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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에 학을 떼게 하려고 주시는 환난>의 줄거리:
그리스도의 고난이 나의 고난이 됨으로써 천국은 나의 현실감의 대상이 됩니다. 천국 현실감이 내 안에서 작게라도 시작되면 하나님은 쐐기를 박으려 하시지요. 천국이라는 마음 쏟을 대안을 준비시키시고 이 세상이라는 대상에 대해서는 아예 내 마음이 학을 떼게 만드시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작업이 바로 육체가 사는 동안 내가 겪는 환난입니다.
세상에 학을 떼게 하려고 주시는 환난
(고린도후서 1:5~11)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10.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11.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에 학을 떼게 하려고 주시는 환난>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에 학을 떼게 하려고 주시는 환난”
오늘 말씀도 한 번 쭉 읽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본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먼저 제목에 대해 말씀드려보고자 합니다. 사전에서 “학을 떼다”를 찾아보면 “괴롭고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느라 진땀을 빼거나 그것에 거의 질려버리다.”라고 하였습니다. 간단히 말해 괴롭거나 어려운 상황 때문에 마음이 질려버린 상태입니다. 그리고 환난은 근심과 재난을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좀 더 주관적인 입장에서 환난을 정의해보자면 두 가지 방향에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좋아해서 원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고, 싫어해서 원치 않는 일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지고 벌어지는 것입니다.
살면서 좋아하고 원하는 일은 안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렇기에 대부분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갑니다. 열 가지 원하면 한 가지 이루어지는 것도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루고자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좋아해서 원하고 시도하지만 안 되고, 좋아해서 원하고 시도하지만 또 안 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환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 해도 괜찮겠는데 싫어해서 원하지 않는 일들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렇듯 좋아해서 원하는데 이루어지지 않는 환난, 싫어해서 원하지 않는데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환난이 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일입니다.
환난은 겉으로 눈에 보이는 원인들이 있습니다. 또 전문가가 진단하는 원인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인들은 사실 피상적인 것이고 가짜입니다.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환난의 진짜 원인은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가 많으시고 위로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대체 왜 우리에게 환난을 주시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에 대해 학을 떼게 하심입니다. 세상에 대해 정나미를 떼라는 것이고 세상에 대해 진절머리가 나는 것입니다. 환난은 극복하거나 피해야 될 일이 아닙니다. 환난을 당하게 하는 세상에 학을 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진절머리를 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오만정이 떨어져야 합니다. 세상에 몸서리쳐야 합니다. 이것이 환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맞는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하면 우리는 일단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지만 그것만 고난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출생도 고난이었고 이 세상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사셨던 생애도 고난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님과 더불어 일체 되셔서 천국에 계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천국은 슈퍼 울트라 좋은 곳입니다. 이러한 영원한 좋음을 체험하시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대한민국 외교부에 속한 직원들이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모두가 절대로 가기 싫어하는 아프리카 오지의 공관으로 발령이 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미국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 있으면서 자녀들을 대학까지 보낸 직원이 어느 날 갑자기 아프리카 오지에 있는 공관으로 발령이 났다고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직원은 이제 자식도 다 키웠으니 그냥 사표를 낼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 자체가 좋음에 있어서는 고난이었습니다. 좋음에 있어서 우주적인 격차가 있는 현지로 보내진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 태어나시고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습니다. 세상적으로 왕실과 말구유는 엄청난 격차가 있습니다. 왕실은 좋은 곳이고 말구유는 나쁜 곳입니다. 그런데 천국의 좋음을 몸소 경험하신 분의 입장에서 보면 왕실도 나쁜 곳이었습니다. 천국의 좋음에 비하자면 왕실과 말구유는 차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구유에 태어나신 것, 머리 둘 곳 없이 사신 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입장일 뿐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왕실은 태어나기 좋은 곳이고 말구유는 태어나기 나쁜 곳입니다. 궁궐이 살기 좋은 곳이고 머리 둘 곳 없는 삶은 나쁜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삶의 모습만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만 천국의 좋음을 알고 계신 분의 입장에서는 세상에 오신 것이 희생이고 고난입니다. 천국의 좋음을 안다면 말구유에 태어나고 왕실에서 살지 않으신 것이 고난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만큼 천국이 좋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변화산에서 천국에서의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을 보았던 베드로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출생과 생애 자체가 고난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입고 계셨기에 육체의 고통도 고난으로 느낄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런 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극한의 육체적 고통의 상태를 통과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라고 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예수님의 고난을 나의 고난으로 느낄 수 있는 지점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한다는 것이 고난이 되는 이유는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슈퍼 울트라 좋음에 비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좋다고 하는 왕궁을 대표로 내놓아도 말구유의 나쁨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 정도로 좋은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 세상을 버리신 것이 십자가 사건 속에 들어있는 내막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죄적 체질 때문에 세상을 좋은 것으로 알고 붙잡았습니다.