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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2

녹취문: 불신자와 마음 단절한 채 같이 사는 법_태승철 (고린도후서 6:11~7: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10.15|조회수51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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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불신자와 마음 단절한 채 같이 사는 법>의 줄거리:

하나님과의 화목을 말씀하시면서 그 연장 선상에서 하나님과 화목해야 할 성도간의 화목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다가 돌연 절대로 마음을 열어 함께하면 안 될 단절의 대상을 언급하십니다. 불신자와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해야 할 교인이 불신자와 함께 하는 것을 그리스도와 귀신의 왕 벨리알이 함께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까지 하시면서 경계하십니다. 그러나 불신자와 몸으로 만남이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단 하루라도 살 수 있을까요?

 

불신자와 마음 단절한 채 같이 사는 법

(고린도후서 6:11~7:4)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오늘 말씀 중심으로 <불신자와 마음 단절한 채 같이 사는 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불신자와 마음 단절한 채 같이 사는 법”

오늘 말씀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권유에 이어지는 맥락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권유는 화목함의 교리에 대하여 기억하라는 뜻이 아니라 실제 삶의 현장인 가정이나 직장에서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의 화목함을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신분과 위치와 역할을 수행할 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과 호흡을 맞출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해야 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몸이 처하게 되는 상황과 환경과 조건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생사화복의 주권자로서 내 삶의 모든 순간과 삶의 현장을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의 주관적인 판단과 생각과 느낌과 감정과 의지에 따라 주권적인 계획을 변경시켜야 될 필요를 느끼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과 느낌을 주장한다면 하나님과의 화목함을 더 이상 원치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간단히 말해 나의 주관이란 하나님과의 화목함을 깨뜨리는 일입니다. 이는 마치 나라의 주권자인 임금 앞에서 일개 신하가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이 둘이 있을 수 없듯이 내 삶의 현장에서 주권자는 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화목하며 호흡을 맞추어서 이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내 몸이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일임을 믿고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으로부터 오늘 말씀이 이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화목의 연장선상에서 하나님과 화목하는 성도간의 화목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지하려 할 때 똑같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지하려는 성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성도 간에 화목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읽지 않은 6장 11~13절과 7장 2~4절까지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지한 채로 다른 사람과도 화목하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이러한 사도 바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12절에서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이 좁아진 이유로 거짓 사도들에게 현혹되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11절에서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입이 열렸다는 것은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가장 소중한 것들을 조금도 아끼거나 주저함 없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 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넓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에 초청받은 자들을 마음에 받아들임에 있어서 아무런 거리낌이나 거부반응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렇듯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입이 열리고 마음이 넓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을 거절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도 바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화목에 관한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하나님과 화목하려는 자가 하나님과 화목하려는 다른 성도를 만날 때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려는 자는 하나님이라는 사탕을 싸고 있는 껍질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하려는 성도가 서로 만날 때는 상대방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내 속에 계시는 하나님과 같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한 성도와의 화목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시켜 주고 화목함을 더하게 해줍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화목한 채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갔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마음을 열고 사도 바울을 받아들였다면 이들은 사도 바울이라는 인격의 껍질 안에 들어계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 각자가 하나님과 화목함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또 각자가 맺고 있던 하나님과의 관계도 조력을 받아 더 강화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에 대해 마음을 닫았고 이러한 일은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라는 인격의 껍질 안에 하나님이라는 맛있는 사탕이 들어있음을 알지 못한 채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나타났던 이유는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추구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는 바로 거짓 사도들의 현혹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14절에 이르러 주제의 내용이 180도 바뀌어 화목이 아닌 단절과 절연에 대한 말씀이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까지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지하기 위해서 몸이 만나는 상황과 환경과 조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하나님과 화목을 유지하려는 성도를 만날 때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지하기 위한 길입니다. 그런데 돌연 단절과 절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대체 무엇을 끊어내라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거짓 사도들이 들어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결과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이라는 사탕을 싸고 있는 껍질과도 같은 사도 바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모든 불신자와의 관계를 마음에서 단절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4~16절을 보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의와 불법, 빛과 어둠, 그리스도와 벨리알,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라는 다양한 상반된 대상이 쌍을 이루어 반복하여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벨리알은 히브리어에서 귀신의 왕인 사탄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쌍을 이루고 있는 단어는 각각 타협이 있을 수 없는 조합입니다. 의와 불법이 타협할 수 없고, 빛과 어둠이 타협할 수 없습니다. 각자가 자기의 존립을 위하여 치열하게 싸워야만 하는 관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관계를 쌍으로 묶어서 단절과 절연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지하려면 불신자와는 마음의 단절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린도 교회에 거짓 사도들이 들어와서 나쁜 영향을 뿜어대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들과 단절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의 사도인 바울을 마땅히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사도들을 단절할 수 없었기에 거꾸로 사도 바울을 거절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과의 화목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불신자와 만나고 함께 할 때는 불신자로부터 들어오는 기운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화목은 반드시 깨어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삶의 현장에서 화목하기 위해서는 불신자와 단절해야만 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화목함은 그 자체가 목적이나 율법이 될 수 없습니다. 선민이나 교인은 화목함이라는 덕목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며 유일하게 하나님과의 화목함만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성도 간에 화목함도 추구할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과의 화목함을 추구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갖는 관계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더라도 실제로 하나님과의 화목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는 성도가 아닙니다. 불신자와 똑같기 때문에 단절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단절하지 않으면 반드시 불신자들에 의한 영향을 받게 됩니다. 내 속에서 유지되어야만 하는 하나님과의 화목함, 하나님과 함께 일함, 하나님과의 호흡을 맞추기가 불가능해집니다.

