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에 미쳐야 비로소 온전한 사람>의 줄거리:
사도 바울에 관한 모든 정보를 종합하여 평가한 뒤 거짓 사도들은 사도 바울이 미친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린 듯합니다. 즉 열광주의에 빠진 광신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미친 사람으로 보이게 한 그 이유를 사도 바울은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주된 원인이 무엇일까요? 십자가에서 천국에 이르는 과정을 늘 보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십자가에 미쳐야 비로소 온전한 사람
(고린도후서 5:11~17)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에 미쳐야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에 미쳐야 비로소 온전한 사람”
본문의 마지막 절인 17절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너무 멋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13절을 보면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본문에는 “새로운 피조물”과 “미친 사람”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개의 극단적 표현이 동시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이 나온 것으로 볼 때 아마도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들에 의해서 미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사도 바울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그는 열광주의에 빠진 광신자다.”라고 취급했을 것입니다. 이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을 보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얼마든지 광신자의 말처럼 들릴 수 있었고, 사도 바울이 십자가 생활화를 철저하게 하는 모습이 거짓 사도들에게는 미친 사람의 행동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서 보았던 4장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는 삶을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하도 십자가 이야기를 많이 하고 듣고 있으니까 이 말이 자연스럽게 보입니다만 사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미친 소리입니다. 세간에 영혼결혼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과 결혼을 한다니 저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하는 소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영혼결혼식 같은 소리로 들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최고의 보배로 삼아서 내 몸에 담고 다니는 질그릇의 삶을 산다고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철저한 십자가 생활화의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혀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거나 십자가를 생활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얼마든지 광신자처럼 보이고 이성을 상실한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철저한 십자가 생활화의 결과는 살아계신 조물주 하나님의 유일한 좋으심을 마음이 느끼게 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그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의 현실감이 이 세상 현실감보다 더 큰 상태가 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세상은 천국에 비하면 어떤 면을 보아도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을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 상태가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지금 천국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치고,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에 빠져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그리워하다 보니 이 세상에서도 예수님이 기뻐하실 일만을 염두에 두게 됩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란 내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서 하나님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또 직면하게 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을 이루면서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예수님을 보배로 담은 질그릇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배로 담지 못한 질그릇의 사람,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지 못하는 사람이 볼 때는 이런 모습은 광신자의 모습이고 미친 사람의 모습입니다.
다시 13절을 보면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내가 정신이 온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닌 너희를 위해서 하는 이야기이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것이 결코 세상 사람들 눈에는 쉽고 자연스럽고 친화적이지 않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미쳤다고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 온전함을 주장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을 어떻게 보든지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미치지 않고 온전하다 주장한 이유는 바로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실제로는 온전하지만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결코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한편 본문 16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17절의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 말씀을 연결시켜 보자면 육신을 따라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을 알아볼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기에 16절에서 “이제부터는”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대표하시는 가운데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알게 된 이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대표자로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대표하심 속에는 나의 죽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 개인은 예수님의 죽음이 나 때문에 일어난 사건임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이제부터 사람을 볼 때 육신을 따라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서 그 사람을 인식할 때 육신에 관련된 일을 함께 인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육신의 관련성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남녀노소라는 말은 남자와 여자, 늙음과 젊음으로 육신의 관련성을 드러낸 표현입니다. 이외에도 입고 있는 옷이 어떤지, 출신이나 집안이 어떤지, 현재 신분이나 사회적 위치, 외모의 준수함을 육신의 관련성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이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실 때 사람들은 육신의 기준을 통해 예수님을 이해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이나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라는 그리스도의 연쇄 과정을 모를 때는 오직 예수님의 육체에 따라붙은 관련성들을 근거로 예수님을 이해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는 그러한 육신의 관련성을 통해서는 예수님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천국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과정 속에 계신 예수님을 보배로 압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을 보배로 질그릇에 가졌다고 하였고,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실제로 만나서 연합할 수 있는 예수님은 공생애 때 기적을 일으키시던 예수님이 아닌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아무리 공생애 때의 예수님을 보고 연구해도 그 예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16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할 때 안다는 것은 남녀 사이의 체험적 앎을 뜻하는 히브리어의 야다(ידע)와 같은 표현입니다. 우리가 체험적으로 아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까지 이르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에 계신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을 알 때 예수님과의 실질적 만남과 연합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 끝에 서 있는 경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을 통과하여 부활하시고 하늘에 이르신 과정은 육체로 살고 있는 세상 바깥에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십자가를 생활화한다는 것은 곧 이 세상 바깥에서 일어난 일을 내가 나에게 붙이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바깥에서 예수님과 하나 됨으로써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 아버지를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과 유일한 주체성으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아버지가 계신 천국이 눈에 보이는 세상보다 더 우선적인 현실임을 느끼게 되고 하나님 아버지와 내 마음이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직면하시고, 나의 마음이 아버지를 직면하는 동안에 이 땅에서 내 몸으로 움직이는 삶은 보냄 받은 자로서의 삶이 됩니다. 이러한 일들은 오직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간 상태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람을 볼 때는 눈에 보이는 대로 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육체이기 때문에 육체와 관련된 일들을 통해 판단하고자 합니다. 남자와 여자, 늙음과 젊음, 집안과 출신은 어떠하고,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외모를 가졌느냐, 어떤 신분이냐를 보고자 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육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세상 안에서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따라 사람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사람은 사람을 보는 기준이 달라집니다. 세상에는 딱 두 가지 사람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의 끝자리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무덤을 통해 세상을 빠져나가시고 부활 승천하여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 안에 마음이 머물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마음이 세상 바깥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에 들어있는가 아닌가를 보게 됩니다. 이러한 기준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느냐 혹은 이전의 피조물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느냐가 결정됩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전의 피조물인 상태가 유지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볼 때의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사람을 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지 않은 11절을 보면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두려우심을 앎이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세상 끝인 십자가에서 보좌 우편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일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9~10절을 보면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하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몸으로 행한 것이란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행동을 말합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믿느냐 안 믿느냐는 마음이 십자가에서 보좌 우편까지 이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느냐 아니면 여전히 십자가를 넘지 못하고 세상에 머물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십자가에서 보좌 우편까지의 과정 속에 계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넘어서 세상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머물고 있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을 가질 때는 눈에 보이는 차원에서 나타나는 행동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행동은 믿음의 증거입니다. 이 세상에서 몸을 움직여 나타나는 행위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혹은 믿음이 잘되었느냐 잘못되었느냐를 판가름해 주는 증거이며 표시가 됩니다.
