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고린도후서-2

녹취문: 하나님이 경사라서 한턱내기가 헌금_태승철 (고린도후서 9:1~1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10.22|조회수75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이 경사라서 한턱내기가 헌금>의 줄거리:

십자가 생활화 자체가 경사스럽게 여겨지지 않으면 헌금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헌금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직면할 수 있음이 너무나 경사스러워서 한턱내는 심정으로 하는 것이 바로 헌금입니다. 이러한 경사스러워함이 없는 헌금을 하나님은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경사라서 한턱내기가 헌금

(고린도후서 9:1~15)

 

5.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9.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이 경사라서 한턱내기가 헌금>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이 경사라서 한턱내기가 헌금”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이 너무 경사스러워서 한턱내는 것이 헌금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의 헌금에 대한 당부로부터 시작됩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의 편지를 전한 사람은 디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와 더불어 8장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되었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헌금위원 두 사람을 함께 보냅니다. 본문에서는 이들을 보낸 이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일 년 전에 예루살렘 교회의 구제 계획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다른 지역에서 사역을 하던 사도 바울은 기쁜 마음으로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아가야에 있는 고린도 교회가 솔선수범하여 가장 먼저 참여하기로 하였다는 것을 많이 자랑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른 지방의 교회들도 자극을 받아 분발하게 됩니다. 그런 중에 마케도니아 지방에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가 속해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도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가 기근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넘치도록 풍성한 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도 바울이 온 지방을 다니면서 자랑했던 고린도 교회는 일 년이 지나도록 헌금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거짓 사도로 인해 흔들렸던 신앙을 회개하고 바로 섰으니 이제 헌금을 계기로 하여 더 온전하게 갖추는 은혜를 누리라는 의미에서 헌금에 대한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헌금이란 단순히 내 주머니에 들어와 있는 돈을 하나님의 이름 아래 일부 내는 행위가 아닙니다.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면 내 인격 내부에서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전반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헌금은 이 전반적인 변화를 전제로 할 때 나타나는 행위입니다. 그렇기에 헌금을 계기로 나를 진단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마땅히 일어나야 될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를 점검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의미에서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헌금을 많이 내라는 내용이 아닙니다. 헌금이라는 하나의 행위를 계기로 해서 내 신앙 전체를 점검해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의도에서 디도와 두 명의 헌금위원을 보내어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을 올바로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신앙이 올바른 상태가 될 때 온전한 헌금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참 연보로서의 헌금입니다.

 

본문을 보면 우리가 많이 들어온 유명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6~7절을 보면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이면 헌금은 마치 투자와 같다고 느껴집니다. 회사에서 출자금이 크면 배당이 커지고, 출자금이 작으면 배당도 작아지는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교인들에게 헌금을 유도하기 위한 설교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이 적거나 많다고 말하는 기준부터 정확히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에 대한 이야기를 다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다가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2장 41~44절, 누가복음 21장 1~4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과부는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였습니다. 다만 액수로 치자면 부자들의 헌금은 과부의 두 렙돈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었을 것입니다.

어제 말씀에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는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한 앗사리온이라는 적은 돈조차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두 렙돈이란 한 앗사리온의 팔분의 일에 해당하는 아주 적은 돈입니다. 땅에 떨어졌어도 줍는 것이 귀찮아 지나칠 수 있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부자들이 풍족한 가운데 낸 헌금보다 더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와 상반되거나 어긋나는 의미에서 헌금의 액수를 강조하기 위해서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적게 심고 많이 심는다는 것일까요? 그 대답이 다음 구절에서 이어집니다.

