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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대세적 이론과 분위기 따르지 않기>의 줄거리:
사도 바울이 전열을 가다듬고 거짓 사도들을 향해서 퍼붓는 공격의 핵심은 육체를 따라 행하는 자들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는 자들이 육체를 따라 행하는 자들에 의해서 조성된 대세나 흐름이나 분위기를 따라 행동하고 또한 이미 알고 있는 세상 이론을 따른다는 겁니다. 진정 보냄을 받은 사도는 이것들을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무너뜨리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와 복종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대세적 이론과 분위기 따르지 않기
(고린도후서 10:1~11)
1.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2.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3.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대세적 이론과 분위기 따르지 않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대세적 이론과 분위기 따르지 않기”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삶의 현장에서 대세적 이론과 분위기를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8~9장에 걸쳐 헌금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한편 본문 10장에서는 돌연한 느낌이 들 정도로 거짓 사도들을 향한 공격을 강화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1절을 보면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바울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고 묘사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을 비난할 때 상투적으로 사용한 표현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표현은 언뜻 보기에는 비난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번역이 온건하게 되었을 뿐이지 원문을 보면 훨씬 노골적입니다. ‘바울은 교인들 앞에서는 비굴하여 온유한 척하지만, 떠나 있을 때는 글로 쓰는 편지에서만 꿋꿋한 체하고 용감함을 떨어대는 자이다.’라는 뜻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10~11절을 보면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으로부터 사도 바울이 거짓 사도들로부터 어떤 공격을 받았는지에 대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히려 이러한 비난을 가지고 거짓 사도들에 대한 역공을 펼칩니다.
거짓 사도들은 사도 바울이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하다고 비난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비굴하게 눈치를 보면서 온유하고 아량이 넓은 것처럼 굴지만 사람을 떠나 편지를 쓸 때는 엄중하고도 단호한 척한다는 말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이것을 트집 잡아 사도 바울이 위선적으로 육신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정말로 육신을 따라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이며 바로 그렇게 육신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 거짓 사도임을 밝힙니다.
사도 바울은 우선 거짓 사도들의 비난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 온유하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2절을 보면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하였던 바와 연결시켜 보자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기에 너희를 대할 때는 예수님의 온유하심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육신을 따라서 행동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내용으로 거짓 사도들을 담대하고도 단호하게 공격해나갑니다.
3절을 보면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육신을 움직여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나 거짓 사도들이나 모두 육신을 움직이는 것은 같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움직이게 하는 주체성이 어디에서 오는가에 차이가 있습니다.
땅에 있는 육신을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있고, 하늘에서 주시는 힘을 따라서 움직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이 육신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내막은 전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내막을 밝히면서 거짓 사도들의 공격을 방어하고 또한 동시에 거짓 사도들을 공격합니다.
여기서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한다는” 것은 사도 바울의 사역을 일컫습니다. 육신을 따라 사역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지금도 우리는 육신을 따라서 행할 수 있고 육신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육체에 기반을 두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공백을 가지고 있기에 무엇인가를 빨아들여서 채워지고 만족하고자 합니다. 육체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은 마음이 육체에 달라붙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상태의 마음은 육체를 통하여 채움거리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그 결과 오감을 통해 접촉할 수 있는 세상 것들을 채움거리로 빨아들이고자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육체를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이 육체에 기반을 두었다면 육체를 따르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믿음은 거짓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마음이 육체와 붙은 상태이기에 세상 것을 흡입함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과 복음과 성경의 모든 내용들은 우선하여 형성된 육체에 기반을 둔 과정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종속되고 맙니다. 마음이 육체와 붙으면 육체를 통해 세상 것을 끌어들이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힘을 끌어들이려고 할 때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모든 말과 행동은 거짓이 됩니다.