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 환난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 속에 들어가서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을 버리기 위해서는 끊어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천국의 좋음에 비해서 세상의 좋음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쁨 그 자체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왕실조차도 천국에 비하면 나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그 나쁜 세상을 좋다고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 붙잡고 있었던 것을 끊어내야만 되기에 그것이 환난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좋은 것을 붙잡기 위하여 나쁜 것을 끊어내는 것은 당연한 환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환난을 자처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묘사할 때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다고 합니다. 그 묘사대로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성령님과 더불어 삼위일체를 이루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보좌 우편에만 계시면서 아버지 하나님을 옆에서만 보시는 입장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굳이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 계신다고 말하는 이유는 본문에서 말하는 “위로”와 연관성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위로라는 단어가 11번이나 반복됩니다. 지난 시간에 위로로 번역된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는 옆으로 부른다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세상에 내려오신 주님께서는 천국의 슈퍼 울트라 좋음을 체험적으로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는 출생도 고난이고 생애도 고난입니다. 이에 더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고난까지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을 위로하셔서 곁으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은 세상에서 고난과 환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당신 곁으로 부르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로는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묘사할 때에 보좌 우편에 계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좌 우편은 바로 위로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는 슈퍼 울트라 좋음인 천국을 아시는 분으로서 세상에 내려오시는 것 자체가 고난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십자가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이러한 고난을 겪으신 예수님을 위로하시기 위하여 곁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 안으로 들어가서 그동안 좋다고 붙잡던 세상을 놓아버리는 것이 힘든 일이기에 환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환난을 자처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위로가 내게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주님을 보좌 우편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 안에서 세상을 등지고 잘라내고 환난을 자처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내 안에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가 위로를 받아서 하나님 우편으로 올라가신 것처럼 내 마음도 같이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타나는 실제 위로는 세상을 버리는 대신에 슈퍼 울트라 좋음인 천국이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말로만 듣고 생각만 하던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실제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 느낌은 보면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천국은 세상의 대안입니다. 세상에 있는 많은 좋은 것들에 대한 대안으로 하나님의 좋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위로입니다.
보냄을 받고 사는 것은 천국이 현실로 느껴지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천국이 이론 속에 있고 죽은 다음에나 가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전설이나 아지랑이처럼 까마득하게 묻혀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느껴진다면 보냄 받은 자가 아닙니다. 보냄을 받았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가 계신 천국을 우선적인 첫 번째 현실로 느낄 수 있음을 통해 나타납니다. 이것을 느낄 때만 이 세상을 보냄 받아 살고 있다는 말도 성립할 수 있습니다.
한편 본문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보면 너무 좋습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써 출생과 생애에 더해 십자가 사건까지 모두가 다 고난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 우리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고난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음이 세상을 버리는 내적 환난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고난 속에 들어가서 내적 환난이 이루어지면 놀랍게도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과 천국이 내 마음에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의 고난 속에 들어가서 세상을 버리는 고난을 자처하고 위로를 받아 하나님과 천국이 현실로 느껴지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육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당하신 고난과 같은 고난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접할 때는 마음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7절을 보면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많은 환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러한 환난을 당할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내용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고 천국을 현실로 느끼게 되면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서 환난을 제거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이제까지 환난을 당하고 있었더라도 지금부터는 환난이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상태가 되었으니 세상의 좋음 대신에 하나님과 천국의 좋음을 위로로 받아서 나머지 생애에 대해서는 앞길을 열어주시고 환난을 제거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느낌까지 듭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서 그리스도의 위로가 우리의 위로가 되었습니다. 천국을 현실로 느끼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유일한 대상으로 느끼는 놀라운 위로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환난을 당해야 함을 기정사실화 합니다.