7절을 보면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말 속에 헌금의 많고 적음이 판단될 수 있는 기준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많고 적음이란 액수가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헌금하는 자가 즐겨함의 정도를 보십니다. 즐겨함이란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억지로 함이 적을수록 큰 헌금입니다. 인색함이 적을수록 큰 헌금입니다. 즐겨함이 클수록 큰 헌금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헌금을 인색하게 하고 억지로 하게 될까요? 쉽게 말해 돈을 좋아해서 아깝게 여기면 헌금에 대해서는 인색해지고 억지로 하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크기의 공백을 갖고 있습니다. 이 마음의 공백은 항상 무엇인가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돈을 아까워하고 좋아한다는 것은 마음이 돈을 직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음에서 발생한 채움의 흡입력은 직면한 대상을 무조건 빨아들입니다. 내가 직면한 대상이 내가 먹고 싶은 것이 되고 내가 갖고 싶은 것이 됩니다. 마치 진공청소기가 바닥과 직면하고 있기에 바닥에 있는 먼지를 빨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 빨아들임이 아까워함과 억지로 함과 인색함을 만들어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면 낙하지점에 가까워질수록 물살이 급하고 세집니다. 낙하지점 가까운 곳에 사람이 빠졌다면 급한 물살을 거슬러 헤엄쳐 빠져나오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내 주머니에 들어있는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마음이 돈을 직면하고 있으면 돈을 빨아들이기 시작합니다. 돈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내 돈을 남에게 주거나 나를 위한 용도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용도로 사용한다는 것은 폭포의 물살을 거스르듯이 힘든 일입니다.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경사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한턱내고 싶어 합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함이 아니라 기꺼이 즐겨하며 내 돈을 써가며 다른 사람들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고자 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한턱낸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맘에 드는 며느리나 사위를 얻었습니다. 말단 사원이었던 사람이 끝내는 계열회사의 사장까지 승진을 하게 됩니다. 교수였던 사람이 대학 총장이 됩니다. 취직을 못 해서 고생하던 사람이 좋은 자리에 취직을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대단히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면 평소에 아까워하던 돈을 자발적으로 남에게 사용합니다. 인색함도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어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로부터 헌금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경사스러움은 발생한 일이 내 마음에 채움이 됨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마음이 채워지면 그로부터 나눔이 생겨납니다. 물론 이 세상의 일들은 전부 일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맘에 드는 사람과 결혼을 하더라도 그 기쁨이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일시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마음에 채움이라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음이 채워졌다는 것은 일시적으로나마 무엇인가로 채워지고자 하는 흡입력이 약화되고 중단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에 대한 마음의 흡입력이 중단되면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이 다른 사람을 향해 나가는 것이 쉬워집니다. 경사스러운 일로 인해 마음이 채워지자 돈으로 채워지려는 욕구가 발생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돈을 좋아하면서도 기꺼이 한턱을 낼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헌금을 판단하실 때 많고 적음을 보시는 기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헌금을 하는 나를 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 안에서 하나님과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가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직면하는 상태를 얼마나 큰 경사스러운 일로 생각하는지를 보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게 되면 마음의 흡입력은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흡입하고, 하나님만으로 호흡하고, 하나님만을 먹고 있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을 자녀가 서울대에 입학한 것처럼, 기가 막히게 맘에 드는 며느리나 사위를 본 것처럼, 남편이 계열사의 사장으로 승진한 것처럼 경사스러운 일로 생각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경사스러움의 특징은 내게 주어진 것들에 대한 흡입력의 멈춰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다른 사람을 향해 밀어내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마음에 만족함이 생기자 내게 주어진 것들을 마음으로 끌어당기는 대신 다른 사람에게로 밀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현상을 세상에서는 한턱내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헌금에도 이러한 마음이 동일하게 작용합니다.

 

