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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2

녹취문: 내 돈이 구원받지 못하면 내 구원도 없다_태승철 (고린도후서 8:10~2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10.21|조회수5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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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돈이 구원받지 못하면 내 구원도 없다>의 줄거리:

심한 기근에 시달리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헌금 프로젝트가 실행 중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제헌금 프로젝트를 계기로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의 구원 받음을 온전한 상태로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헌금은 결국 돈을 드리는 것인데, 내게 주어진 돈에 대한 태도는 숨길 수 없이 나의 구원 상태를 반영합니다. 그래서 단언할 수 있습니다. 내 돈이 구원받지 못하면 내 구원도 없다고 말입니다.

 

내 돈이 구원받지 못하면 내 구원도 없다

(고린도후서 8:10~24)

 

10.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11.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12.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13.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15.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 돈이 구원받지 못하면 내 구원도 없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 돈이 구원받지 못하면 내 구원도 없다”

본문 10~15절까지는 헌금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지 않은 16~24절까지는 구제헌금 운송을 위한 위원을 제정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 제목은 내게 주어져 있는 돈이 구원받아야 하고, 그렇지 못하다면 내가 구원받음의 상태를 상실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볼 구절은 12절입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마케도니아 지역의 한 교회였던 빌립보 교회와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두자면 빌립보 교회는 거의 없다시피 한 상태인데 있고, 고린도 교회는 많이 있는데도 없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주안점을 두고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헌금에 대해 10절에서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헌금으로 인해 구제받는 쪽에 유익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구제하기 위하여 헌금하는 당사자에게 유익하다는 말씀입니다. 헌금하는 것이 도대체 왜 유익하다는 것일까요? 우리가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을 때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의 마음가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짊어지고 다녔습니다. 그 마음이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 안에서 언제나 하늘에 머물러 있었으며, 또한 마음은 하나님과 직면하는 중에 하나님을 흡입하고 호흡하고 먹는 중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제시된 모든 일상의 문제들을 대할 때의 기본조건입니다.

헌금이라는 문제를 놓고 말씀하시는 내용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를 들어 한 교인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구제헌금을 하면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단순한 헌금이 아닌 일련의 복음적 과정이 활성화되고 있는 상태의 결과물로 보았습니다. 헌금을 한다는 하나의 행위가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거슬러 추적해 들어가면 결국 그 사람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에 머물면서 하나님을 직면하여 호흡하고 끌어당기고 먹는 행위가 바로 헌금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이라는 하나의 행위는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고 하나님과 화목한 복음의 과정이 풀가동되고 적용되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는 사도 바울의 의도는 단지 헌금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구제헌금을 계기로 온전한 구원의 상태로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헌금은 돈이지만 중요한 것은 돈에 대한 태도입니다. 다시 말해 헌금이란 복음적 과정이 풀가동되는 중에 나타나는 돈에 대한 태도의 연장선상에서 파생되는 행위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 12절을 보면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헌금을 받으신다고 하는데 어떻게 받으신다는 것일까요? 고린도 교인들이 헌금을 하면 예루살렘 교회로 운송이 될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입니다. 본질적으로 헌금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돈을 쥐시고 사용하실 때에 나타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헌금을 받으신다고 표현하였습니다. 내가 헌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위하여 내게 주어져 있는 돈을 쓰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를 통해 헌금이라는 행위 속에 감추어져 있는 내막을 들여다보기로 하겠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있고 예루살렘 교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두 교회의 교인을 모두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기근 때문에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도 결코 사정이 녹록치 못합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인들은 어려운 사정 가운데서도 마음이 세상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마음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마음이 직면할 세상 것들이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마음은 직면하는 대상을 빨아들일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을 직면한 이들은 하나님을 호흡하고 하나님을 먹는 화목의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나타난 일이 헌금이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지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기에 그들에게 주어진 돈은 액수가 얼마든지 마음 바깥에서 잉여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12절에서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라고 한 상태입니다. 내 마음 바깥에서 잉여물이 된 것을 사도 바울은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소유이기도 합니다.

