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고린도후서-2

가슴 벅찬 자랑 좀 실컷 하며 살다 죽자_태승철 (고린도후서 10:12~18)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10.27|조회수76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가슴벅찬 자랑 좀 실컷하며 살다 죽자>의 줄거리: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이 말씀은 언뜻 들으면 자랑을 자제하라는 뉘앙스로 들립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슴 벅찬 자랑거리가 쉬지 않고 우러나는 삶을 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 안으로 들어와라. 그리고 나머지 평생 기탄없이 주저 없이 가슴 벅찬 자랑을 실컷 하라'는 초청입니다. 자랑거리가 있어야 삶은 신이 납니다. 이제부터라도 자랑거리가 끊이지 않는 삶을 시작해 봅시다.

 

가슴 벅찬 자랑 좀 실컷 하며 살다 죽자

(고린도후서 10:12~18)

 

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가슴 벅찬 자랑 좀 실컷 하며 살다 죽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가슴 벅찬 자랑 좀 실컷 하며 살다 죽자”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과 거짓 사도들과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자랑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신앙에 있어서 참과 거짓을 가리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자랑을 실컷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저 없이 자랑하고 기탄없이 자랑하는 신나는 삶을 살다가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뭐 대단한 것이 있겠습니까? 자랑거리가 있는 삶, 그 자랑거리를 실컷 자랑할 수 있음이 신나는 삶이고 산다는 느낌이 있는 삶입니다.

17절을 보면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쉽게 말해 거짓 사도들은 자랑이 많았는데 주 바깥에서 자랑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앞부분을 보면 그러한 자랑을 삼가라는 내용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언뜻 보면 사도 바울이 자랑을 제한하고 자랑의 한계를 좁게 정해준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반대입니다. 인간은 자랑거리가 있어야 신이 나서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자랑거리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정말로 가슴 벅찬 자랑거리가 쉬지 않고 내 마음에서 우러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퇴색하지 않는 자랑거리를 가지기 위해서는 주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9장 24절을 보면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랑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자랑하지 않는 것은 헛된 믿음이고, 자랑을 잘못하는 것은 거짓 믿음입니다. 자랑을 해야 진짜 믿음이고 올바른 자랑거리를 자랑할 수 있어야 진짜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자랑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자랑의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자랑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와 연결돼있는 대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일이든 사건이든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나와 연결된 것이 인간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여겨질 때 자랑의 대상이 됩니다. 내가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자랑입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가장 훌륭한 위인들 중의 한 분이 이순신 장군입니다. 만약 내가 이순신 장군의 20대손이라면 대단한 자랑거리일 것입니다. 저는 태 씨입니다만 선조 중에 이순신 장군이 갖고 계셨던 검을 만든 대장장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도 작은 자랑거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이야기를 찾아보자면 고구려가 망하고 대조영이 발해를 세웠습니다. 그 대조영이 태 씨의 원조 격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런 과거의 이야기들만이 자랑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현재 아버지가 유명 대학의 총장님이라면 무척 자랑거리가 될 만합니다. 강남에 사시는 권사님이 집을 세를 놓았더니 유명한 가수가 들어와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면 자랑거리가 될 만합니다. 대단한 자랑거리도 아니고 궁극적인 자랑거리는 아닐지라도 차 한 잔 마시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소소한 자랑거리가 되기에는 충분할 것입니다.

