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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거짓을 탈출하려면 소원을 바꾸자>의 줄거리: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를 경계하며 참과 거짓의 분별을 명확히 하기를 바라는 사도 바울의 논의가 계속됩니다. 본문은 참과 거짓의 뿌리를 들추어내어 우리 눈앞에 보여주십니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의 참과 거짓은 모두가 그 사람 속에 있는 뿌리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모조리 참이거나 모조리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이 뿌리를 사도 바울은 바로 소망이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소망하느냐에 따라 겉으로 나타나는 모든 말과 행동의 참과 거짓이 결정된다는 겁니다.
거짓을 탈출하려면 소원을 바꾸자
(고린도후서 5:1~10)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거짓을 탈출하려면 소원을 바꾸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거짓을 탈출하려면 소원을 바꾸자”
본문을 읽을 때 염두에 두면 도움이 될 수 있는 요소가 있습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거짓 사도와 연관해서 자신의 사도권의 정당성과 참됨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하는 중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거짓 사도를 구분하여 미혹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기 위한 신앙적 기준을 계속해서 논의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은 다소 특이합니다. 참과 거짓에 대한 내용을 말씀하시는 중에 갑자기 천국 소망이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만 천국 소망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본문의 근본 주제는 여전히 참과 거짓의 구분입니다. 우리는 이 두 주제가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살펴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소망의 문제를 통해서 참과 거짓의 근본적 뿌리를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참과 거짓의 근본적 정체는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위로는 알아볼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거짓말로 보이는 일이 실은 진실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진실로 보이는 일이 실은 거짓말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다 진실이었으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다 거짓말로 받아들였습니다. 또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으나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는 말을 진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참과 거짓의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에서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올바르게 보이는 행동을 할지라도 거짓이고 가식이고 위선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참과 거짓의 정체를 분별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의 마음속 소망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소원하고 있는지가 생각과 말과 행동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결정합니다. 소망이 잘못되면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이 아무리 아름답고 올바르게 보일지라도 실상은 거짓입니다. 소망은 말과 행동의 뿌리입니다. 그 소망이 잘못되었다면 말과 행동은 어떻게 보이고 들리든지 무조건 다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말과 행동은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소망을 알기 전까지는 어떤 말은 옳고 어떤 말은 그르다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참과 거짓은 오로지 소망이라는 인격의 한 뿌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거짓이면 거짓이고 참이면 참입니다.
본문 8절은 제가 참 많이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원하는 바는 곧 소망입니다. 소망의 문제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9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 하였습니다. 소망에서 비롯된 제2의 소망의 문제가 나오고 있습니다. 또 이어지는 10절을 보면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소망의 문제로 인해서 참과 거짓이 판가름 날 것이라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소망과 참과 거짓의 구분이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늘을 소망하였습니다. 몸을 떠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시는 주와 함께 있기를 소망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 현실감에 대해서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천국 현실감만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진실하게 해주는 내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말과 행동을 하는 자들은 심판대 앞에 설 때 참됨이 드러나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천국이 아닌 다른 소망을 가지고 말과 행동을 했다면 심판대 앞에서 다 거짓으로 판명이 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차라리 몸을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이 세상에서 이루고 싶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망이 우리 속에서도 유지되고 있는 중이라면 그때 하게 되는 모든 말과 행동은 다 거짓입니다. 세상을 떠나고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소망이 있을 때 이 땅에서는 내가 나를 위해 갖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내가 나를 위해 발동되는 소망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로부터 생겨나는 일이 있습니다. 오직 주님과 함께 있고 싶다는 첫 번째 소망을 가질 때 이 세상에서 오직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고 싶다는 두 번째 세상살이에 대한 소망이 나타나게 됩니다. 몸을 떠나 세상을 떠나 천국에 계신 주님과 함께 있고 싶다는 소망을 가질 때, 이 땅에서는 오직 주님이 기뻐하실 일만 하고 싶다는 바람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바람이 있고 나서야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올바를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삶에 돈 문제, 건강 문제, 가족 문제 같은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은 문제가 해결되기를 소원합니다. 돈 문제가 해결되고, 건강이 회복되고, 가족의 문제가 잘 풀리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원을 갖고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다 거짓된 것입니다. 