 

내가 이 땅에서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내 몸조차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조물주이고 주권자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 사회적으로 볼 때는 어쩔 수 없이 내 이름 아래에서 소유를 주장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내가 소유주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는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의 주인이 조물주이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법적으로 모든 서류에는 기록상 내게 주어진 것들이 내 명의에 올라가게 됩니다. 은행에 있는 계좌는 내 명의의 계좌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것이 내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으로 내 명의 아래에서 이 세상 것들을 소유한 상태일 때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 예수님을 받아들여서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가지려고 하나님을 흡입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 땅에 있는 내 명의 아래에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돈이나 재물이나 물건이나 내 마음 바깥에 놓이게 됩니다. 내 마음을 채우는 용도에 대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잉여물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상태가 사도 바울이 말한 “있는 것”이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형태의 소유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참으로 소유할 때 생겨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늘로 올라간 내 마음 바깥에서 잉여물이 된 것들은 내 마음 채움을 위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당신의 뜻을 위하여 쓰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내게 “있는 것”에 하나님의 주권이 개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상태가 내게 있는 것이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그 대상이 돈이라면 나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내 명의 아래에 있는 돈도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돈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떨까요? 돈은 채워지고자 하는 나의 강력한 흡입력으로부터 완전히 빠져나와 해방된 상태입니다. 나의 마음 채움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직면한 대상을 빨아들이는 흡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돈은 이러한 흡입력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만 됩니다. 돈이 구원받아야 하는 이유는 돈이 이 땅에 생겼을 때부터 하나님이 갖고 계셨던 주권적 계획이 개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돈이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증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하여 쓰임 받음으로써 나타납니다. 내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돈이 태어나면 하나님은 그 돈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계획이 있으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태복음 10장 2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의 생사조차 아버지의 주권이 결정하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이 개입하시는 일은 비단 참새에 대한 것만이 아닙니다. 참새 두 마리를 살 수 있는 한 앗사리온이라는 아주 적은 푼돈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주권은 개입하고 계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땅에 떨어지고, 누군가 그 참새 두 마리를 한 앗사리온에 사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여기에 사용된 한 앗사리온에도 하나님의 주권은 개입되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돈의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 땅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을 위하여 지불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 돈의 구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의 만족을 위해 쓰려는 욕구로부터 해방이 되어야만 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기에 그들이 가진 돈도 액수가 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아버지를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만을 마음 채움의 유일한 대상으로 생각하고 흡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들에게 주어진 돈은 잉여물이 되었고 돈은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내가 구원받으면서 내 명의의 돈도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잉여물이 된 돈을 기근으로 고통당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쓰도록 투입하십니다.

 

