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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2

녹취문: 비난받을 때 하나님께 책임 돌릴 자격_태승철 (고린도후서 1:12~24)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9.26|조회수48 목록 댓글 0

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비난받을 때 하나님께 책임 돌릴 자격>의 줄거리:

하나님이 사도나 성도의 세상 속 삶을 주권적으로 이끄실 때도 그 경로를 재탐색하시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전지전능하신 분이 일단 세우셨던 계획을 수정 변경한다는 것이 얼른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밝혔던 여행 계획을 변경하였다가 신실하지 못하다고 비난을 받자 오로지 그 책임을 하나님께 다 돌리는 듯 말씀하십니다.

 

비난받을 때 하나님께 책임 돌릴 자격

(고린도후서 1:12~24)

 

15.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16.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으니

17.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

18.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19.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비난받을 때 하나님께 책임 돌릴 자격>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비난받을 때 하나님께 책임 돌릴 자격”

제목은 비난 받을 때 그 모든 비난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격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모든 비난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자격이 무엇일까요? 그 자격이 있으면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의 결과와 성패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 할 수 있게 됩니다. 또 이런 자유를 느끼는 사람에게 인생은 하나님의 뜻이 결실하는 내용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한편, 비난받을 때 책임을 밝히는 것은 그 비난이 터무니없는 내용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얼마든지 잘못으로 보일 만한 일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어떤 내용이 펼쳐지고 있기에 비난에 대해서 하나님께 책임 돌릴 자격을 운운하고 있는 것일까요?

 

본문은 거짓 사도들에 의해서 현혹된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 바울에 대하여 비난하는 내용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비난의 내용이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쓰기 전에 보냈던 편지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편지는 이전 시간에 말씀드린 일명 “눈물의 편지”라고 불리는 서신과는 다릅니다. “눈물의 편지”가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사이에 보낸 편지였다면 이러한 내용을 알 수 있는 서신은 고린도전서 전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 편지에서 여행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에서 지금 터키의 서쪽 바닷가 끝 에게해에 속한 도시 에베소에서 2년 6개월이라는 긴 기간을 머뭅니다. 고린도전서도 이 기간에 쓰였습니다. 이후에 고린도후서는 마케도니아에서 쓰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쓰기 전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먼저 서신을 보내어 여행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밝힌 여행 계획을 보면 에베소에서 배를 타고 에게해와 지중해를 지나서 그리스 발칸반도의 남단에 있는 고린도에 들린 후 북상하여 마케도니아로 가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마케도니아에는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베뢰아 교회 등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마케도니아 지방의 교회를 돌아본 후에는 다시 고린도로 돌아와서 지중해를 건너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편지를 보낸 이후에 계획은 변경되었고 에베소에서 지금의 터키 북쪽으로 여행을 한 후에 에게해를 건너서 마케도니아에 먼저 들리게 됩니다. 마케도니아에 있다가 고린도로 와서 겨울을 지내고 지중해 항해가 용이해졌을 때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첫 번째 계획이 바뀐 사실을 놓고 거짓 선지자들이 교인들을 책동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정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라면 계획이 바뀌는 일은 없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사도의 특징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기에 중요한 전도여행의 계획을 손바닥 뒤집듯이 바꿀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여행 계획의 변경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어 전도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진짜 사도가 아님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겠느냐고 비난하였던 것입니다. 여행 계획 변경에 대한 비난 자체는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사도 바울의 사도권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입니다. 바울의 사도권이 의심받는다면 바울이 전한 복음 자체도 무산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데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변명하거나 자기를 변호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본문을 요약해보자면 “내가 잘했다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직 사도이자 성도로서 복음 안에 들어가서 만나게 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취할 바를 취했을 뿐이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모습은 비난을 벗어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비난을 계기로 다시 한번 복음에 대해 취해야 될 태도에 대해 자세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복음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겠다. 그러한 태도를 취할 때 사람들로부터 지금 내가 당하는 것과 같은 비난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에 대하여 올바른 태도를 취했다면 비난을 받든 칭찬을 받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17~19절입니다. 17절을 보면 “이렇게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혹 계획하기를 육체를 따라 계획하여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여행 계획은 변경되었고 사도 바울은 그것을 편지로 알렸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에 대한 비난은 정당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전도여행의 계획을 교인들에게 드러내 밝힐 정도면 확정적인 사실이었는데 그것을 다시 뒤집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근거로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 함께함에 대해 의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너희는 내가 소홀하게 육체를 따라 여행 계획을 세웠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자면 뻔뻔한 대답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라는 문장은 문맥상으로는 “이랬다 저랬다 하겠느냐”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시면 될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문맥상의 뜻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사도권의 정당성에 의심을 품은 자들은 거짓 사도들과 그들에게 책동된 고린도 교인들뿐만이 아닙니다. 이 글을 읽는 우리도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12~1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대할 때 처신 방법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12절에서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 복음 사건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신실하심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란 곧 하나님이 최고로 좋으심입니다. 거룩함은 곧 가장 좋은 방향으로 구분됨입니다. 감옥에 들어가는 것처럼 나쁜 방향으로 구분됨이 아니라 좋은 방향으로 구분됨입니다.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만큼 최고로 좋은 상태로 구분되어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대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은 신실하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누구도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옳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신실하심을 대하는 중에 고린도 교인들을 대했음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몸은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님에 의해서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였는데 어떻게 계획이 변경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이어서 19절을 보면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실라의 로마식 표현)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미쁘심은 믿음직함입니다. 어떤 사람의 신실함과 정직함을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경우에 “미쁘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신실하지 못하며 경솔하게 비난받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미쁘심에 대하여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미쁘심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미덥지 못하다고 비난했지 하나님의 미덥지 못함을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굳이 하나님은 미쁘시다고 합니다.