제가 연예인 교회에서 전도사로 섬기던 시절에 가수나 탤런트 혹은 인기 드라마의 작가들과 식당에서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테이블로 모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아직 꼬마 전도사였던 저는 ‘연예인과 식사하고 있는 나를 궁금해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주목하는 연예인들과 연결이 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자랑의 마음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본문 17절에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대로 주님 안으로 들어가 보면 자랑의 문제와 관련한 상황이 돌변하게 됩니다. 주 안으로 들어가려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예수님과 연합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과의 동일시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럴 때 인간 세상에서 사람들이 대단하고 훌륭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과의 단절이 일어납니다. 심지어 내 마음과 육체 사이의 연결조차도 끊어집니다. 육체도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 외모가 훌륭하고 건강 상태가 좋을지라도 그것이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게 됩니다. 만약 여전히 나의 외모나 육체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서 자랑거리로 여긴다면 예수님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이 거짓 사도를 가리는 일에서 자랑이라는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실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대단하고 훌륭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과의 연결은 끊어지게 됩니다. 나도 모르게 세상 것에 대한 자랑이 우러나오고 있다면 마음이 세상과 연결돼있다는 헛된 믿음이고 거짓 믿음이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지 못하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 안에 들어갔다면 세상의 모든 것들과 연결이 끊어지기 때문에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여기는 일들이 생기더라도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내게서 세상 것들이 자랑으로 우러나오고 있다면 문제가 큰 상태입니다. 거짓 사도들이 바로 이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이 자랑을 금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랑을 하라고 합니다. 다만 주 안에서 하라고 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자랑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내 마음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연결될 수 있는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뿐입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십자가로 다 끊어졌기에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설령 100억 짜리 로또에 당첨이 되었어도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서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갔다면 마음은 로또에 대해 끊어졌기에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100억을 앞에 두고도 마음은 하나님과 연결되었기에 자랑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자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랑하라는 말과 동의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씀은 예레미야 9장 23~24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23~24절을 전체를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을 자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을 깨달으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그 자체로 자랑하고, 이 땅에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가 일어나는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임을 알고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랑의 모습이 잘 드러난 예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백합화를 보시면서도 아버지께서 입히신다고 말씀하셨고, 공중에 나는 새도 아버지께서 먹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상황을 보시면서 아버지를 자랑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자랑함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문제가 하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절의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는 말씀은 곧 개인적으로 하나님 아는 것을 자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연결되는 대상이 하나님뿐이시기에 하나님을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그 하나님은 삼라만상의 조물주이시며 생사화복의 주권자이십니다. 우리가 장관이나 대통령 혹은 톱스타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면 입이 근질근질해서 자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이러한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안다면 자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굳이 자랑하라고 권면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실제 상황을 보겠습니다. 교인들 중에서도 마음에 우러나서 하나님을 자랑하는 사람은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100억 로또가 당첨되었다면 대단한 자랑이 될 것입니다. 남에게 알려져서 해를 당할까 조심할 수는 있어도 그 마음에는 자랑이 가득해서 입이 근질거리고 가슴이 벅차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개인적 관계를 맺는 하나님께서는 로또와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삼라만상의 조물주이시며 생사화복의 주권자이십니다. 이러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갖게 되었는데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벅찬 가슴으로 자랑하는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이유는 아직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안다면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의문을 제기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자랑하고 다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고 납득도 안 된다. 나는 정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진심으로 부르고 있고, 하나님을 믿고 있고, 하나님에 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목사 장로 집사로 평생 교회를 다녔다면 더욱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모른다는 말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가슴이 벅차서 입이 근질근질할 정도로 하나님을 자랑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본래는 두 차례만 연임할 수 있는 것을 세 차례 연임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실권자가 시진핑 주석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시진핑 주석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것이지만, 시진핑 주석과 개인적으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우리는 대기업 회장들의 이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경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대기업 회장들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잘 압니다. 그런데 정작 대기업 회장들을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기에 대기업 회장을 안다고 자랑하지 못합니다. 대기업 회장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더라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면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기에 나의 자랑거리가 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평생 하나님을 믿었다고 하면서도 한 번도 벅찬 가슴으로 하나님을 자랑해 본 적이 없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하나님 자랑을 해본 지가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면 더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엄청나게 많은 지식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대기업 회장에 대해서 아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안다는 것입니다. 대기업 회장과 날마다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이라면 대기업 회장을 안다고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9장 23~24절에서 “지혜도 자랑하지 말고 용맹도 자랑하지 말고 부함도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라”고 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어느 날 대기업 회장에게 전화가 와서 “요새 왜 이렇게 소식이 없습니까? 한 번 봅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이일 때 대기업 회장을 안다고 자랑할 수 있듯이 하나님을 그렇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00억 로또에 당첨이 되어도 자랑거리로 치자면 하나님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내 남편이 대통령이 되고 장관이 된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또한 하나님의 자랑거리 되심에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는다면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고 있어도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셔서 십자가를 통해 죄에서 구원하셨다, 나를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도 하나님에 대한 자랑이 나오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이 가슴 벅찬 자랑거리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돈 10억이 생기면 엄청난 자랑거리일 것입니다. 누구한테 함부로 말은 못 할지라도 가슴이 뿌듯함으로 벅차올라서 어쩔 줄을 모를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알면서도 마음에 자랑이 생기지 않는다면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거짓 사도들의 헛된 믿음과 거짓 믿음의 특징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거짓은 아닐지라도 헛발질하는 믿음이라면 이러한 상태는 바뀌어야만 합니다.