반면 고린도 교회의 상황은 이와 달랐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경제 상황을 빌립보 교회와 비교해보자면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부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훨씬 많은 액수의 돈이 주어지도록 주권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구제헌금 계획에 참여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지 일 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진척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 바깥으로 나와서 잉여물이 된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빌립보 교회는 가난하여 거의 없다시피 한 상태인데 있었고, 고린도 교회는 엄청나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없었습니다.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가진 마음은 채움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예수님을 따라 아버지를 직면하는 자리까지 마음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무엇인가를 흡입해야만 하는 마음으로서는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돈이기 때문에 돈을 흡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하나님 크기의 마음의 공백은 아무리 많은 돈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빌립보 교인들에 비해서 많은 돈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마음의 흡입력으로 돈을 빨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도무지 채워지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한 푼의 돈도 마음 바깥으로 남아돌 수가 없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서는 돈이 낭비되고 소모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는 마음의 공백은 그 어떤 큰 액수의 돈으로도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에서 돈을 빨아들인다는 것은 마음 채움을 위해서는 아무 소용도 없는 소모이고 낭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음은 오직 하나님을 직면해서 하나님을 빨아들이고 하나님을 먹고 하나님으로 호흡해야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어떤 액수의 돈을 빨아들여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돈은 낭비되고 소모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빌립보 교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액수의 돈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쓰실 수 있는 돈은 전혀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서는 그들에게 주어져 있던 돈이 전혀 구원받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돈을 몰아주실 때 그 돈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맞물려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을 위하여 몰아주셨던 돈들이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함에 따라 마음의 흡입력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음에 빨아 들여짐으로써 다 소모되었기에 마음 바깥에는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 입장에서는 마음에 만족이 없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돈이란 구원받지 못한 상태임을 드러내는 증거였습니다. 내게 주어진 돈이 구원받지 못하고, 내 마음의 흡입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내 마음 바깥에서 잉여물이 되지 못한다면 나도 구원받지 못했다는 상태를 드러내 주는 증거입니다. 구원이란 내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고, 또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흡입해서 채워져야만 하는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을 직면하게 되고 하나님만으로 채워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처럼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먹고 마시고 빨아들이는 상태가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할 마음이 이 땅에서 돈을 빨아들이고 있다면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돈을 몰아주셨는데도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구원받은 돈은 없습니다. 돈이 나의 마음의 흡입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면 하나님의 주권적 사용을 위해 준비될 수도 없습니다. 내가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돈도 구원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나의 구원과 내게 주어진 돈이나 재물이나 모든 물건들이 구원을 받는 일은 필연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들이 내 마음의 흡입력의 대상이 되어 있다면 나의 구원도 그것들의 구원도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입니다. 돈을 쓰면서 만족하고 싶고, 돈을 벌어서 만족하고 싶어 한다면 돈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쓰일 수 없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돈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돈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은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여전히 땅에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한편 사도 바울은 14~15절에서 균등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헌금을 받는 입장이었지만, 빌립보 교회나 고린도 교회는 헌금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것은 불공평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친구들이 도시락 뚜껑을 빌려서 들고 다니며 친구들에게 밥과 반찬을 조금씩 얻어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친구들이 좋은 반찬을 훨씬 더 많이 먹게 됩니다. 빌립보 교회나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바로 이렇게 반찬을 나눠주기만 하는 상황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빌립보 교회처럼 가난한 상태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하라고 하면 빌립보 교인들은 화를 낼 수도 있었습니다. “구제 받아야 될 사람은 우리인데 대체 누구를 위해서 헌금을 하라는 것이냐?”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균등을 말합니다. 균등은 말 그대로 있는 자도 똑같고 없는 자도 똑같다는 뜻입니다. 대체 어떤 점에서 균등하다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15절에서 출애굽기의 만나 사건을 인용합니다. 출애굽기 16장 17~18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일찍 나와서 많은 만나를 거두었고, 늦게 나온 사람은 적은 만나를 거두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측량을 해보면 많이 거둔 자도 한 오멜이었고 적게 거둔 자도 한 오멜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균등이란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것은 내가 마음으로 직면하여 관여할 일이 아님을 근거로 합니다.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가지고 하나님을 먹으면 됩니다. 이것이 모두에게 주어진 근원적 균등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원적 균등함 속에서 하나님을 먹는 중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다 남아돌게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남아돌고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이 남아돌고 어떤 사람에게는 곡식이 남아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모자라고,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이 모자라고, 어떤 사람에게는 곡식이 모자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잉여물들을 관장하시고 주도하시면서 모두에게 골고루 배분하실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은 애초에 모든 사람에게 균등히 나눠주셨으면 되는 것 아니냐? 예루살렘 교회도 자급자족 할 수 있을 만큼 주시고, 고린도 교회나 빌립보 교회에도 그만큼 주셨으면 좋을 텐데 무엇을 위해 이러한 절차를 보태셨느냐?”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헌금은 돈에 대한 태도의 연장선상에서 나오는 행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돈, 즉 재물이란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입니다. 마음이 직면하고 싶은 대상 중에서 하나님을 제치기에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대상이 돈입니다. 헌금은 돈에 대한 나의 태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 볼 수 있는 계기입니다.

 

내 돈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나부터 구원을 받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하고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에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헌금은 이러한 구원의 상태를 점검할 기회를 줄 뿐만 아니라 사랑하기 위한 과정의 증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와 성도, 교회와 교회 간에 사랑이라고 하는 과정을 헌금이라는 수단을 통해 만들어내십니다. 내가 자급자족할 수 있으면 남을 사랑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헌금을 계기로 성도 간의 사랑을 만들어내시고 구원의 과정을 점검하며 풀가동시키는 귀한 기회의 은총을 허락해주시고자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알리기 위하여 헌금의 문제를 언급하였던 것입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짊어지고 다님으로써 여러분의 마음이 구원을 받고 따라서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돈과 물질들의 구원도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십자가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아버지를 직면하게 하여 주심으로써 세상에서 주어진 모든 것들이 마음에서 잉여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돈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그 돈이 온전히 하나님께 쓰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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