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앞에서 언급한 부활 때문이고 그에 더해서 겉 사람이 낡아지는 것과 속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이 둘 다 낙심하지 않을 이유를 강화한다는 뜻입니다.
겉 낡음도 속 새로움만큼 좋은 이유
(고린도후서 4:16~18)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겉 낡음도 속 새로움만큼 좋은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겉 낡음도 속 새로움만큼 좋은 이유”
본문 말씀은 한 편의 아름다운 시와 같습니다.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언뜻 “겉사람이 낡아지는 것을 보면 낙심할 수 있다. 그러나 속사람은 겉사람과는 반대로 날로 새로워진다. 그러므로 속사람의 새로워짐을 의지하여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뜻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사도 바울이 거울을 보면서 “야, 나도 10년 전보다 많이 늙었구나. 이렇게 늙은 모습을 보니 낙심이 되는구나.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비록 몸은 낡아지고 있지만 나의 속사람인 마음은 날마다 새롭게 되고 있으니 이것을 위안삼아서 낙심하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했다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번역의 부족한 부분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낙심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하니까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을 마치 낙심하지 않아야 될 이유처럼 읽게 됩니다. 그러나 원문을 보면 세 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진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라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세 문장으로 떼어 놓으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앞부분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그러므로”는 앞서 등장한 13~15절에 대한 것입니다. 그중에서 14절을 보면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복음과 연관된 은총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부활의 약속을 받고 있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환난을 만난다고 해서 낙심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하였는데 이 부분에서 “낡아지나”라는 말을 풀어보면 “낡아진다. 그러나”라는 표현입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에게서 진행되는 변화의 양상이 상반됨을 의미합니다. 겉사람은 낡아지고 속사람은 새로워진다는 상반된 두 가지 사실이 모두 다 낙심하지 말아야 될 이유에 덧붙여지고 있습니다. 앞선 말씀들까지 포함해서 구절을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언제든지 죽으면 주님처럼 부활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침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낙심하지 않을 이유를 부활로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이라는 낙심하지 않아야 될 이유에 나의 몸이 늙어가는 것과 나의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을 덧붙여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고 16절 말씀을 풀어보자면 “언제 죽어도 부활할 것이기에 사는 동안에 환난이 주어져도 낙심하지 말라. 겉사람이 낡아지고 있기에 더욱 낙심하지 않으며,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되기에 더더욱 낙심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겉사람이 낡아진다는 표현은 몸이 늙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몸이 늙는 것을 낙심하지 않는 이유로 꼽고 있습니다. 몸이 늙는 것이 다행이고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포함한 사도 바울의 말씀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마음의 낙심거리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점을 모르면 고린도 전후서뿐만 아니라 나머지 모든 사도 바울의 서신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힘듭니다. 여러분의 생각에는 사도 바울이 무엇을 근본적인 낙심거리로 여긴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베드로의 변화산 경험을 통해서 지금도 천국을 가득 메우고 있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빛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천국을 실제 현실로 느끼는 현실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낙심거리는 이 땅에서 산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그 좋은 천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와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천국 현실감이 클수록 낙심이 커질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이런 생각 자체는 우리에게 낯선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사람을 주변에서 본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의 생각 또한 대단히 이상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이 늙어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낙심하게 하는 일이 얼마 안 있어서 끝나겠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땅을 산다는 사실 자체가 낙심거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몸이 늙어가는 것을 좋게 여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변에서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런 일을 낙심거리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천국을 좋게 느끼고 그 좋은 천국의 현실감을 강하게 느끼면 당연히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가장 큰 낙심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질그릇에 십자가 복음이라는 보배를 받아들인 사람으로서 그야말로 영적인 논리대로 이러한 사실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말로는 질그릇인 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보배로 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으로부터 시작되는 영적인 논리를 따라 있어야 될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천국의 현실감을 느낀다면 이 세상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사실은 큰 낙심거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은 낙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나마 위로가 되고 다행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몸은 시간이 갈수록 낡아지고 늙어가고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천국 현실감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처지에서 낙심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가 몸이 낡아가고 있고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곧 끝이 나겠구나!”라는 것을 몸이 알려주니 감사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님이 계신 천국을 떠나와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상황을 더 이상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몸이 늙어가는 것을 보니 곧 끝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나머지 기간 동안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을 열심히 이루다가 떠나자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몸이 늙어간다는 것은 낙심천만한 이 세상의 삶이 끝나리라는 절대적 소망을 주는 긍정적 사인(sign)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18절을 보면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잠깐만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면서 참자는 것입니다. 남은 시간은 어찌 되었든지 하늘 아버지의 뜻을 하나라도 더 이루어드리다가 주님 만나러 천국에 가면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 몸이 늙어가는 것은 큰 소망을 갖게 해주는 하나의 근거이자 긍정적인 사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억지스럽다고 느껴지실 수도 있기에 증거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일날 함께 나눌 본문을 미리 앞당겨서 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2절을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장막 집이란 이 세상에서 내 마음이 입고 있는 육체로 된 몸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 육체로 된 몸을 입고 살아야 되는 상태를 탄식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보다 천국이 더 우선적인 현실인 사람은 지금 내가 이 땅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탄식거리입니다. 