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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2

녹취문: (S) 사망을 이루는 세상 근심 처리법_태승철 (고린도후서 7:5~16)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10.17|조회수5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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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망을 이루는 세상근심 처리법>의 줄거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낳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반면 세상 근심은 사망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세상 근심은 너무나 잘 압니다. 늘 내 안에서 줄기차게 생기고 있으니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무엇인지를 알아야겠고 세상 근심은 처리법을 알아야겠습니다.

 

사망을 이루는 세상 근심 처리법

(고린도후서 7:5~16)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사망을 이루는 세상 근심 처리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사망을 이루는 세상 근심 처리법”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에 의해 현혹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불시에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으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에베소로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2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이 당시에 근심을 안고 고린도 교회로 향했던 일을 후회함과 다시는 이러한 근심을 안고 교인들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던 것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한편 본문을 보면 기쁨이 강조되는 가운데 다시 근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 근심은 세상의 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대비됩니다. 세상의 근심이 멸망과 사망으로 이끌어 지옥으로 들어가게 한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를 하게 되고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게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본문에 입각해서 다시 해보자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 근심을 하다가는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세상 근심을 하고 계신다면 즉시 멈추고 돌아서야 합니다. 세상 근심을 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근심이란 내 속에서 끊임없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세상 근심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겨나서 나를 멸망으로 이끌어 간다면 어떻게 처리해 나갈 수 있을까요? 이 점에 대해서 성령이 이끌어주시는 대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기쁨을 강조하며 기쁨으로 생활하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로 인해 근심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근심에도 차이가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5~7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두려워하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마음에서 일어났던 변화의 추이를 쫓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고린도 교인들이 심각한 영적 오류에 말려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에베소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후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눈물로 편지를 썼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편지로 거짓과 오류 앞에서 추호도 타협함 없이 신앙의 기준을 본래대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 멀어진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인 상태를 예리하고 준엄하게 그리고 신랄하게 책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편지를 보낸 사도 바울은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편지에서 제시된 복음적 신앙의 기준 앞에서 부담을 느끼고 도리어 반발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 채 주저앉을까 근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고통을 느끼게 할 정도로 예리한 편지의 내용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신들을 돌아보아 잘못된 점을 회개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소식을 디도를 통해서 듣게 되고 기뻐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마음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유명한 구절을 기억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셨던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는 정말로 상반된 단어인 근심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인도 근심을 하였고 교인들에게도 편지를 통하여 근심하게 하였습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 분이 교인들을 근심으로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근심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세상 근심과 대비시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의 차이는 무엇이며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먼저 근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늘 근심합니다만 근심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딱 대답하기가 어렵게 느껴질 것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해결되지 않은 일 때문에 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함.”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일이란 간단히 말해 문제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좋아함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은 근심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고 바라는 일에 문제가 생길 때에만 근심이 됩니다.

 

이것을 본문의 맥락을 염두에 두고 정의해보자면 근심이란 “좋아하면서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리거나 좋아해서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얻지 못할까 속을 태우며 우울해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잃게 될까 근심합니다. 또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 중에서 좋게 여겨지는 것들을 가질 수 없게 될까 근심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잃을까 근심하고 좋아하는 것을 얻지 못할까 근심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세상 근심은 세상에서 좋은 것을 갖고 있고 좋은 것을 갖고 싶을 때 생겨납니다.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잃거나 얻지 못할까 염려하는 마음이 세상 근심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10절에서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큰 병 없이 지내고 있다면 건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가지고 있는 건강을 잃을까 근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건강을 잃을까 근심하는 동안에 사망을 이른다니 대체 무슨 말일까요? 이런 이야기는 건강 때문에 근심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의 고린도 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눈물의 편지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복음의 기준을 제시하였습니다. 복음의 기준에서 멀어진 신앙 상태에 대하여 신랄할 정도로 예리하고 준엄하게 책망하였을 것입니다. 당시의 고린도 교인들은 마치 건강을 잃어버릴까 근심하는 사람과도 같은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예리하고 준엄한 기준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에 대해 근심하였습니다. 마음이 세상과 몸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가야만 한다는 기준을 고린도 교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근심이 생겼던 것입니다.

말씀도 복음도 영적 기준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었고 전한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사도 바울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직접 보았고 전해 들어서 알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는 복음으로부터 너무나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근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우리도 이러한 세상 근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건강 근심, 돈 근심, 가족관계 근심, 회사 근심, 나라 근심을 비롯하여 근심의 대상은 끝이 없고 수시로 생겨납니다. 자존심과 관계하여 근심이 생기고 인간관계 때문에 근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없이 세상 것 때문에 생기는 모든 근심은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사망에 이른다는 것은 생명의 복음을 잃게 된다는 것이고 복음이 약속하는 모든 은총을 저버린 채 지옥을 향하여 가게 됨을 의미합니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 근심은 마음에서 이미 가지고 있는 세상 것을 좋아한다는 증거이며 앞으로 가지고 싶어 하는 세상 것을 좋아한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근심은 좋아함에서부터 나타납니다. 절대 잃어버리고 싶지 않고 꼭 갖고 싶다는 마음이 없다면 근심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망으로 이어지는 세상 근심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10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어떤 것일까요?