거짓된 생각, 거짓된 말, 거짓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참과 거짓의 문제가 중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분들 중에 십자가 생활화가 정체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마지막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 것 같다고 느끼시거나, 같은 자리에서 맴돌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분들이 계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아직도 거짓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복음에 담겨있는 모든 은혜와 구원과 축복의 약속은 오직 거짓으로부터 탈출한 상태에서만 실제로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믿는다고 하고 십자가를 붙잡고 애를 쓰는데도 실제로 평강이 없고, 항상 기쁨이 없고, 쉬지 않는 기도가 없고, 범사에 감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여전히 내 속에 거짓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거짓이 남아있는 한 복음으로 인해서 주어지는 구원이 가져오는 실제 기쁨과 만족과 평강은 누릴 수 없습니다. 물론 거짓이 유지되고 있는 상태에서도 일시적인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의 상태이기에 이러한 상태에서 느끼는 기쁨과 만족과 평강은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실제 삶의 현장에서 이 거짓의 문제는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십자가 복음이 약속해 주는 구원과 은총과 축복을 누리며 항상 기쁨과 쉬지 않는 하늘과의 연결인 기도와 범사에 감사함이 이루어지는 복지를 살고 싶으시다면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거짓이 없으려면 소망이 바뀌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7절까지 계속해서 주님과 함께 있고 싶다는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1절을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장막 집이란 마음이 육체에 머물고 있음을 집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집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재료로 만들어진 영원한 몸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심을 통해 우리의 부활 때도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이 육체를 벗고 이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될 때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이름에 맞게 할당된 영원한 빛의 옷이 준비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거짓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소망에 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하는 이유는 바로 소망이 무엇이냐에 따라 참과 거짓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제각각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이유는 소망 때문입니다. 각자가 마음속에 갖고 있는 소망의 내용이 다르기에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무엇을 소원하고 있느냐가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결정합니다. 예를 들어 돈을 소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 중에는 참된 것도 있고 거짓된 것도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소망의 대상이 잘못되었기에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도 모른 채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거짓 속에는 참 기쁨과 만족과 평강은 주어질 수 없습니다.
저는 한 아들의 아버지입니다. 제가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바라는 한 가지를 이야기한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만 “하나뿐인 아들이 거짓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바란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제가 뼈저리게 경험하고 확신하는 바가 하나 있습니다. 거짓이 우리 속에 있는 한 하나님이 주시려는 축복과 은혜가 아무리 많을지라도 단 하나도 주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하늘을 소망하라는 말을 하기보다는 참과 거짓의 기준을 명확하게 알아야만 합니다. 왜 참이고 왜 거짓인가를 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소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소망의 내용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천국 보좌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리고 아버지 우편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사도 바울이 가진 소망은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신 천국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천국에 대해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사도행전 1장 9절을 보면 예수님의 승천을 묘사하며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오해하여 천국을 공간적 이동이 가능한 장소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과 천국은 차원이 다른 곳입니다. 천국은 4차원 세계로 내 마음에 대해 내 몸보다도 가까이 있는 곳입니다. 몸보다 가까우니 천국은 마음에서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가까운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내 가족보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보다, 그 어떤 것보다도 내 마음에 가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있으심, 유일한 좋으심, 유일한 주권자 되심의 세 가지 속성을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와 보좌 우편에 주님이 계십니다. 이러한 천국의 상황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7절을 보면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천국에서 비껴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공무원이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뇌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마음이 비껴가서 마치 부정부패를 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것이 마음에서 비껴감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천국입니다. 마음은 이 천국의 있음에서 비껴갈 수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마치 천국이 없다는 듯이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도 없다는 듯이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이 못 봤다고 해서 부정부패한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비껴가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부정부패했다는 사실에 닿아 있다면 전혀 다른 말과 행동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자신의 부정부패를 고백하고 죗값을 치러야만 마음이 편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비껴가고 외면함으로써 거짓된 말과 행동이 나오게 됩니다.