 

18절을 보면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요? 주님은 우리가 칭찬받게 하시려고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실 때 ‘참 잘했다. 칭찬할만하다.’라고 하실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칭찬하실 만한 일이란 내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면서 가슴 벅차오르는 자랑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상태가 될 때 박수치시면서 좋아하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마귀의 자손이 되어서 인간 세상이 좋다고 하는 것들을 자랑거리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누가 더 많은 자랑거리를 갖느냐를 두고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쟁의 터전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아버지 하나님을 자랑거리로 가질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자랑거리로 내세우며 그 아버지 하나님으로 우러나오는 자랑 때문에 가슴 벅차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퇴색하지 않는 자랑거리가 있습니까? 가슴 벅차오름이 날마다 이어지는 자랑거리가 있습니까? 세상의 어떤 자랑거리도 시간이 지나면 퇴색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영원한 자랑거리이신 하나님으로 가슴 벅차올라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의 어떠한 자랑거리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이 세상 것을 자랑할 때 나는 아버지를 자랑거리로 내세우고 아버지로 부풀어 오르는 벅찬 가슴을 안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교인들이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목사 장로 집사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살면서도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니 하나님이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목사님들끼리 만나면 큰 예배당이 자랑이고 많은 교인 수가 자랑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장로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이 자랑이고, 자녀의 형통이 자랑이고, 사람들이 “와! 그래요?”라고 감탄할만한 일들을 자랑거리로 삼고자 합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도 누가 세상에서 자랑거리를 많이 가졌느냐를 두고 경쟁합니다. 세상 자랑거리가 많을수록 하나님이 축복해주셨다는 증거이고 잘 믿은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당 안에서 이런 인식이 팽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의 마음에서 이 세상은 자랑거리의 자격을 박탈당합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간 사람에게 돈 100억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간 사람에게 자녀가 명문대에 들어간 것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내 안에서 그것이 여전히 자랑거리로 느껴지고 우러나오고 있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거짓 사도들을 향해 자랑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가 나에게도 적중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돌이킬 수 있지만 그 상태는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지 않은 헛된 믿음이고 거짓 믿음입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으면 하나님을 유일한 대상이자 개인적인 대상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하나님을 향해서만 외통수 길이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이 외통수 길이 유지될 수 있도록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면 자꾸 하나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더 알게 되고 더 알게 되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이 세상의 대상들이 아무런 자랑거리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가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되는 순간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오늘도 주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외통수 길에서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 때문에 벅차오르는 가슴을 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남은 삶을 유일한 자랑거리이신 하나님을 실컷 마음껏 자랑하며 살다 죽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자랑거리 되시는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짊어지고 다님으로써 가슴 벅차게 아버지만을 자랑하며 살다가 이 세상을 끝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