앞서 근심은 좋아함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잃을까 근심하고, 좋아해서 갖고 싶어 하는 것을 갖지 못할까 근심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가지고 있는 좋은 것이나 가지고 싶어 하는 좋은 것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있는 것일 경우에 생기는 근심입니다. 천국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잃음에 대한 근심이고 본문의 맥락을 염두에 두고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화목함이 깨지는 상태에 대한 근심입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고 직면하는 상태에서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과 직면하지 못하는 상태에 대한 근심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지금 내가 마음으로 직면하고 있는 대상이 나를 근심하게 합니다. 내 마음이 무엇을 직면하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직면하고 있는 그것의 상태가 나를 근심하게 만듭니다. 직면하는 대상이 돈이라면 돈 문제가 생겼을 때 근심하게 됩니다.

이처럼 마음은 직면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곧바로 영향을 받습니다. 내가 직면하고 있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상태에서 그 상황을 깨닫는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직면하는 상태를 기준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세상 근심을 하되 그것이 하나님을 직면하고 있지 않은 상태임을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우리는 세상 근심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도 이미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싶어 하느냐는 두 가지 관점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근심은 늘 하나님과 주님과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주님을 통해 하나님과 연결되고 하나님을 가지고 있음에도 완전히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서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이 늘 불만이고 근심이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수시로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집니다. 그 하나님을 가지고 싶어 해야 하는데 직면하지 못함을 근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가지고 싶은데 하나님을 갖지 못할까 하는 근심,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잃을까 하는 근심을 해보셨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오늘 본문에 나온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연관성이 느껴지실 것입니다. 다만 기쁨, 기도, 감사와 근심은 상반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야 이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은 하나님과 직면하게 됩니다. 마음은 채워지고자 무엇인가를 끌어당기고자 하는데 하나님과 직면한 상태에서는 끌어당길 대상이 하나님 이외는 없습니다. 하나님만 좋아하게 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직면하는 상태가 되면 몸은 언제 어디서든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직면한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쉬지 않고 대화하는 기도가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내가 직면하는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권자이심을 알기 때문에 내 몸이 만나는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도 이와 연관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내게서 나타나고 있지 않음을 발견해내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갔다면 하나님을 직면하기 때문에 기뻐해야 할 것이다. 또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직면한다면 쉬지 않고 대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세상 사람들 눈에는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보일지라도 나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서 내가 항상 기뻐하지 않고, 쉬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근심해야 될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고, 복음을 잃어버리고 복음 바깥에 나와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과 화목함의 상태를 잃어버렸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기뻐하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고 감사하고 있지 못하다면 근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세상 것으로 근심할 때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중단됩니다. 세상 근심을 처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며 떼려야 뗄 수 없는 절대 불가결의 요소입니다. 세상 근심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 근심으로 전환되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중심으로 세상과 하나님이 양쪽에 포진하고 계십니다. 마음이 세상 것을 좋아해서 생긴 근심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세상 근심이 하나님을 잃는 것임을 깨닫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 근심에 대해 나를 진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단 마음에 근심이 생기면 그 근심에 깊이 빠져들어 가서는 안 됩니다. 그 근심이 나를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음을 진단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기뻐하지 않고 있구나. 살아계시고 인격체이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지 않구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감사하고 있지 않구나.”라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근심에 대한 진단은 내가 지금 마음으로 좋아해서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내가 지금 좋아해서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근심을 중단하려 하지 말고 근심을 일으키는 좋아함의 상태를 죽여야만 합니다. 좋아함의 중단이 일어나야 근심도 끝납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을 좋아하는 상태는 그리스도 밖에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세상 것을 좋아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 죽음이 세상에 대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근심이 생기고 우울해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세상 것 때문에 근심이 생기고 걱정과 두려움이 생길 때는 근심을 멈추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근심은 세상 것을 가져서 좋아하든 갖고 싶어서 좋아하든 좋아함으로 인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근심 걱정 두려움을 없애고자 한다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십자가를 통한 단절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 좋아하는 세상 것을 담고 있는 내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어야만 합니다.

 

근심하지 않으려 한다면 “근심하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려는 것입니다. 근심이 발생하는 뿌리를 잘라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좋아해서 생긴 근심은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지노선으로써의 경계입니다. 그것을 넘어가면 안 됩니다. 근심이 생기자마자 근심에 빠져들어서 불안과 두려움 속에 주저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항상 기뻐하지 못하고, 쉬지 않고 아버지께 기도하지 못하고,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이것은 그리스도 밖에 나와 있기 때문임을 진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기준이 없이 근심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좋아하고 있다는 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근심한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격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 근심한다면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주권자 되심을 부인하고 거부하며 반역하는 일입니다.

 

이처럼 세상 근심은 하나님의 좋으심에 대한 거부이고 하나님의 인격성에 대한 거부이며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에 대한 거부입니다. 세상 것을 좋아함으로부터 근심은 생겨납니다. 이러한 세상 근심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을 세 가지 측면에서 철저하게 거부하고 반역하고 부인하기 때문에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직면하면 몸이 어떤 상황이든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직면하면 살아계시고 인격체이신 하나님과 쉬지 않고 대화하듯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직면하여 몸이 당한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러한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기준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기준을 가질 때 죄적 체질 때문에 끝없이 세상 것을 좋아하며 생기는 근심을 처리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천국의 기운을 앞당겨서 느끼며 천국 여정의 삶을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직 십자가를 기억함으로 세상 근심을 처리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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