천국과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의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4차원에 천국이 있으며 그 천국에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마음이 비껴가고 외면합니다. 그래서 마치 천국과 하나님과 예수님이 내 마음 가장 가까이에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상태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이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곳이라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천국이라는 사실을 비껴가지 않고 마음이 반응하면 천국의 기운이 마음에 전달됩니다. 천국의 기운이 전달될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일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탄식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음이 탄식이 될 정도로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천국을 비껴가지 않고 우회하지 않고 정직하게 반응하면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는 거짓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더 많이 가지게 하십니다. 천국 현실감을 더 커지게 하십니다. 내가 입고 살게 될 영원한 빛으로 만든 옷에 대한 확신을 더해 주십니다. 본문을 보면 “담대하여”라는 말이 두 번 나오며 강조되듯이 이 세상에서 육체의 죽음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오직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 기뻐하실 뜻만 이루도록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천국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몸으로 만나는 세상 것들에 대해서만 반응하려 한다면 참됨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일에 대해서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라고 소원하고, 세상에서 나쁘다고 여겨지는 일에 대해서 “나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소원을 갖습니다. 천국에 대해 반응할 수 없다면 나도 모르게 이러한 소원이 자동적으로 생깁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아담의 체질을 원죄로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세상의 일들을 대하자마자 마음에서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 판단의 결과는 소원으로 나타납니다. 좋은 일에 대해서는 더 가졌으면 좋겠고 유지되었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갖게 되고, 나쁜 일에 대해서는 없어졌으면 좋겠고 빨리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갖게 됩니다. 그런 소원을 가지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마음은 거짓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거짓으로 빠져드는 한 십자가 복음이 약속하는 어떤 은혜와 축복도 실제로 받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와 있는 천국과 하나님과 예수님의 있음이라는 현실을 회피한 상태는 이미 거짓에 빠진 상태이고 거짓이 유지되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무엇을 원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든지 그것들은 모두 거짓이 됩니다. 어떠한 은혜도 실질적으로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아직도 우리 속에 거짓이 있다면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들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탄식은 가장 가까이 있는 천국에 대한 가장 정직한 반응입니다. 천국을 현실로 받아들였다면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해야 마땅합니다. 천국과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고 싶어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자체가 거짓말이고 가식이고 위선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모습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놓지 않는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십자가 예수님이 아니면 내 마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천국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수 없다면 천국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시는 주님을 회피하고 우회하고 외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아담의 유전 죄입니다. 이러한 유전 죄에서 벗어나게 하시고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붙잡게 하십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소원이 사도 바울처럼 몸을 떠나고 세상을 떠나서 승천하신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본문 6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예수님과의 연합을 이야기해왔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빼고 나면 로마서나 고린도 전후서를 비롯한 모든 서신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의 핵심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그렇다면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영원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의 소원은 이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영원의 세계와 연결되는 것을 넘어서 영원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살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렇기에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몸이 있는 동안에는 그리스도와 따로 있을 수밖에 없기에 그리스도와 연합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소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질 때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천국을 주목하게 됩니다. 천국을 주목하는 시간이 길어져야 천국의 현실감이 커질 수 있습니다. 천국의 현실감이 커지면 천국에 들어가서 살고 싶은 소망도 자꾸 커지게 됩니다. 이 소망이 커지면서 여러분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는 거짓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약속된 모든 축복과 은혜와 평강이 실제로 느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세상에 사는 것을 탄식거리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의 평강은 커지는 이상한 상태가 주어지게 됩니다. 세상에 사는 것이 탄식거리인 이유는 천국 현실감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천국 현실감이 커지고 천국에 들어가 살고 싶은 소망이 커질수록 세상에서 사는 것에 대한 탄식도 커지게 됩니다. 동시에 여러분 마음속에는 평강이 바위처럼 임할 것입니다. 이렇게 모순되어 보이는 은총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며 주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임을 고백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천국 현실감이 커지고 천국 소망이 커짐에 따라 우리에게서 거짓이 사라지게 하시고, 그리하여 약속하신 축복을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