탄식과 낙심은 이웃 사촌지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의 탄식이 낙심으로까지 발전되지 않는 이유는 감사하게도 부활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을 통하여 우리의 부활도 약속해주셨습니다. 게다가 너무나 다행인 것은 세상을 살아야 하는 몸은 날마다 낡아지고 늙어가고 있습니다. 그 반대로 속사람인 마음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의 삶은 탄식할 일이지만 낙심으로까지 발전하지 않습니다. 탄식 중에도 소망을 붙잡고 살아갈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이렇게 보자면 우리의 몸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을 살아야 된다는 상황이 점점 더 끝으로 가고 있다는 소망의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이 낡아짐이란 시간의 힘과 권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입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영원히 새로울 수는 없습니다. 시간의 흐름 앞에서 낡아지지 않는 것은 없고 퇴색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지루하고 식상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시간의 힘입니다. 그런데 영원함이란 시간이 없는 차원입니다. 이 영원함 속에서의 새로움이란 시간 속에서 나타난 새로움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 속에서의 새로움은 시간을 따라 퇴색하고 낡아지고 질리고 식상하게 되지만, 영원함 속에서의 새로움은 그 느낌 자체가 끊임없이 새로움으로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간이 없는 영원함의 특징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뵈었다면 하나님의 신선한 좋음이 마음에 와닿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선한 좋음도 시간 속에 있는 것이라면 언젠가는 질리고 물리고 식상하게 되어버릴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는 상황은 축복이 아닌 형벌일 것입니다. 시간 속의 좋음은 어떤 것일지라도 새로움 자체가 낡아지며 퇴색하고 질리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산다면 그것은 영생이 아닌 영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어 갖게 되는 영원한 천국은 시간의 흐름이 없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날마다”라는 표현을 쓸 수도 없겠지만 그럼에도 시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수준에서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해보자면, 하나님의 좋음과 주님의 좋음에 대한 새로움은 날마다 매분 매초마다 사그라들지 않고 퇴색하지 않도록 지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의 속성입니다.
다시 16절을 보면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몸이라는 질그릇 안에 내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자아의식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배로 담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영원함과 연결됩니다. 이 영원함의 속성이란 퇴색하지 않고 사그라들지 않는 새로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마음은 연결됨을 통하여 영원의 속성을 따라 날마다 새롭게 됩니다. 우리가 아직은 이 시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날마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아무리 새롭다고 하더라도 날마다 낡아집니다. 그런데 질그릇인 몸 안에 보배이신 십자가 예수님을 담고 나니 내 마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따라 하늘의 영원함과 연결됩니다. 날마다 낡아지고 있는 몸의 상황과는 다르게 마음은 영원과 연결되어서 날마다 새로워지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사람인 마음이 겉사람인 몸에 붙어있는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자아의식은 몸의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몸이 늙어가면 자아의식도 늙어갑니다. “나는 늙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배로 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영원함과 연결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늙음이나 낡음이 인식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새로움의 양상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라고 하였습니다. 영원함에 연결이 된 사람은 이 세상에서 몸으로 만나게 되는 환난이나 고통 혹은 과제나 업무를 비롯한 모든 것들이 점점 더 마음에서 가볍게 느껴지게 됩니다. 이것이 영원함에서 나타나는 새로움입니다. 자꾸 세상이 가벼워집니다. 그 의미도 가벼워지고 그 좋음도 가벼워지고 어려움이 있어도 가볍게 느껴집니다. 세상의 비중이 점점 더 작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7절의 하반부를 보면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영원한 영광이 무겁고 크게 느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워짐이란 천국의 현실감은 점점 더 커지고 이 세상의 현실감은 점점 더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내 마음의 관심은 자꾸 이 세상을 떠나 천국 쪽으로 옮겨가서 보이지 않는 새로움을 관심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눈에 보이는 것 전체가 마음에서는 보이지 않게 됩니다. 마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만을 보고 눈에 보이는 것은 보지 않게 되는 이상한 변화가 바로 새로움입니다.
영원함 속에서 발생하는 새로움은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처음 느꼈던 새로움이 계속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속성을 가진 영원함과 연결이 되면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의미가 점점 더 가벼워지게 됩니다. 이상하게 내 눈이 무엇을 보고 있어도 내 마음으로는 보지 않게 됩니다. 내 마음은 내 눈이 못 보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내 인격에서 전방위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활성화됩니다. 생각하는 방식과 감정이 움직이는 이유와 의지가 발동되는 양상이 완전히 새롭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말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현재 상황을 대하는 관점과 가치관과 태도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모든 거짓으로부터 자유함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 강박으로부터도 압박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게 됩니다. 이사야서 40장 31절을 보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은 내 마음이 영원함에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결되면 영원의 속성인 새로움이 나타나게 됩니다. 죽지 않는 새로움, 사그라들지 않는 새로움, 퇴색하거나 질리고 물리고 식상하지 않는 새로움, 영원토록 지속되는 새로움이 우리의 마음과 연결이 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도 몸을 입고 살았을 때의 마음 상태와 비교해서 너무너무 달라집니다.
아무쪼록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이라는 보배가 담겨야만 합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 십자가 예수님을 보배로 담을 수 있습니다. 영원과 연결되어 날마다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을 여러분 스스로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마음이 새로워지는 자에게는 삶에 대한 관점도 바뀌게 됩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 무한한 은총으로 느껴지듯이 몸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 또한 무한한 은총으로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게 된 뒤로 이 세상을 살고 있다는 상황이 탄식거리이자 낙심거리가 될 수 없다면 우리의 믿음을 근본부터 뒤집어서 새롭게 시작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몸이 낡아지는 것은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만큼이나 기쁜 일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몸이 늙어도 좋고 마음이 새로워져서 좋고 이렇게 좋은 일로만 이 세상에서의 여생을 가득 채우며 살다가 주님 부르실 때 기쁨으로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