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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돈을 먹지 말고 소유하라>의 줄거리:
거짓 사도들을 염두에 두고 신앙의 참과 거짓을 가리는 여러가지 요소를 말씀하시는 중에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을 또 다시 언급하십니다. 참과 거짓의 기준을 돈과 재물에 적용하시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적용의 모범적인 예로서 마케도니아 지역 교인들이 헌금에 참여하는 모습을 제시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돈을 먹지 말고 소유하라 입니다.
돈을 먹지 말고 소유하라
(고린도후서 8:1~9)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6. 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
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돈을 먹지 말고 소유하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돈을 먹지 말고 소유하라”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 부동산 가격의 하락, 주가 하락, 반면에 전기요금과 가스요금 인상이라는 경제 상황 속에서 다들 평안한 삶을 살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경제 문제에 관한 절대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전문가도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석학일지라도 경제 문제에 대한 답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경제 정책의 성공은 불신앙적인 용어로는 순전히 우연일 뿐입니다. 훗날에 경제 문제가 닥쳤을 때 똑같은 방식을 적용하더라도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금리를 높이면 물가가 잡힌다는 속설도 미국으로부터 시작하여 전 세계적으로 전혀 먹히지 않고 있는 상태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다시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앞서 로마서나 고린도전서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예루살렘 교회는 오랜 기근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궁핍함 속에 처해있는 예루살렘 교인들을 돕기 위하여 이방지역 교회들로 하여금 구제헌금에 참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늘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헌금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두드러진 주제는 헌금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고린도후서를 살펴보면서 알게 되었던 것처럼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현혹하여 자신의 사도권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만든 사건에 대해서 변론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진정한 사도임을 말씀하시는 중에 신앙의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수많은 요소들을 말씀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헌금도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앞에서 사도 바울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직면함이 유지되면 하나님과의 친분과 교제가 쌓이는 화목함의 상태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함이란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하늘에 머물면서 하나님을 직면하는 동안에 이 세상에서의 말과 행동은 완전히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을 때 제일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언어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언어의 달라짐이란 그 사람의 가치관이 달라짐을 의미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지면 언어의 개념들이 완전히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 하늘에서 하나님을 직면하여 화목을 이루었다면 진정한 구원이 진행 중인 새로운 피조물이 된 상태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렇게 새로운 피조물이 된 상태에서 돈을 대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내용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구제헌금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돈이나 헌금을 대하는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그 전형적인 예로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회들을 언급합니다. 마케도니아는 지금의 그리스가 있는 발칸 반도의 북부지역에 위치한 곳입니다. 마케도니아 지역에 속한 교회로는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2절을 보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이나 극심한 가난이라는 표현으로부터 이들 또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저 가난했던 것이 아닙니다. 넘치는 기쁨을 갖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하였는데 넘치도록 하였습니다.
반면에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에 참여하기를 부탁한 지 일 년이 지났는데도 헌금의 모금 상태가 지지부진하였습니다.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회들이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넘치는 헌금을 한 것과 대조적인 상황입니다. 사도 바울은 참과 거짓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음은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가 유지되어 화목함의 상태를 이루어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화목함의 상태를 이루었을 때 이 세상에서 헌금이나 돈에 관한 마음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가를 말씀하시고자 합니다. 이것을 위해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회들을 예로 들면서 이미 일 년 전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헌금을 이루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회들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지만 기쁨이 넘쳤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과 화목하고 있다면 이 땅에서 나타나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증거가 바로 기쁨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인들을 소개하면서 바로 넘치는 기쁨을 언급하였습니다. 이 기쁨은 곧 이들이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에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화목하였기 때문에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인들은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넘치는 헌금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다소 의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기근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회들 또한 극심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심각한 가난에 처해있었습니다. 