하나님께서 헌금을 하는 우리를 보실 때는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마음을 보십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경사스러운 일이 일어나도 한턱을 내고 싶어 하는데,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하여 영원한 만족 되시는 하나님을 직면하게 된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그것을 경사스럽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직면하는 것을 자녀가 서울대 들어간 것보다 경사스럽게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직면하는 것을 암이 완치된 것보다 더 경사스럽게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직면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경사스러운 일보다 더 경사스러운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헌금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런 경사스러움이 없다면 어떨까요? 어차피 헌금은 하나님의 이름 아래에서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을 예수님 안에서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직면함은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경사스러움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경사스러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경사스러움으로 생각하지 못한다면 한턱내려는 마음도 전혀 생기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마음으로 하는 헌금은 인색하게 하는 것이고 억지로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아래에서 하는 헌금이 아깝다면 하나님을 만난 것이 경사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지 않고 돈을 직면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마음이 돈을 빨아들이고 있는 중에 내게 주어진 돈을 남에게 주는 것은 물살을 거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는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헌금하였습니다. 그 돈으로 한끼 식사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나님께 다 드렸던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경사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경사스러운 일이 생겨서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픈 줄도 모를 정도로 좋다는 뜻입니다. 과부에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경사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안 먹어도 배부른 마음이었기에 생활비 전부를 헌금으로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과부의 헌금을 너무나 기쁘게 보셨을 것입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돈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많은 액수의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얻고자 헌금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체면과 위신과 타인의 칭찬을 구매하는 의미에서 헌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거둔다는 것일까요? 이 부분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헌금을 공로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이 말씀은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이에 상응하는 보상을 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8절에서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헌금하는 것 자체가 은혜이고 보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신앙을 가졌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신앙에 대해 칭찬을 해주실 것입니다. 이는 곧 내가 헌금을 할 수 있음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헌금을 함으로써 무엇인가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 자체가 상이고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거둔다는 것일까요?

이 말씀을 오해해서 헌금을 투자하는 것처럼 유도하는 설교들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헌금을 통하여 더 많은 물질의 축복을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하나님을 동원해서 돈을 숭배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으로 헌금을 해도 그 목적이 더 많은 돈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고 신성모독이며 도발입니다.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8절의 이어지는 부분과 함께 연관 해석하면 정확하게 이해됩니다.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일을 해야 될 상황이 되면 그 일을 할 수 있을 만큼의 비용이 항상 주어지리라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현재는 내게 돈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실 어떤 일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럴 때는 내게 그 일을 할 수 있는 돈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내게 돈이 없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이라면 어떤 일이든지 해야 될 일이 생길 때는 아무런 재정적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라도 돈은 따라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합니다.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할 일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가지고 나를 위해 쓸 일을 만들어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반대입니다. 경사스러움이 크다고 느낄수록 내가 해야 될 일이 앞에 놓일 때 그 일을 할 수 있는 비용과 모든 조건들이 현재는 없더라도 필요한 때마다 조달되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일까요?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서 세상에 대해서 죽었으니 내 마음이 직면하게 되는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을 빨아들이고 하나님을 먹고 하나님을 호흡하고 하나님을 가집니다. 이것이 경사스러운 일이 벌어졌을 때와 똑같은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이 경사스러움이 유지되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물질을 많이 보내셔도 그 물질이 마음을 채우기 위한 용도로는 사용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으로 인한 경사스러움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채울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다는 것은 그저 무섭고 참혹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직면하고 하나님을 먹고 마시는 경사스러움이 계속 진행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경사스러움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내 앞에 아무리 많은 물질을 가져다 놓으신다고 할지라도 내가 먹어치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 인해 경사스럽지 못하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물질을 주셔도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물질을 주실 수도 없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직면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먹을 수도 없고 하나님으로 인해 경사스러운 상황으로 여길 수도 없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물질을 먹는 동안에는 그 물질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쓰일 수도 없습니다.

 

한편 하나님으로 인해 경사스러움을 느끼는 마음으로 헌금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통해 하실 일이 있다면 좀 더 물질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여전히 마음으로 물질을 먹지 않고 하나님만을 먹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물질을 통해 이루실 일이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자 조금 더 보내십니다. 하나님의 경사스러움이 유지되는 동안에 하나님의 계획은 방해 없이 이루어져 갑니다. 많이 거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물질의 축복을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점점 더 많이 해나가실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단순히 이름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는 덕분에 마음이 이 세상 것을 다 떠나서 오직 하나님만을 직면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이렇게 하나님과 직면하게 해주신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정말로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헌금을 많이 하라는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때문에 하나님을 직면하게 된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인가를 헌금이라는 문제를 계기로 점검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경사스럽지 않다면 여러분이 출석하시는 예배당에 헌금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런 헌금은 어차피 하나님이 받으시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경사스러움의 나날들을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어차피 내게 주어진 모든 물질에 대해 한턱을 내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모두 날마다 하나님으로 경사스러움을 느끼는 한턱쟁이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는 것을 잊지 않고 하나님을 직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때문에 생긴 경사스러움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시고 여생을 한턱쟁이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