이것은 십자가 복음 사건과 연관이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마음이 십자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면 마음은 주님 안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상태가 됩니다. 세상의 있음과 세상의 좋음과 세상에 대한 주권이 죽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의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이제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마음이 이 세상 것과 연관되고 연결되고 유착되어 있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세상으로 더러워진 상태에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섰다가는 죽임을 당해야 마땅할 뿐입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할 때만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 하나님이 미쁘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고 정직하시다는 뜻입니다.

“…예 예 하면서 아니라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겠느냐”라고 한 것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했던 모든 말과 행동과 처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난 미쁘신 하나님께서 주신 일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을 통해 나온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미쁘심으로부터 나온 계획과 뜻에 대해서 단 한번도 거절을 해본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미쁘심으로부터 나온 계획과 뜻에 대한 거절이란 말씀드린 대로 육체를 따름입니다. 마음이 십자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예수님 바깥으로 나와서 육체와 결합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육체가 보고 듣는 것에 대하여 마음이 반응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육체에 속한 상태가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잘났다 못났다, 바르다 그르다, 잘했다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입장에서 비난을 하는 것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일임에 대해서도 이해해 달라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십자가 생활화를 하고 있는 사도 바울에 대해 온전히 알고 있지 못함을 말합니다. 그렇기에 여행이 변경 된 일로 인해서 비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자신에게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밝힙니다. 세상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하나님께서 바울의 몸과 입술과 생각에 넣어주시는 계획과 내용들은 바울이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 바깥에 있기에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것들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아니라 아니라”라고 하지 않더라도 이는 곧 행동과 생각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반대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갔을 경우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니라 아니라”라고 할 수 없고 오직 “예 예”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만남 속에서 오직 “예 예”라고 하시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첫 번째 여행 계획을 고린도 교회에 전했을 때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서 미쁘신 하나님과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미쁘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행 계획을 알려주셨고 바울은 그에 대해 “예 예”라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여행 계획을 짰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계획을 고린도 교회에 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소식을 보냈던 고린도 교회에서 사람들이 와서 교회에서 분열이 일어났음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더 이상 교회도 교인도 아니었습니다. 영적으로 개판이 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편지로 보내게 됩니다.