어쩌면 예루살렘 교회보다 더 심각한 가난에 처해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기에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한 사건은 마치 벼룩의 간을 빼먹는 느낌이 듭니다. 심지어 벼룩이 자기의 간을 자발적으로 내놓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1절에서 이러한 상태를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은혜를 받았다면 극심한 가난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극심한 가난 속에서 분에 넘치도록 헌금을 하는 것이 은혜라니 도대체 이것이 왜 은혜라는 것일까요? 이것은 하나님과의 화목함이 이루어져서 진정한 구원을 받고 이 세상을 보냄 받은 자로서 살고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나타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헌금을 포함하여 돈에 대한 참 신앙인의 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은 말씀드린 대로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가 유지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가지고 있고, 그 공백을 채우려는 욕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실제로 하나님을 직면하게 되면 온전한 채움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 외에는 어떤 대상도 채움거리로 바라지 않게 되고 채우기 위하여 끌어당기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마음 채움을 위하여 하나님을 먹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영원토록 무한히 먹는 것을 바로 하나님과의 화목이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무한히 먹는 상태에서는 더 이상 이 땅에 남아있는 몸과 몸에 관련하여 주어진 모든 것들은 마음 채움을 위하여 불필요한 잉여물이 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며 살고 있는 참 신앙인에게 있어서 돈과 재물이 갖는 의미의 핵심 내용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돈을 잉여물로 여기지 못하고 여전히 채움 거리로 직면한다면 어떨까요? 그 사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공백을 채우기 위하여 직면하고 있는 돈을 얻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무한하신 하나님이 들어오셔야만 채워질 수 있는 공백을 갖고 있습니다. 돈이 얼마나 대단할지는 모르지만 무한하신 하나님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져도 마음의 공백은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벌은 돈을 엄청나게 많이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마음으로 돈을 먹고 있는 한 결코 마음의 채워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반면에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 하늘에 머물면서 하나님을 직면한 사람은 하나님을 먹는 일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주어진 돈의 액수가 얼마든지 간에 그 모든 돈은 마음 채움에 대해 불필요하게 남아도는 잉여물이 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돈과 재물의 소유란 바로 이렇게 마음 채움에 대해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돈을 직면하여 돈을 먹고 있는 한, 마음 채움을 위한 욕구로부터 자유로운 돈은 단 한 푼도 없습니다. 수십조 재산을 갖고 있는 재벌도 마음이 돈을 직면하여 마음 채움을 시도하고 있다면 돈이 남아돈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항상 부족하게 느끼니 돈을 한 푼도 갖고 있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진정으로 돈을 소유한다는 것은 돈에 대해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직면하여 날마다 순간마다 24시간 365일을 하나님만을 먹고 있는 화목함의 상태를 이루었을 때 그 사람에게 주어져 있는 돈의 액수가 얼마든지 그 모든 돈들은 마음 채움의 욕구 바깥에 잉여물이 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돈을 소유하는 방식입니다. 돈을 직면한다면 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먹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9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구절의 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이 말씀을 너무나 오해했습니다. 참 나쁘게 악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큰돈을 갖게 하시기 위해 가난하게 되셨다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요하심은 돈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지식으로 부요하시다는 것도 아닙니다. 건강으로 부요하시다는 것도 아니며 인기나 명예로 부요하시다는 것도 아닙니다. 천국에 계시던 상태가 바로 예수님의 부요하심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 하나님으로 온전히 채워져서 부족함이 없으셨습니다. 그러셨던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자체가 가난하게 되신 일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의 신성을 비우시고 아버지의 종이 되기로 순종하셨습니다. 이 상태가 바로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심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바로 우리의 부요함을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닐 때 예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그럴 때 예수님 안에 우리의 마음이 들어가서 하나님과 직면하게 됩니다.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영원히 무한히 먹게 되는 상태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상태가 되는 것을 예수님에 의해 부요해지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부요함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하게 되셨기에 이루어질 수 있는 우리의 부요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이 구원 사건의 의미를 근거로 하여 참 부자의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참 부자는 마음의 상태에서 결정됩니다. 부자는 지금 마음이 이 세상의 무엇도 바라지 않는 상태의 사람입니다. 세상에 대한 바람이 없어야 부자입니다. 부요하신 주님이 가난하게 되신 이유는 바로 우리가 이렇게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을 통하여 부요하게 되었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고 하나님만으로 채워지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요해졌다면 몸과 몸에 관련하여 주어진 모든 것들은 마음 채움을 위해서는 아무 필요도 없는 잉여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나님만을 먹고 있고 하나님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몸과 몸에 주어진 어떤 것들도 더 이상 채움을 위해서는 불필요한 잉여물이 된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참으로 소유하는 상태입니다. 