그러므로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한 것은 행위가 구원을 결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행위를 증거로 삼아 믿음의 유무를 판단하시리라는 뜻입니다.
내가 아무리 믿는다고 해도 마음이 실제로 십자가에서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과정 속에 들어가 있지 않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에서 나타난 행동이 아니라면 아무리 목사라고 하고 장로라고 해도 예수님께서는 “너는 믿음이 없는 자”라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행위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십자가에서 천국까지의 과정 속에 계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을 볼 때 기준이 달라집니다. 육체의 관련성이 아닌 새로운 피조물이냐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느냐를 기준으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십자가에서 천국까지의 과정이 마음에 붙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1절에서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보좌 우편까지의 과정이 마음에 붙어있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강하게 권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과 하나가 될 수 없다면 믿음의 증거로서의 행동은 나타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보좌 우편까지 이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마음은 하나님과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의 현실감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세상의 현실감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 좋은 천국의 현실감 때문에 이 세상을 꾸역꾸역 마지못해 살아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아버지께서 이 땅에 대해 갖고 계신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보좌 우편까지 이르신 예수님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일이 없는 사람이 볼 때 이 모습은 참으로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광신자처럼 지독하게 비이성적으로 믿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을 가장 불행한 것으로 느낄 만큼 천국을 극도로 좋은 현실로 느끼며 사셨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 바울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내용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능한 한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좋은 것이라 여기는 마음 상태를 가지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성경의 내용과는 너무나 다른 상태이기에 성경이 담고 있는 진정한 의미가 다가올 수 없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십자가에서 천국에 이르신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내게 붙어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 붙어있고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보배로 삼아 내 몸인 질그릇에 담고 다니는 사람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짊어지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아니면 성경을 이해할 수조차 없습니다.
말씀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붙이고 다니고, 보유하고 있고, 보배로 담고 있고,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과 행동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빠져나가시면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 마음을 둔 사람들은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들 수 없는 것처럼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도 어떤 것도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직시하고 하나님만을 좋음으로 느낍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을 유일한 현실로 느낍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마지못해 꾸역꾸역 살 수밖에 없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영원 속에서 살고 싶은 그리움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일만을 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상태로부터 행동이 나타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행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직면하고, 하나님과 천국을 현실로 느끼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고, 하나님의 뜻만 이루고 싶어 함으로써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이 모든 과정이 하나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행동만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눈을 씻고 봐도 자기 자신을 위하는 말과 행동이 조금도 보이지 않기에 이것을 무척 이상하게 여깁니다. 이것을 좋거나 이타적으로 보지 않고 자기를 상실한 것으로 봅니다. 간단히 말해 미쳤다고 보는 것입니다.
미친 사람의 특징은 자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르는 사람을 보니 마치 미친 사람처럼 이 세상 속에서 자기가 없습니다. 이타적(利他的)이라서 자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타적인 사람이 타인의 이득을 위하여 움직이는 상태라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르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과 하나님의 기쁨만을 위해서 움직이는 이신적(利神的)인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을 위해 움직인 결과가 모조리 이타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타적인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신적인 마음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신적으로 사는 모든 사람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타인을 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현실로 느끼고 하나님을 직면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더 좋은 일이나 더 만족하는 일이나 더 채울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는 자기를 위한 일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통해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천국에 이르는 과정 속에 마음이 머무는 동안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르지 않는다면 알 수 없습니다.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십자가를 보배로 질그릇에 담고 다니는 삶을 살지 않고,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이러한 삶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직면한다는 의미도 모르고, 천국을 현실로 느껴야 한다는 것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이 세상을 마지못해 살아야 될 유일한 이유라는 것도 모릅니다. 몸을 떠나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다는 그리움도 생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서 생겨나는 어떤 일도 모르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천국까지 이르신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에 머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자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볼 때는 이 모습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이 된 상태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볼 때는 육체의 연관성을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천국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유하고 있느냐 아니냐가 사람을 보는 기준이 됩니다. 육신의 상태, 신분이나 위치, 외모 같은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것은 잠시 있다 없어지는 빈껍데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에 있느냐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인지 아닌지를 결정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 볼 때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가는 곳마다 십자가만 이야기하니 마치 자기 혼자 십자가를 아는 척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향하여 “십자가 이야기 좀 그만 하세요.”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십자가 생활화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주님을 보배로 질그릇에 담고 다니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는 삶을 통하여 온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이 세상을 살게 하시고, 그렇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분별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만남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