그러는 중에 전도여행의 계획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에서 곧바로 고린도로 가지 않고 터키 북쪽을 지나 에게해를 건너서 마케도니아를 거치며 도중에 시간을 버는 계획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다만 고린도로 가는 시간이 연장되자 고린도 교인들은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교회가 분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계획을 바꾸어 시간을 끄는 모습을 보고 엉터리가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사도 바울이 왔을 때 하고 싶었던 일들이 있고 계획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무산되었으니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의 변경은 결코 사도 바울의 자의나 소홀함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바깥으로 빠져나와서 세상일에 대하여 육체로 반응한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첫 번째 계획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뜻을 “예 예”라고 받아들여 전한 것이었고, 변경된 두 번째 계획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뜻을 “예 예”라고 하면서 전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계획의 변경 또한 사도 바울의 책임일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에 대해 예스맨이었기에 자의로 결정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계획이 변경된 것에 대해 비난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을 비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쁘시기에 비난받으실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20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계획을 바꾸셔서 알려주시더라도 그 미쁘심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태라면 하나님의 뜻이 바뀔지라도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하나님, 왜 이랬다 저랬다 하십니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바뀌었어도 오직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알게 되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평가하고 질문하거나 의심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주권자이심을 밝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십자가 생활화를 했다면 사도 바울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왜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 계획을 바꾸게 하셨을까?”라고 이야기할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않았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기에 앞서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수준에서 사도 바울을 이해하고자 했고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생각처럼 육체의 지혜를 따라서 경솔하게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에 대한 비난은 오히려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드러내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사야 45장 9절을 보면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계획을 바꾸실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 계획을 변경하신 것일까요? 본문을 통해 말씀드려보자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려고 할 때 첫 번째 전도여행 계획에서는 에베소에서 곧바로 고린도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마음이 부풀었음을 이야기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보고 기뻐할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이전에 쓴 편지에서 드러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 이후에 사람들이 와서 하는 이야기를 듣고 이러한 기쁨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전도여행의 계획을 주셨기에 기쁨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제 고린도 교인들을 만나겠구나.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오직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하고 사역을 했다. 그러므로 그들도 십자가 생활화를 할 것이고 지금은 나처럼 거룩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평강의 하나님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나며 살고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고린도 교인들을 만나는 게 얼마나 기쁘겠는가?”라고 기쁨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여행에 대한 첫 번째 계획을 말씀해주심을 통하여 복음을 생활화하는 성도들의 만남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기쁨이 발생되는 만남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고린도 교회의 소식이 전달되었습니다. 이미 십자가 생활화는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고 일반인들보다 더 악해져서 더는 교인이라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전도여행의 계획을 변경하십니다. 고린도 교회는 아볼로파, 게바파, 바울파, 그리스도파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아직 복음 안으로 들어오는 일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예정대로 도착하였다면 게바도 없고 아볼로도 없고 그리스도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바울파가 득세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어필할 수 있는 상황 자체를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이며 끊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을 아시고 계획을 바꾸셨던 것입니다. 첫 번째 계획은 고린도 교인들이 온전한 복음 생활을 했다면 나타날 수 있는 만남에 대한 기쁨을 사도 바울에게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두 번째 계획은 이들을 다시 복음 안으로 들어가게끔 하는 작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첫 번째 계획대로 고린도를 향했다면 바울파가 득세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교인들은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울을 의지하고 바울을 붙잡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여행 계획을 바꾸게 하십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계획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르쳐 가시는 과정이 이러한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첫 번째 계획을 통해서는 기쁨의 기대를 갖게 하십니다. 이 기쁨이 고린도 교회를 위한 편지 사역과 디모데와 실라를 보내는 사역의 대처방안을 통하여 이루고 싶은 목적이 됩니다. 본문 24절을 보면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에 섰다는 것은 온전히 섰다는 의미가 아니라 믿겠다고 작정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이 기쁘도록 돕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사도 바울과 모두가 다 만났을 때 누릴 기쁨이 출발점이 아니라 목적지로 두고 디모데와 실라를 보내고 또 편지를 보내는 사역을 통해서 하게 됩니다. 디모데와 실라가 가더라도 할 이야기는 십자가에 대한 것뿐입니다. 편지에서도 할 이야기는 십자가로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부각되어야 할 것은 사람이나 편지가 아닌 십자가뿐이었습니다.

이처럼 공통되게 계속성을 띠고 언급되어야 할 것은 십자가뿐입니다. 바울은 물론이거니와 아볼로나 게바나 디모데나 실라에 대한 의존성에서 탈피해서 십자가 예수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을 위하여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 바울이나 디모데나 실라와 같은 사역자들과 완전히 결별하고 십자가만 붙잡고 난 뒤에는 본래 계획되었던 만남의 기쁨을 함께 누리자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되면 “우리가 살아있을 때 사도 바울을 못 만났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사도 바울 말고는 아무도 우리에게 십자가 복음에 대해 이야기해 준 사람이 없었다. 사도 바울이 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생명의 부활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자랑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눈 뜨고 보니 자기가 전한 복음을 듣고 생명의 부활을 받은 자들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교인들을 보면서 “내가 그렇게 마음 졸이면서 십자가 복음을 전했는데 잘 받아들였구나. 이 세상을 십자가로 살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보여 이제 드디어 부활의 생명을 받게 되다니! 자랑스럽다.”라고 여기리라는 것입니다.

 

살면서 받는 모든 비난에 대해 하나님의 미쁘심과 정직하심과 신실하심에 책임을 돌릴 수 있는 자격자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내가 하는 모든 일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 중에 많은 부분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염려입니다. 이런 모든 사람들에 대한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에 대하여 예스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서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기쁨을 찾지 않고 세상의 어떤 존재감보다도 하나님의 존재감을 먼저 의식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 안에 들어가 세상에 대한 죽음이 확실하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실 때처럼 직접 음성을 들려주시지 않을지라도 내게서 떠오르는 생각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일 확률이 굉장히 높습니다. 그 생각대로 살아가실 때 사람들이 비난을 한다면 “나는 하나님에 대해 예스맨일 뿐이다.”라고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에 대한 예스맨이 되심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갖고 있는 평가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칭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좋게 평가할 때에도 자만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예스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을 받아들여서 말하고 행동했을 뿐이기에 자랑거리가 될 수 없고 비난을 해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비난이면 하나님께로 책임을 돌리고 칭찬이면 하나님의 공으로 돌릴 수 있는 자격자들이 되셔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상 모든 사람들의 평가와 비난에 대하여 하나님께 책임을 돌릴 자격을 얻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오늘도 십자가만 바라보며 마치 육체가 죽은 자처럼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게 해 주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만을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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