환난은 이 세상을 마음으로 좋아해서 이루기를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고, 싫어해서 피하고 싶은 일들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충만해서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고 위로를 받아 하늘로 올라가면 원하는 바는 없어야 합니다. 원하는 바가 없기에 싫어하는 바도 없습니다. 좋음과 싫어함은 동전의 앞뒤와 같습니다. 좋아하는 것이 없다면 싫어하는 것도 없고, 싫어하는 것이 없다면 좋아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환난을 주시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의 고난으로 받아들이면 마음에 위로가 주어져서 하나님의 좋음과 천국의 현실감이 느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느낌은 극히 작게 시작됩니다. 마치 씨앗이 뿌려진 것과 같아서 앞으로 자라나야 될 과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한 느낌의 강도는 믿음 안에서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강도가 눈에 보이는 어떤 것들보다도 강력하다면 세상의 좋음은 마차 바퀴가 지나갈 때 조그마한 돌멩이 하나가 밟히는 정도와 같을 것입니다. 이 정도에서 마차는 뒤집히지도 않고 진로를 바꾸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에 대한 느낌이 마차 바퀴처럼 커지고, 이 세상에서 좋다고 하던 것들이 작은 돌멩이 같다면 그냥 밟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성장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천국 현실감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어떤 상황보다도 강렬하기에 세상의 그 무엇도 현실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과정에서 넘어지고 다 떨어져 나갑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원리를 처음 듣는 분들은 기뻐합니다. 그 기쁨은 천국의 현실감과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의 씨앗이 묻힌 상태입니다. 이제 씨앗이 싹이 나서 자라서 열매를 맺을 때까지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십자가 복음 말씀을 들을 때의 감격이 다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해서 천국의 현실감과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끼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을 듣고 “야! 이 말씀이다.”라고 느낄지라도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여전히 우리 속에는 하나님에 대해 느끼는 천국 현실감이 너무너무 작을 수 있습니다. 거꾸로 세상에 대해서 바라는 마음, 세상의 좋음을 느끼는 마음, 세상을 현실로 느끼는 마음이 마차 바퀴처럼 커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씨앗이 뭉개져 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쓰시는 방법이 바로 환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복음을 듣고 십자가 복음의 원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에는 평생 세상을 좋아하고 세상을 현실로 느끼던 체질이 남아있습니다. 이 마음의 체질은 쉽게 벗겨지지 않기에 알게 모르게 세상을 향하여 좋아하고 원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게 없다면 거짓말 중의 거짓말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9절을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에게도 “이제 죽었구나. 이제 끝날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하게 할 정도의 강한 환난을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생활화 이론의 주창자이며 실천의 모범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조차도 환난을 통하여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함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의지한다는 것은 이 세상 삶을 사는 데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를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 삶을 위해서 나의 의욕을 가지고, 나의 열정을 가지고, 나의 자발성으로부터, 나의 창의성과 힘을 이용해서 이 세상에서 원하는 일을 이루고 싶어 하는 기질입니다. 이러한 자기를 의지하는 기질은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천국을 현실로 느끼기 시작하는 과정이 진행되는 중에도 끊임없이 발동됩니다. 이렇게 나를 의지하는 상태에서 계획한 바가 조금이라도 이루어지면 우리의 마음은 여지없이 세상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기를 의지하려는 마음은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내 힘으로 하면 되는구나! 내가 좀 더 열심을 부렸더니 이러한 성과가 나타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주십니다. 아무리 열심을 내도, 아무리 자발성을 띠어도, 어떤 큰 포부를 갖고 애를 쓰고 열정을 가져도, 아무것도 안 되게끔 환난으로 치십니다. 그래서 내 힘으로 이 세상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해서 완전히 학을 떼게 만드십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조차 갖는 것을 진절머리가 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점점 더 이 세상이 진절머리나고 대안으로 제시되는 천국을 현실로 느끼게 하시고, 천국의 현실감이 점점 더 커지게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내가 생각하고 내 생각을 의지하고 내 힘을 의지해서 의욕을 갖고 자발적으로 이루려 할 때 환난을 안겨주십니다. 피하려는 일들이 있을 때는 피하려던 것을 굳이 안겨주시며 원하는 일을 제거하십니다.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환난을 계속 주시면서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대해서는 무엇을 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세상에 대해 원하고, 의욕하고, 꿈을 갖고, 바란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 세상에 대해 학을 떼게 만드시려고 환난을 끊임없이 주십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위로도 주십니다. 한쪽으로는 세상에 대해 학을 떼게 하시려고 끊임없이 환난을 주시는 가운데 다른 쪽으로는 끊임없이 천국의 현실감을 우리 안에서 키워 가십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흔들림이 없이 오직 천국만이 유일한 현실이라는 바위같이 요동치 않는 천국 현실감을 갖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유일하다는 믿음이 바위같이 요동치 않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환난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교인들이 겪을 이 환난의 과정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던 바울은 사도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세상을 버리는 대신에 천국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음과 있음을 버리는 대신에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과 있음을 위로로 받을 수 있음을 말해주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교회는 성립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 우리와는 사뭇 다릅니다. 엉터리 박사 같은 말씀들이 난무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생활해나가기로 결의한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에서 보았듯이 그러했던 고린도 교회가 교회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이 됩니다. 이름만 교회일 뿐이지 교회의 내용은 다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눈물로 호소하였고 각고의 단계를 거쳐서 고린도 교인들의 회심의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서고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좋음 그리고 천국의 현실감이 바위처럼 자리 잡기까지는 많은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천국 현실감과 유일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한 불변의 확신은 씨앗입니다. 이것이 자라서 열매를 맺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환난을 주실 것인가를 생각하니 고린도 교인들이 이 환난을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교인들이 회개를 하고 방향을 전환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기보다는 염려가 앞섰습니다.
사도 바울의 염려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자가를 붙잡되 빨리 세상에 대해 학을 떼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무엇인가 좋다고 느껴서 바라고 있는 상태에 대해서 진절머리가 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환난을 주시는 이유입니다. 이 고귀하고 복음적이며 우리가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의도에서 나오는 환난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주어지는 환난의 이유에 대해 알았습니다. 이 환난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의 증거이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의 증거이며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흔들리지 말고 믿음을 굳게 붙잡게 해주시고 환난을 당할 때마다 과장되다 싶을 정도로 이 세상에 크게 진절머리나게 하시고 학을 떼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