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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2

녹취문: 모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_태승철 (고린도후서 12:11~21)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11.03|조회수59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모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줄거리:

거짓 사도들의 모함에 맞서서 사도권의 정당성을 갈파하는 사도 바울의 어조가 막바지에 달하면서 더욱 강경해집니다. 이제 천국에서 보냄을 받아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의 표시를 총정리하시는 듯합니다. 보냄을 받았다면 사도든 성도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삽니다. 그러면 표시가 나타나는데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과 돈을 좇지 않음과 자기변명 없는 타인 사랑입니다.

 

모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고린도후서 12:11~21)

 

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나는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12.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13.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

14.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16.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17.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19. 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모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모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고린도후서의 내용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는 대로 고린도후서는 사도 바울과 거짓 사도들의 간접적 다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이르러 사도 바울의 어조는 더욱 격앙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에서 오늘 말씀의 주제가 되는 내용은 19절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라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제목으로 정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를 모토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도가 어떤 사람인가를 총정리해주고 있습니다. 19절 앞부분을 보면 “너희는 이때까지 우리가 자기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때까지는 고린도후서를 기록한 모든 내용을 다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치 고린도교인들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처럼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대로 이것은 자기변명이 아니었습니다. 뒷부분을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라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말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 앞에 있을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직면하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변명이나 자기변호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시는 과정을 떠올려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변명이나 자기변호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사도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자기변론의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을 때도 자기변호를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있는 자로서 해야 될 말을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지 신경 쓰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변명이나 자기변호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짐을 뜻합니다. 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19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고 하였던 것처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했습니다. 다만 이렇게 호소하는 사도 바울의 어조는 격앙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심정을 표현해보자면 ‘고린도 교인들아, 너희는 내가 자기변명이나 자기변호를 하는 것으로 아는구나! 그러나 나는 너희를 사랑해서 이러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셈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쓰기 전에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화목한 분위기에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후반에 이르러 이렇게 격앙된 표현들이 등장하게 된 이유는 그만큼 사도 바울이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사도 바울은 스스로 어리석게 여기는 자랑까지도 시도해야만 했습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 교인들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거짓 사도들의 말을 듣고 흔들리고 있었기에 사도 바울은 자신이 거짓 사도들보다도 육체를 따라 자랑할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을 설득한 것은 자기변명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을 붙잡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신의 호소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자기변명을 하는 것이라 여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격앙된 어조로 교인들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 앞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마주 대하는 사람은 특징이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만 성경 66권의 모든 은혜의 약속은 실현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모든 은혜의 약속이 실현되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 세상이 끼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녀의 문제로 고민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자녀의 문제로 고민하는 나를 죽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자녀가 없는 사람처럼 하나님을 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건강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몸이 없어서 건강을 생각할 필요가 없는 사람처럼 되어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돈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문제를 끌어안고 걱정하게 되는 나를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여서 걱정거리가 아예 없는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을 대해야 하나님 앞에 있게 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있게 될 때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집니다. 이 세상에서 내 몸이 어떤 상황과 환경과 문제에 둘러싸이더라도 완전히 자유로워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있기를 모토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으로서 사도 바울이 어떻게 행했는지가 본문 11~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나는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잘못한 것도 없었고 배척을 당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극심한 가난에 처해있었던 마케도니아 지방의 교회들로부터 헌금을 지원받은 일은 있어도 고린도 교회에서 헌금을 지원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어지는 13절을 보면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하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정말로 용서해주기를 바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반어법적인 풍자입니다. 공평하지 못하게 차별대우를 했다면 고린도 교인들은 어떠한 손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정말로 그랬다면 사도 바울이 용서를 비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정작 고린도 교인들은 아무런 손해를 입은 것이 없으면서도 바울의 사도권의 정당성을 의심했고 이에 사도 바울은 풍자적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내가 극심한 가난에 처해있었던 마케도니아 지방의 교회들로부터 헌금을 지원받았으나, 돈이 많은 너희에게는 헌금을 지원받지 않았다. 이것이 너희에게 차별로 느껴졌다면 나의 공평하지 못함을 용서하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또 이어지는 14절을 보면 “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3차 고린도 방문 계획이 언급되는데 3차 방문에서도 고린도 교회를 차별하듯이 헌금 지원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있는 사도로서 고린도 교회에 대한 관심이 사심이 아닌 오직 사랑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는 또 한 가지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12절을 보면 사도의 표로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언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도만의 표가 아닙니다. 보냄을 받은 성도들로 사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야만 하는 내용입니다.

참음은 가능해 보이기도 하지만 대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이러한 일은 목사님들에게서 보기가 힘든 일이기에 옛날 사도들에게서나 나타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이 땅을 사는 자라면 사도든 목사든 성도든 누구에게서나 나타나야만 하는 일입니다.

