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탄의 일꾼도 전하는 '다른 예수'>의 줄거리: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사탄의 일꾼인 거짓 사도도 예수를 전합니다. 바울 사도가 전한 '본래 예수' 하고는 '다른 예수'이지요. 이 세상을 좋아하여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는 다른 예수 믿기가 너무나 쉽고 편하고 좋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종교는 온통 다른 예수 전하고 다른 예수 믿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구원도 본래 예수님이 가져다주시는 것과는 다른 구원이 되는 것이지요.
사탄의 일꾼도 전하는 ‘다른 예수’
(고린도후서 11:1~15)
1.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나 나는
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5.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사탄의 일꾼도 전하는 ‘다른 예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사탄의 일꾼도 전하는 ‘다른 예수”
본문에서는 거짓 사도들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다른 예수”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 중에 13~15절까지를 보면 거짓 사도를 “사탄의 일꾼”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14절을 보면 사탄에 대해 이르기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사탄의 일꾼인 거짓 사도들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심지어 예수까지 전합니다. 그런데 거짓 사도가 예수를 전할 때에는 반드시 다른 예수를 전하게 됩니다. 다른 예수를 전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을 때 받게 되는 영도 성령이 아닌 다른 영입니다. 본래 예수님이 주시는 복음과 구원이 아닌 다른 복음과 구원을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 우리의 구원이 참될 수 있기 위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의 이웃 교인들이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참과 거짓의 기준을 얼마나 명확히 알고 있고 실제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 걱정이 됩니다.
먼저 사도 바울의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걱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의 걱정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걱정의 근원을 알기 위해서는 아담과 하와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합니다.
에덴에서 사탄에게 미혹을 받은 하와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게 됩니다. 창세기 2장 17절을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선악과는 아담과 하와가 먹기에 앞서 바라볼 수도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보게 하였고 따먹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람은 타락하였고 이 세상 삶에 대해서 스스로 좋다 나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 스스로가 삶의 문제를 판단하면서부터 기쁨의 동산인 에덴은 없어지고 이 세상의 삶은 지옥의 예고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지옥의 예고편이 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타락의 과정을 거꾸로 만드셔서 회복을 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바라보지도 말고 따먹지도 말아야 하는 대상이었다면 예수님이 오신 뒤로는 십자가 나무는 바라보아야 하고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을 계속해서 먹어야만 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 사탄의 계획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사탄은 또다시 이것을 거꾸로 만드는 역사를 하고자 합니다. 이전에 선악과를 보게 만들었다면 이제는 십자가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죽음을 먹을 필요가 있는가? 세상을 보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동안에 마음에는 가족을 담을 수 있습니다. 사업도 담을 수 있고, 건강과 장수를 담고, 자녀의 형통을 담을 수도 있습니다. 사탄은 그렇게 살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순결과 정결을 잃어버리고 부패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 이러한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걱정은 현실이 되고 맙니다. 거짓 사도들이 들어와서 다른 예수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예수를 전했기에 다른 영이 전해지고 다른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이 전한 본래의 예수님을 어쩌면 그렇게 쉽게 버리고, 거짓 사도들이 전하는 다른 예수는 어쩌면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는지 참담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다른 예수를 받아들임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예수를 받아들였기에 다른 영이 임하고 다른 구원이 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표면적으로는 예수를 전하고 하나님을 전하고 성령을 전하고 천국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 사탄의 일꾼인 거짓 사도들이었습니다.