 

우리는 몸이 처한 환경과 조건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마음을 활짝 열고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전제로 해서 성도 간에 하나님과의 화목을 믿고 확인하며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화목이 율법이나 절대적인 원칙이 될 수는 없습니다. 화목함은 하나님 한 분이라는 특정 대상만을 위한 일입니다. 성도 간에 화목도 하나님 한 분을 향한 화목이 전제될 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대상들, 하나님의 화목을 깨뜨리는 대상들에 대해서는 있는 힘을 다해서 싸우고 단절하고 반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 추구는 오직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을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따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이 점을 항상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귀신의 왕 벨리알과 한 팀이 되는 것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끔찍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는 그 대상이 가족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족 구성원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짊어지려 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가족 구성원들은 마음에서 끊어내야만 하는 불신자입니다. 믿음을 통해 얻게 되는 모든 은혜와 구원은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이라면 입으로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여도 믿는 사람이 아닌 불신자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조차 부르지 않는다면 마음에서 끊어내야 할 대상임은 분명합니다. 설령 그들이 나의 아내이고 남편이고 형제이고 친척이나 친구일지라도 불신자와는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과 함께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귀신의 왕과 함께하는 것과 똑같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정도로 불가능한 일이고 그 정도로 끔찍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내 몸으로 불신자와 만남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도 불신자가 있고 하다못해 물건을 사기 위해 슈퍼마켓에 가도 불신자와 마주해야만 합니다. 실질적으로 우리는 불신자와의 만남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하였고, 불신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함께하는 것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던 사도 바울의 권유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선 확인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과 화목하기에 실패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거짓 사도들이 끼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거짓 사도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거짓된 이 세상의 기운을 쐬었고 그 기운이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도 바울의 권유를 어떻게 지킬 수 있느냐에 대한 대답을 실질적으로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몸으로 불신자를 만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장 13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고 말씀하셨고, 또 14~16절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불신자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함께 살아야 하며 그들 속에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어떤 의미에서 불신자들과 함께하지 말라고 하였던 것일까요? 이것은 몸으로 같은 공간에 있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이 불신자들과 함께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몸이 불신자와 함께한다고 해서 마음을 열고 그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14절의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추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짊어지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마음을 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한 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불신자들 앞에서도 나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 상태에서 나의 마음은 불신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닫혀야만 합니다. 그리고 오직 나의 마음은 예수님 안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만을 향해서 열려야만 합니다. 하늘과 연결된 상태에서 하늘을 받아들이면 불신자들 앞에서 하늘을 뿜어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늘을 뿜어내면 어떤 불신자와 함께하더라도 그들로부터 오는 기운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내가 하늘로 온전히 차 있지 못하고 하늘의 기운으로 팽창되어 있지 못하고 하늘의 기운을 바깥으로 뿜어낼 수 없다면 고린도 교인들과 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 사도들의 내뿜는 기운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들어왔던 것처럼, 마음을 열자마자 불신자들이 내뿜는 세상의 기운이 내 안에 훅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여지없이 하나님과의 화목은 중단되고 하나님은 더 이상 내 안에 계실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지하기 위해서 중요한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 몸이 처한 환경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의 인정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은 유지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한 내용을 지난 시간에 자세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7장 1절을 보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라고 하였습니다. 더러운 것이란 하나님 이외의 것들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상관하거나 접촉하게 되면 내 마음은 더러워지고 동시에 하나님과의 화목은 깨어지고 맙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의 인격이 하나님이라는 사탕의 껍질이라면, 불신자의 인격은 세상이라는 사탕의 껍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에 불신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껍질 속에 있는 세상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마음은 더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돈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면 내 마음에도 돈이 들어옵니다. 마음이 더러워진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화목이 유지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일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우리 인격은 하나님이라는 사탕을 싼 껍질로써의 성전인 것입니다. 이것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절대로 세상의 불신자들에게 마음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몸은 같이 있을지라도 마음은 닫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십자가를 기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불신자와 대화하고 함께 일을 할 때 잠시도 십자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불신자의 인격의 껍질 안에 들어있는 세상이라는 사탕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게 됩니다. 세상의 사탕도 달콤하고 맛있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단맛에 빠져버리면 곧바로 마음은 더러워지게 됩니다.

 

정리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 번째는 내 몸이 처한 상황과 환경이라는 조건에 대해서 무조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과의 화목은 깨어집니다. 주어진 상황과 환경에 대해서 나의 판단과 생각과 주장을 갖기 시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기에 곧바로 하나님과의 화목은 깨어지고 맙니다.

 

두 번째는 절대로 마음이 더러워져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더러워진다는 것은 마음에 하나님 이외의 세상 것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으로 세상의 기운과 더러움이 들어오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모르는 세상과 화목한 자들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와 만날 때 그들과 함께 멍에를 메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이 같은 직장에 있고 같은 가정에 있을지라도 절대로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잊지 않아야 마음을 세상과 단절시킬 수 있습니다.

 

마음이 영원과 연결됨으로 천국 기운으로 팽배해지게 되고, 말과 행동을 통하여 천국 기운을 뿜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천국 기운을 뿜어내는 동안에만 세상 기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화목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성전이 되어야 하는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불신자들을 만날 것입니다. 불신자에게 마음을 닫고 함께 사는 법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불신자들 사이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고 하늘의 기운을 뿜어내는 요람이 되고 샘물이 되고 본거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보배로 담은 질그릇이자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마음속에 채워지는 하늘의 기운을 뿜어내며 불신자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하늘 백성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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