거짓 사도가 등장하고 거짓 신앙인들이 나타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육체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를 하여도 내가 좋아하는 세상에 하나님을 종속시키게 됩니다. 예수님을 세상 밑으로 끌어오고, 복음의 모든 진리의 내용을 세상 밑으로 끌어옵니다. 이러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거짓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달랐다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육체에 기반을 두지 않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4절을 보면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라고 하였습니다. 육체의 기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는 동안 그리스도의 몸을 붙잡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하늘로 올라간 마음은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이것은 육체에 기반을 두는 동안에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직면하는 중에는 하나님을 종속시키게 되기 때문에 그로부터 나오는 생각과 말과 행동도 거짓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직면하고 있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운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육체를 움직이는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사역의 내용이란 견고한 진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은 고린도 교인이나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것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사역이기도 합니다. 편지와 기록들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사역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사역은 분명히 몸의 움직임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편지도 몸을 움직여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몸을 움직이는데 육체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대신 그리스도 안에서 직면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무엇을 목적으로 사도로서의 사역을 하였던 것일까요? 바로 견고한 진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기 위함입니다. 견고한 진이란 요새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를 가두고 있는 견고한 요새를 무너뜨리고 해방시키고자 사역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견고한 요새란 육체를 따르는 삶의 형태입니다. 그런데 이 육체를 따르는 삶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대세를 이루고 있는 분위기를 따르려는 경향이고, 두 번째는 이론을 따르려는 경향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행동은 대세를 이루고 있는 분위기나 흐름을 따르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유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조성된 분위기이고 대세이고 흐름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분위기에 둘러싸인 채 거의 무의식중에, 거의 자동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무너뜨리기 위한 사역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거짓 사도들은 육체를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육체를 따라 사는 교인들을 그대로 묵인하게 됩니다.
대세를 따라 움직인다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건강이 최고다, 돈이 최고다’ 등의 말들은 우리가 어디서든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념 체계입니다. 이러한 신념 체계가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돈이 최고라는 생각, 건강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가두고 있는 견고한 진입니다. 우리가 몸을 움직일 때는 무의식중에 최고로 믿어지는 가치를 향해 움직이게 됩니다. 돈을 최고로 생각하면 돈을 벌기 위해 움직이고, 건강을 최고로 생각하면 건강을 지키기 위해 움직입니다. 이것이 육체에 기반을 둔 것이고 육체를 따라 사는 상태입니다.
견고한 진은 육체에 기반을 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분위기이고 대세이고 흐름입니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강력한 신념 체계입니다. 이러한 신념 체계는 거의 무의식중에 나를 이끌어가고 나의 행동을 유발시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육체를 따라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이론을 무너뜨린다고 하였습니다. 이론은 생각이 따라서 오고가는 길입니다. 강릉에서 서울까지 KTX를 타고 오고간다고 해보겠습니다. KTX가 달리는 기찻길은 고정되어 있습니다. 강릉에서 서울로 가고, 서울에서 강릉으로 올 때도 기찻길을 따라 움직입니다. 고속버스나 자가용을 타더라도 정해진 도로를 따라 움직이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론이란 이와 같이 생각이 움직이며 다니는 길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대세를 이루는 이론이라는 길들이 있습니다. 강릉에서 서울로 가는 KTX 노선은 단출합니다. 그런데 서울의 지하철 노선을 보면 굉장히 복잡합니다. 이처럼 생각이 움직이는 길들이 이론이고 사상입니다. 이것은 사상가나 철학자들 혹은 특별히 삶에 대해 단순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만의 영역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자기 삶에 대한 이론이라는 정해진 길을 따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생각이 움직이는 길이 내 안에 있을 때 나의 행동을 유발하는 원인이 됩니다. 내가 왜 움직이는지, 내가 왜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보면 내 안에 있는 어떤 이론을 따라서 생각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투자하는 방법에 대한 책을 읽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이론이 내 생각을 움직이는 길이 됩니다. 다른 사람이 써놓은 책을 보고 생각이 움직이면 내 행동도 유사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육체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거짓 사도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이 이미 세상에 만들어 놓은 생각의 길인 이론을 받아들여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사는 것을 문제시하지 않습니다.