온 세상에 흩어져있는 기독교 종교인들이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 사탄의 일꾼들이 전하는 다른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사탄의 일꾼들이 표면적으로는 예수를 전합니다. 사탄의 교활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효과 없는 다른 신을 전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전하되 다른 예수를 전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겠다는 사람들의 영을 잘못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간교함과 교활함을 알아야 합니다. 거짓 사도들은 불교를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슬람을 믿으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광명의 천사를 가장하는 사탄의 입장에서 볼 때는 모든 종교는 이미 손아귀에 들어와 있기에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탄이 노리는 것은 교회입니다. 사탄은 교회를 파탄시키기 위해서 거짓 사도들을 보내 다른 예수를 전하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의 교회를 기독교 종교가 되게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다른 예수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굉장히 아슬아슬하고 종잇장 한 장 차이밖에 나지 않는 것 같아도 분명히 다름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예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되는 본래 예수를 알아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고린도전서 1장 22절을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은 거리끼는 것으로 여기고 이방인들은 미련한 것으로 여기기에 본래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유대인이 거리끼지 않고 이방인도 미련하다 여기지 않는 다른 예수를 전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2장 2절을 보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기 위한 본래의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는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이르는 길을 완성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한 본래 예수는 십자가로부터 시작해서 천국 보좌 우편에 이르는 연쇄과정 속에 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과 떼려야 뗄 수 없게 연결되어있습니다. 또 부활은 떼려야 뗄 수 없게 승천과 연결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승천의 끝은 하나님 보좌 우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부터 시작해서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사실로써 존재하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에 계신 예수님이야말로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한 본래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본래 예수님을 기준하고 판단할 수 있는 다른 예수의 특징이란 무엇일까요? 기독교 초기의 이단들을 보면 예수님의 신성이나 인성 어느 하나만을 인정하고자 하였습니다. 어떤 이단은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하나님의 아들로 인침을 받은 자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신성은 없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또 어떤 이단은 ‘예수님의 육체는 가현적인 것이다. 우리와 같은 육체가 아니었다. 거룩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더러운 육체를 입으실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는 인성은 없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이단들의 주장을 다른 예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은 유대 땅에 있는 교회 공동체로부터 몰래 파송되어 나온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전하는 다른 예수는 기독교 초기 이단들처럼 전혀 다른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우리가 4복음서를 통하여 접하는 바로 그 예수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님,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 산상수훈 같은 새로운 율법을 가르쳐주신 예수님,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이곳저곳에서 설교하시던 예수님, 유대 지도층들과는 충돌을 일으키셨으나 죄인들과는 친구가 되신 예수님이 우리가 아는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모습입니다. 거짓 사도들도 이러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이에 보태서 때때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본질적으로 분명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를 전했습니다. 이 예수님은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아예 짊어지고 다녀야 됨을 전했습니다. 그렇다면 거짓 사도들이 전한 다른 예수와 사도 바울이 전한 본래 예수님의 구체적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말씀드렸듯이 거짓 사도들은 주로 공생애의 예수를 전했습니다. 이것이 문제인 이유는 공생애의 예수님은 세상 안에서 머무르고 계셨기에 공생애의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면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어야 하는 예수님은 지금 세상을 떠나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 예수님을 따라 세상 바깥으로 나가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길을 좇아서 하늘로 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다른 예수를 전할 때는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세상 밖으로 지금 당장 하늘로 가야 될 이유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공생애의 예수님은 세상 속에 거하고 계셨기에 세상 밖으로 나가야 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다른 예수를 믿는 동안에는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을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여전히 애착과 집착을 가지고 마음 안에 세상을 담을 수 있습니다. 가족, 건강, 일, 재산을 마음에 담을 수 있고 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다른 예수를 얼마든지 믿고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전한 본래 예수님은 절대로 이러한 마음가짐으로는 따를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서 믿는다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다면 마음은 이 세상에서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등져야만 하고, 지금 세상 밖으로 나가 하늘로 가서 아버지만을 직면하는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거짓 사도들이 전하는 다른 예수를 믿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예수는 우리가 세상 것을 좋아하여 집착하고 마음에 담은 상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님,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 유대인 지도자들과 충돌하신 예수님, 죄인을 품으신 예수님은 공생애의 예수님입니다. 이러한 공생애의 예수님을 믿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세상에 대한 나의 죽음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짓 사도들이 때때로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언급했을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 사도들이 때때로 전한 십자가 사건의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서 어떤 죄악을 저지르더라도 다 용서하시는 예수님입니다. 또 때때로 전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마음대로 사랑하며 살다 죽더라도 나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예수님입니다. 이러한 다른 예수를 믿는 것은 너무나 편하고 좋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공생애의 예수님은 아예 버려야 될 대상인가요?’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어야 될 예수님은 공생애의 예수님이 아닌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입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한다면 공생애의 예수님을 제대로 가질 수도 없습니다. 