이로부터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인들은 환난 속에서 많은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는 넘치는 기쁨으로 나타났습니다. 마음이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상태가 되었고 그럼으로써 나타난 결과가 헌금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이들이 극심한 가난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몸과 몸에 주어진 모든 것들은 다 마음 채움을 위해서는 아무 필요도 없는 잉여물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마음 채움은 세상의 재벌들에게는 나타날 수 없는 일입니다. 재벌은 수십조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지만 결코 돈을 잉여물로 여기지는 못합니다. 수십조는 엄청나게 큰돈이지만 아무리 마음으로 돈을 먹어도 채워짐은 생기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채워짐이 없기에 수십조 중에 단 한 푼도 잉여물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 채움을 위하여 욕구하는 마음 바깥에서 자유롭게 남아도는 돈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목하여 마음 채움을 위하여 하나님만을 먹고자 하는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어떨까요?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 단돈 삼만 원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삼십조 원을 가진 재벌보다도 마음 바깥에서 남아도는 돈의 액수는 더 큽니다. 삼십조 원을 마음에 쏟아부어도 마음은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마음 채움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운 돈은 하나도 없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는 마음 채움을 위하여 하나님만을 먹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내게 주어진 돈의 액수가 어떻든지 나를 진정한 부자로 만듭니다. 진정으로 돈을 소유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한편 우리는 이러한 이해로부터 참 부자가 돈을 소유할 때 나타나는 딜레마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분께서는 이런 말씀을 들으시며 “목사님은 내 주머니에 들어와 있는 돈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두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돈을 소유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로 상충되는 이야기 아닙니까?”라고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표현적으로는 상충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이 딜레마에 대해서 이제부터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돈이나 재물을 참으로 소유한다는 것은 그것들을 마음 바깥에서 자유롭게 나뒹구는 잉여물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딜레마가 발생하게 됩니다. 내가 참 소유하는 돈에 대해서 나 스스로 지출 명목을 만들 수 없게 됩니다. 돈을 지출하여 구매하고 쓰는 경제 활동을 하는 이유는 돈을 써서 얻는 대상으로 마음 채움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간단히 말해 만족하고자 돈을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을 직면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을 먹고 있는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였기에 돈을 써서 얻을 만족이 필요 없습니다. 그렇기에 돈은 마음 바깥에서 나뒹굴게 되고, 그 돈을 써서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지출 명목을 스스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바깥에 나뒹굴고 있는 잉여물인 돈에 대한 지출을 결정하시게 됩니다. 이 상태를 우리는 하나님이 두신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주신 것이 아니라 두신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진정한 소유의 과정이 있어야만 합니다.
진정한 소유는 내 마음으로부터 돈이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 채움이라는 용도에서 돈이 어떤 식으로든 쓰임새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회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자기들에게 주어진 작은 돈들은 마음 채움을 위한 욕구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마음 바깥에서 뒹구는 잉여물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잉여물이 된 돈에 대한 지출 명목을 결정하셨고 그것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반면에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서 돈은 잉여물이 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는 항구도시였기에 물류의 흐름이 원활했고 비교적 경제적으로 부유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헌금에 참여하기를 요구한 지가 일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헌금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는 대신에 이 세상 것들을 직면하고 있었고 돈을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돈을 참 소유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돈을 먹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먹어야 될 마음으로 돈을 먹고 있었으니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이 채워질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인들과 고린도 교인들을 대비시켜 사진으로 보여주듯이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이러한 대비로부터 헌금을 포함한 돈과 재물 일체에 대하여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은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가 드러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돈이 얼마가 있든지 마음은 하나님만을 직면해야 하고 하나님만을 먹을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만으로 채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 모든 액수의 돈들이 다 잉여물이 됨으로써 오직 하나님의 지출 명목을 따라서만 지출되는 은혜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인들의 헌금이 은혜였던 이유는 하나님의 지출 명목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이러한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님으로써 마음으로 하나님을 직면하고 하나님만을 먹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내게 허락하신 돈의 액수와 재물의 크기가 어떠하든지 모두가 잉여물이 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지출 명목만을 따르는 은혜를 누리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