다시 4절을 보면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떠한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라고 하였습니다.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면 육체의 기반을 둔 분위기나 이론에 의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힘을 받아서 움직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사역은 만나는 사람 속에 존재하는 대세적 분위기라는 견고한 진을 부서뜨립니다. 또한 모든 이론을 타파해버립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사역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거짓된 사람이 아니라면 제가 하는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갖고 있는 신념 체계, 여러분이 느끼는 대세와 유행과 흐름을 깨뜨리고 타파하는 식으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대세의 흐름이나 분위기를 따르게 하지 않고, 세상에서 배운 대세적 신념 체계를 따라서 행동하는 것을 저지하고 가로막는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진짜 사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하고 있는지는 여러분이 판단해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이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이 발현될 때는 으레 세상으로부터 배운 이론이라는 길을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이론들은 고정관념일 수도 있고 편견일 수도 있습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성취의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이론들을 계속해서 타파해나가는 것이 진짜 사역입니다.
사도 바울은 참 사도로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이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이루어지기를 기대했던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마음에 존재하는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고 모든 이론 체계를 무너뜨린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기존의 행동유발의 동기와 이유가 제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새로운 행동의 동기로 제시합니다. 지금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따끈따끈한 지시와 기운을 받아서 살게 합니다. 이것이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참 사도의 사역입니다.
진짜 사도는 육체에 기반을 두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교인을 두고 보지 못합니다. 2절을 보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참 사도로서 육체에 기반을 두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난다면 그것을 깨뜨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도 바울의 바라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대할 때 서로 육체를 따르지 않는 자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육체를 따르지 말 것을 편지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교인이라면 육체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무척 이상할 수 있습니다. 가끔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주변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대화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큰 소리로 싸우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깔깔대고 웃기도 합니다. 주변의 분위기를 전혀 상관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을 규정할 수도 없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이 세상의 기준에서는 이렇게 규정할 수 없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경호원들을 보면 귀에 수신기를 장착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변에서 무어라 하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직 경호대장의 지시에 귀를 기울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내게 따끈따끈하게 전달되는 힘과 지시를 따라서만 움직이는 사람들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5절을 보면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에 복종할 수 없다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따끈따끈한 힘과 지시를 따라서 행동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졌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앎이란 남녀가 결혼하여 서로를 알게 됨을 뜻하는 히브리어 야다(ידע)와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앎은 이론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을 대면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앎입니다.
이것은 전혀 어려운 내용이 아닙니다. 친구에게 “너, 저 사람 알아?”라고 물어보면 그 사람과의 관계를 묻는 것입니다. 대면하고 서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상태가 앎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앎이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고 창조주이시고 예수님의 아버지이시고 독생자를 보내셔서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식의 이론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론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내 마음이 직면한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돈이나 건강 등의 세상 것들을 직면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언제나 지금 일어나는 일이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과 직면할 수 없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과 직면해야만 합니다. 마음이 직면하고 있는 자리는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와 있는 상태라면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입니다. 하나님 자리에 다른 것을 세워둔 상태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상태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으로 끌고 와 굴복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마음은 지금 직면하고 있는 대상으로부터 기운을 받게 됩니다. 그 대상이 세상이라면 세상에서 만들어진 대세와 분위기와 신념 체계의 견고한 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고, 세상에서 배운 이론들을 따라 생각이 움직이며 행동이 유발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의 마음을 십자가로 끌고 와서 하나님 이외의 것을 직면하는 상태를 복종시키고 죽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사역의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역의 골자를 받아들여서 나 자신에게도 사역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모두가 다 거짓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견고한 진과 모든 이론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굴복함으로써 다 깨뜨러져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제나 지금 하나님을 직면하여 앎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따끈따끈한 힘과 지시를 따라서만 나의 행동이 유발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