공생애의 예수님은 내가 얻으려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어서 나의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가 될 수 없다면 공생애의 예수님을 나의 예수님으로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공생애의 예수님은 내가 믿어야 될 예수님이 아닌 내가 가져야 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믿으면 공생애의 예수님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 사탄의 일꾼인 거짓 사도들이 하는 일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은 때때로 죄 사함의 사건으로만 이야기하고 공생애의 예수님을 믿게 만듭니다. 기적의 예수님, 병을 고치시던 예수님, 이 땅에 사시던 예수님을 자꾸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공생애의 예수님을 믿는 한 십자가 사건을 통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아버지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따라 갈 수는 없습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때 열두 제자를 부르셨고 이들과 동고동락하셨습니다. 겉으로 볼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음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동상이몽이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바람이 어떠했는지는 누가복음 9장에서 잘 드러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을 기록하며 31절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라고 하였고, 또 51절에서는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라고 기록하며 계속해서 세상을 떠나시고자 하셨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부분뿐만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9장 28절로부터 시작하여 24장 끝까지 별세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세상을 떠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가시는 과정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제자들은 예수님과는 다른 바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자기들이 갖고 있는 비전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께서 왕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독립시키시고 부국강병을 이루기를 바랐고, 자신들은 그러한 나라에서 장관이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녔지만 예수님을 좇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목표점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기만을 바라셨다면, 제자들은 이 세상 안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고 장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열두 제자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좇기 시작하게 된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이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사흘 만에 부활하셨고 다시 제자들을 모으시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심으로 아버지 보좌 우편으로 가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완전히 세상을 떠나 하늘로 승천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따름의 출발점은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의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그 다음 과정인 부활과 승천과 우편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상을 빠져나가야만 합니다. 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에 계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믿어야 하는 본래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본래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내 몸을 장갑 삼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생애 때 예수님의 몸을 장갑 삼아 활동하셨습니다. 사람의 지정의(知情意)와 언행(言行) 즉 생각과 감정과 의지 그리고 말과 행동은 사람의 인격을 이루는 요소입니다. 이 다섯 가지 인격의 요소를 비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다섯 손가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지정의와 언행을 장갑으로 끼셨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바알세불의 힘을 빌었다고 비난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새인들에게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손으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을 보면 손가락을 뜻합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손가락이 쓰시는 장갑이 되셔서 귀신을 쫓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예수님의 공생애의 의미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와 직면한 사람은 아버지의 장갑이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하여 이 땅을 사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셨기에 이 땅에서 공생애를 이루실 몸이 없습니다. 그 예수님의 공생애가 계속되기 위하여 필요한 몸을 우리가 제공해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공생애의 삶은 믿어야 될 예수님을 제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예수님을 믿는 경우에 이루어질 모습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직면하면 예수님의 공생애가 나를 통해서 이루어져 가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공생애가 제시된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0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의미를 이해하고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이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어야 되고 연합해야 되는 예수님, 그리고 사도 바울이 전했던 예수님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의 예수님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적을 일으키시던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하지 않았습니다. 병 고치는 예수님, 오병이어의 예수님, 바리새인과 충돌하시던 예수님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짓 사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아닌 다른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을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랑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보다 땅에 있는 것들이 더 좋게 느껴졌습니다.
간교한 사탄의 일꾼들은 이러한 인간들의 마음 상태를 파악하고 세상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예수를 전했습니다. 다른 예수를 믿었기에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영을 받게 됩니다. 이 세상 것을 더욱 더 좋아하게 만드는 영이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입으로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영적인 단어들을 사용하더라도 그 목적은 세상 것을 얻기 위함입니다.
성령의 역사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 천국을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이 세상보다도 강력한 현실로 느끼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신다면 점점 더 마음은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예수를 믿어서 받는 영이 하는 일은 성령과는 반대입니다. 점점 더 세상을 좋아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지역 예배당들의 상태를 확인해보면 바로 그러한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언을 해보자면 불교는 이 땅에 남아있어도 기독교 종교는 없어지고 흔적만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진정한 교회의 윤곽을 이 세상에 드러내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이 본래 예수님이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본래 예수님과 다른 예수를 분명히 구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본래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뚜렷이 윤곽을 드러내시고 지워지지 않게 해주시오니 감사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