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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참교인이 버린 교인, 하늘도 버린다>의 줄거리:
하늘에서 버렸음이 땅에서 확정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교인이라는 사람들 중에 있습니다. 아직 교인이 아닌 사람은 하늘에서 버렸는지 안 버렸는지 땅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 교인이 되고 나면 천국이 정말 버린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거짓 신앙의 기준을 명확히 알고 늘 깨어 자기를 시험하는 교인의 마음이 닫히는 교인이 있다면, 그는 천국에서 버린 사람인 것입니다.
참 교인이 버린 교인, 하늘도 버린다
(고린도후서 13:1~13)
1.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2.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참 교인이 버린 교인, 하늘도 버린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참 교인이 버린 교인, 하늘도 버린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중에는 천국에서 완전히 버려지기로 확정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 교인을 통해 이러한 자들을 버리십니다. 하늘에서 버려지는 자들은 교인들 속에 섞여 있습니다. 아직 교인이 아니라면 하늘에서 하나님이 버리셨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교인이라 불리고 있다면 참 교인과의 교제를 통해 버려짐의 여부가 드러납니다. 여기서 참 교인이란 거짓 신앙의 기준을 명확히 알고 늘 깨어 스스로를 시험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참 교인의 마음이 닫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서 버려진 사람입니다. 이것은 제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기록된 말씀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교회에 관해 말씀하심을 기억합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가셨을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대답에 기뻐하시며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의 권세를 드러내며 예수님의 말씀이 어떻게 실현되는지 보여줍니다.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지난 시간에 ‘모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 안에는 그리스도가 계시고 하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과 관계를 하는 교인 중에서 특정한 반응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 반응이 마음의 닫힘으로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대해서 외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철저히 짊어지고 다니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연쇄 과정 속에 있으면서 하늘에 머무르며 하나님을 대면하는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고 가정해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여러 교인들과 대면하는 중에 유독 마음이 닫히는 교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교인은 하늘에서 버려졌기 때문입니다.
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먼저 교인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하여 교인이 된 사람 중에 진짜 교인이 아닌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 중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버림받은 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참 교인들의 마음이 그들을 향하여 닫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쓴 후에 에베소에서 2년 6개월간 사역을 합니다. 그러던 중 고린도 교회가 거짓 사도들에 의해서 영적으로 파탄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급한 마음으로 계획에 없던 방문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거짓 사도 축출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에베소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를 시작하며 말씀드렸던 사도 바울의 마음 아픈 방문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이른바 ‘눈물의 편지’라 불리는 서신을 보내게 되는데 이를 통해서 고린도 교회에서 회개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다만 여전히 거짓 사도들은 존재하고 있었고 바울의 사도권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마케도니아 지방으로 이동하여 또 다른 서신을 기록하게 되는데 이것이 고린도후서입니다. 그리고 이때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3차 방문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둔 사도 바울의 결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차 방문에서도 거짓 사도들에게 현혹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보게 된다면 더는 참지 않고 권징을 하고 징계를 내리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권징과 징계란 바로 파문이나 출교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거짓 사도와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내쫓을 것을 분명히 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대체 바울이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권징을 하겠다는 것일까요? 때는 55~56년경이었습니다. 당시 교회가 교인들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 수위의 권징이란 출교였습니다. 다만 이것이 실질적으로 어떠한 효과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의아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이 된 것은 313년입니다. 로마 제국 전체를 지배하는 유일한 종교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라면 파문이나 출교는 치명적 사건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지배하는 로마에서 출교자의 낙인이 찍힌다면 사회생활 자체가 극심한 어려움에 봉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후서를 기록하던 55~56년경의 교회는 소집단에 불과했습니다. 어느 지역이든 교회는 하나로 묶여있지 않았고,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팔레스타인 출신의 예수라는 사람을 추종하는 소집단(sect)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어떤 교인을 출교시켜 교회 바깥으로 쫓아냈다고 하더라도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사실상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은 것과 똑같았습니다. 고린도 시의 입장에서는 예수를 추종하는 소집단에서 한 명의 사람이 빠져나온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출교는 고린도 시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교회로부터 출교시키거나 파문을 하는 권징을 행하는 것이 두려워할 만한 일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다만 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무척 무서운 일입니다. 출교를 언급하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은 지금 하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교인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는 것은 사도 바울 안에 거하시는 주님이 그 교인을 버리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출교는 사회적으로 무서워할 일이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져 구원으로부터 영원히 배제되는 무시무시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끝내 돌이키지 않는 교인들에 대해서는 바로 이러한 일을 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사도 바울의 출교 명령은 단순히 교회라는 모임으로부터 내쫓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에서의 출교는 곧 천국에서 쫓겨나는 것이었고 천국의 문을 영원히 닫아버리겠다는 선고였습니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입니다.