 

먼저 참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사도의 표가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되실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에게도 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 어려울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참음이 보냄을 받은 사람의 표가 된다는 것일까요?

말씀드린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는 사도 바울의 좌우명이자 모토와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어떤 일을 만나든 누구를 마주 대하든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사람도 만나고 일도 하고 과제도 해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몸으로 만나는 모든 대상 앞에서 반드시 참음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나든 사건을 만나든 몸으로 만납니다. 이는 곧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는 오감을 통해 반응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보냄을 받은 사람에게서는 이러한 즉각적인 반응이 아닌 참음의 기간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참음이라고 표현되는 기간은 대상에 따라 순간적으로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참음의 기간은 대체 무엇을 하는 시간일까요? 보냄을 받은 사람들은 참음의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를 이루어가게 됩니다.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참음이라는 단계를 거치는 것입니다. 항상 십자가를 붙잡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있는 상태를 만들고 난 후에 지정의와 언행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6장 6절에서도 오래 참음을 언급하였습니다. 이 참음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간격이라고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참음이란 몸으로 만나는 상황에 대하여 반응하기 전에 두는 간격입니다. 이것이 보냄 받은 사람들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이러한 간격으로써 참음의 시간을 보낼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있게 되는 상황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기운이 나의 지정의와 언행을 통해 나타날 때 일어나는 일이 표적과 기사와 능력입니다.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거짓 사도와 거짓 신앙에 대항하여 드러나야 될 표입니다. 다만 이것을 사도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기에 부담이 됩니다. ‘평범한 우리에게서 어떻게 사도들과 같은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나타날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라는 개념은 관점의 차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표적이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살아계심이 드러나는 표시(sign)입니다. 어떤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니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임하시고 계신다.’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질 수 없는 하나님께서 나의 지정의와 언행을 통해서 이 세상에 인기척을 드러내시는 것이 표적입니다. 표적이 오감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의 있음을 드러내는 표시였다면, 기사나 기적이나 이적은 인간의 생각과 이해력을 초월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능력은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보냄 받은 자의 표라고 언급합니다.

다만 사도 바울이 말하는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란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의 기적과 같은 일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다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표적과 기사와 능력은 주로 병 고침과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도 병 고침과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나타나야만 한다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시대적 상황과 하나님의 역사를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이 활동하던 2,000년 전에 우리나라는 고대 삼국시대 이전입니다. 지금과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시대의 변화는 단순히 인간의 노력과 역사의 발전을 통한 귀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의해 달라진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의학입니다. 의학은 실로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2,000년 전의 사람이 지금 이 시대에 와서 병원 치료를 본다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 옛날에 나병은 불치병이었지만 이제는 피부병에 불과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란 사도 바울의 시대와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병 고침의 기적이나 능력이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개인적으로 이런 식의 기적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공통적으로 반드시 나타나는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인격적인 차원에서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자면 우리의 인격 속에 숨어들어와 역사하는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의 졸개들인 귀신이 우리의 인격 속에 들어오면 그에 상응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중에 가장 보편적이고 편만한 현상은 바로 이 세상을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라면 제정신으로는 이 세상을 좋아할 수 없습니다. 정말로 천국을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건강을 유지하며 오래 살기를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제정신이면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주님과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가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알면서도 세상에 머물기를 더 좋아한다면 귀신이 들린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을 보면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귀신이 들릴 때 나타나는 특징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곧 세상을 떠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역사할 때 나타나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와 반대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세상 앞에서’가 됩니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직면하고 세상의 기운을 받아들이고 세상에 반응하면서 살아갑니다.

참음이 꼭 필요한 이유는 그리스도 밖에 나가 세상 앞에서 살게 되는 죄적 체질에 대한 간격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참음이라는 간격과 기간을 둠으로써 순간적으로나마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 앞에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있을 때 표적과 기사와 능력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후원금을 강탈하다시피 요구하여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전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와 같아서 헌금하는 것조차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와의 싸움을 마무리 짓는 12장에서 우리 인생에 모토가 될 수 있는 말로 끝맺음을 합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세상 앞에서’ 살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삶으로 바뀔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 거짓된 증명서를 들고 다니면서 자기들의 유익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비단 거짓 선지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 더는 거짓으로 유익을 추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의 인정과 평가로부터의 자유, 이 세상에서 나를 변명하고 변호하고 유익을 추구하는 귀신 들린 삶으로부터의 자유를 느끼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귀신이 쫓겨나간 증거로 사람들의 평가를 전혀 개의치 않고, 내 유익을 전혀 구하지 않으며, 오직 타인의 영혼의 유익만을 위하게 되는 상황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진정한 표적과 기사와 능력입니다. 아무쪼록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모토가 여러분의 일상에서 활발하게 작동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라는 모토를 가지고 ‘그리스도 밖에서 세상 앞에서’의 나를 십자가로 죽이며 보냄 받은 자로서의 표가 나타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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