다만 기독교 내에서는 이러한 권징과 징계가 많이 오용되어 왔습니다. 특히 이러한 일은 이단에서 자주 발생합니다. 별의별 이단 교주들이 정당한 사도의 징계를 악용하여 교인들을 교단 내에 묶어두려고 합니다. 이러한 일은 전혀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기독교 종교에 기생하는 이단들의 역사 속에서는 왕왕 있었던 일이고 지금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금도 거짓 목사나 이단의 교주들은 교인들을 협박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목회 현장을 떠나면 구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협박과 거짓말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제시한 참과 거짓의 기준을 알고 있습니다. 이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끝없이 적용하며 살고 있는 사도나 목사나 교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닫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 사도이고 거짓 교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하늘이 버렸다는 증거이기에 정말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본 장은 바로 이렇게 신앙의 참과 거짓의 기준을 가진 참 교인들이 얼마든지 거짓 교인들을 향해 천국 문을 닫는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무섭고도 너무나도 조심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이 역할을 함부로 남용한다면 당사자가 제일 먼저 버림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역할을 남용하지 않기 위해서는 참 교인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면 됩니다. 5절을 보면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올바른 기준을 가지고 끝없이 나 자신을 시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올바른 기준이란 바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3절을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목사님들이 예배의 마지막에 하는 축도(祝禱)의 원형이 바로 이 구절에 있습니다. ‘축도’라는 말을 보면 빌 축(祝)에 빌 도(禱)입니다. 문자적으로 보자면 복을 빈다는 뜻이 중복되고 있기에 말이 안 된다는 비판적 시각이 있기도 합니다만, 의미적으로 보자면 이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가 이루어진 상태의 기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참과 거짓의 기준입니다. 은혜란 공짜로 받게 된 선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공짜로 받은 선물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짐을 통하여 예수님과 연합하게 되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게 됩니다. 그럴 때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은혜가 주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다만 나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만나려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내용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채움과 만족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제공해주십니다. 이 세상에는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여겨지는 대상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마음의 만족과 채움의 대상으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입니다. 세상의 모든 만족과 채움 거리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고, 오직 하나님만을 마음 채움의 대상으로 선택하고 붙잡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란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 자신을 우리의 마음 채움을 위해 주시는 것 이외에 무엇도 더 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내 것으로 만들게 되면 성령의 교통하심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의 교통하심이 어떤 것인지를 고린도후서 11장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지정의(知情意)와 언행(言行)이라는 다섯 손가락의 장갑이 우리의 인격입니다. 하나님의 손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장갑으로 끼시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해 나가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교통하심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하는 참 교인의 기준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안으로 들어갔는지,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계신지를 확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확증되면 하나님 자신을 내게 주시는 사랑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 자신을 직면할 때 하나님을 소망하는 마음으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 성령의 교통하심이 일어납니다. 성령님이 나의 지정의와 언행을 장갑으로 끼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가시게 됩니다. 이 기준을 가지고 주변의 교인들을 바라보면 가짜 교인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5절을 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대로 나 자신이 정말로 믿음 안에 있는가를 시험하고 확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믿음 안에 있음을 확증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다 같은 교인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온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목사님들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목회하는 예배당에 들어오는 교인들이 버려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추호도 생각 못 합니다. 내가 목회하는 현장에 들어오면 구원을 받는다고 목사님들 스스로가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의 마지막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정말로 그리스도의 사람인지를 시험하고 확증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그동안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사도권의 정당성을 의심했던 것과는 반대의 상황입니다. 저도 목사이고 목회를 했지만 목회 현장에서 교인들을 향하여 ‘여러분이 정말로 믿음 안에 있다면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계셔야 합니다. 이 사실을 확증하여 스스로 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약 이것을 알 수 없다면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자이고 천국 문이 닫힌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마음에 계신지의 여부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여부를 알지 못하면 버림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없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은 교인도 아닙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단계까지 전도를 해야 될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고 믿고 있다고 하면서도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음을 확증할 수 없고, 예수님이 내 마음에 들어와 계심을 확증할 수 없다면 버림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끝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 들어와 계심을 어떻게 확증하실 수 있습니까? 거꾸로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있음을 어떻게 확증하실 수 있습니까? 다른 모든 교인이라 하는 자들은 확증하지 못하더라도 여러분은 확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 안에 들어간 사람이고 예수님이 그의 안에 들어오신 사람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는 자아의식이 유지되고 있음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다는 첫 번째 증거입니다.
내게 그러한 자아의식이 있다면 나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가장 우선적으로 의식되는 상태가 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더는 세상에 있는 대상들이 마음의 첫 번째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에서는 하나님이 첫 번째 의식의 대상이 되십니다. 비가 오고 눈이 와도 하나님께서 내리게 하신다고 의식하게 됩니다. 가족을 대할 때에도 하나님을 먼저 보고 가족을 대하게 됩니다.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로 여겨집니다. 내게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심지어 병이 나더라도 내 마음에서 하나님이 먼저 의식된 후에 몸의 병이 보이게 됩니다.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다는 두 번째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나의 지정의와 언행이 성령님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축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마지막으로 거짓과 참을 가려내는 기준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예배를 마칠 때 목사님들께서 양손을 들고 하는 것만이 축도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목사님들만 하라고 축도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이 축도는 여러분이 자신에게 적용해야만 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하루 종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내 것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잊지 않는 것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내 것으로 만드는 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주시는 사랑도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내 것으로 삼고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가 유지되면 나의 지정의와 언행이라는 다섯 손가락의 장갑을 성령님이 끼시는 교통하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참 교인의 모습으로 살다 보면 이러한 이야기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거짓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 교인들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이 닫힌다면 하늘에서 천국의 문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하나님이 자신을 주시는 사랑과 성령님이 나를 장갑으로 끼시는 교통하심이 오늘부터 시작하여 여생의 마지막 날까지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마지막 축도가 나의 삶에서 끊임없이 적용되어야 할 모토이자 좌우명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스스로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확증하면서 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