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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게서 나는 내 냄새와 그리스도 냄새>의 줄거리: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담담하게 자신의 십자가 생활화 실패 사건을 전제하고 말씀하십니다. 즉, 사도 바울 자신의 인격의 냄새를 그대로 노출하였을 때 나타나는 결과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죽이고 그래서 자기 냄새 대신에 그리스도의 냄새가 날 때의 결과를 대비하십니다. 내게서 나는 내 냄새는 죄와 실패의 악취이고 그리스도의 냄새는 의와 승리의 향기입니다.
내게서 나는 내 냄새와 그리스도 냄새
(고린도후서 2:1~17)
1.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2.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3.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4.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게서 나는 내 냄새와 그리스도 냄새>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내게서 나는 내 냄새와 그리스도 냄새”
영적인 차원에서 볼 때 내게서 인격의 냄새가 여과 없이 그대로 난다면 그것은 악취입니다. 내게서는 그리스도의 냄새만 나야 합니다.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하나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사도 바울은 너무나 담담하게 자신의 십자가 생활화의 실패에 대한 사실을 전제로 하고 본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함에 있어서 어려운 점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십자가 생활화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감히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본문을 본다면 내용을 오해할 수밖에 없고,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을 통해 전달하려는 진의를 깨닫기 어렵습니다.
1절을 보면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부터 잘못에 대한 깊은 뉘우침이 느껴집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일어났던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임을 깊이 깨닫고 굳게 결심하고 있습니다. 다만 십자가 생활화를 철저히 수행하는 중에 있었던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깜짝 놀라고 충격을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이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뉘우치고 결심할만한 일을 어떻게 했다는 것일까요?
다윗 같은 성군도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인 우리야를 간접적으로 살인하는 극악무도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 앞에서 “우리 같은 사람도 아니고 다윗 같은 성군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라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을 대할 때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시 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우리 같은 사람들의 입에서나 나올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생활화의 주창자이며 실천의 모범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입에서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말이 나왔으므로 이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쓰고 난 후에 급하게 고린도 교회를 방문합니다. 이러한 행적은 사도행전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급하게 고린도 교회를 방문한 이유는 거짓 사도들에게 현혹된 교인들이 사도 바울의 사도권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권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은 바울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방치한다면 바울의 사도권이 무너질 뿐만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서 심각한 훼손이 가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다급한 마음으로 졸지에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였고 교회 내에서 성행하고 있던 오류와 악함의 원인을 제거하고 이와 관련된 사람들을 견책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고린도 교회 방문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고 사도 바울은 에베소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 아픈 방문에 대해서 1절을 보면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라는 후회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에게 어떤 잘못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 내용은 2절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라고 하였습니다. 번역을 참 어렵게 해놨다는 생각이 드는 구절입니다. 간단히 풀어보자면 “내 마음에 생긴 근심을 너희에게 전도했다.”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근심 어린 마음으로 방문했음에도 고린도 교회를 회복시킬 수 없었던 이유는 복음을 확인시키는 작업을 했던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근심을 옮기는 선에서 그쳤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습니다.
한편 12절을 보면 디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때의 상황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쓴 뒤에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현혹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에 크게 근심하게 되었고 고린도 교회를 급히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방문은 사도 바울의 근심을 교인들에게 전하는 수준에서 끝나게 되었고, 사도 바울은 돌아온 이후에 “눈물의 편지”를 쓰게 됩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디도의 편에 고린도 교회로 보냅니다. 이후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출발해 지금의 튀르키예(터키)의 북서쪽에 있는 드로아 항구로 갑니다. 그리고 디도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전한 후 마케도니아가 있는 발칸 반도의 북부를 거치고 에게해를 건너 사도 바울과 합류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다려도 디도는 오지 않았고 이에 사도 바울은 다시 심령이 편치 못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12~13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고 하였습니다. 드로아에서 말씀사역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되었으나 만나기로 했던 디도를 만나지 못하게 되자 마음이 편치 못해 제대로 전념할 수가 없었다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드로아에서 기다리지 못하고 디도가 고린도로부터 돌아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가기로 합니다. 장소를 앞당겨서 디도를 만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한 후에 이어지는 14절의 내용을 보면 논의의 내용이 확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이야기가 발전되었습니다. 심령이 편치 못함을 드러낸 후에 갑자기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이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서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라고 번역된 부분을 직역해보면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이기신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이기게 하는 게 아니라 나를 이기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이 “나를 이기신다”라는 말을 이상하게 여겨서 “나를 이기게 하신다.”라는 식으로 이해하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이기신다. 그리고 각처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게 하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약속했던 드로아 항구에서 디도와 합류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의 마음에 또 다시 근심이 생기게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 원래 있었던 근심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바람대로 믿음을 회복하지 못했고 거짓 사도들의 획책이 더욱 극명하고 악랄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사도 바울은 디도가 박해를 당하든지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염려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드로아에서 말씀사역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걱정과 근심으로 사역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소를 앞당겨서 마케도니아로 갔고 그곳에서 디도를 만나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은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 바울이 보낸 “눈물의 편지”를 읽고 회개의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는 이러한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이 거짓 사도들의 획책을 뿌리 뽑고자 다시 보낸 편지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사도권의 정당성을 더 강화시켜서 설득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14절에서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라고 하였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씀드렸듯이 “이기게 하시고”라고 번역된 부분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이기셨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또 한 번 십자가 생활화에서 실패하였음을 인정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생활화에 실패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라이벌이 되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과 라이벌이 될 만한 존재가 독자 이삭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바치기를 요구하십니다. 사도 바울에게 자식이라고 할 만한 대상은 바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교회와 연관된 일만 생기면 사도 바울은 자꾸만 십자가 생활화에 실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에 이러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의 신변만을 걱정했던 것이 아닙니다. 디도가 향했던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더 악화되지는 않았을지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고린도 교인들은 복음으로 낳은 자식과 같았습니다. 예를 들면 자식을 미국에 유학 보낸 부모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로부터 한 달 동안 소식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부모의 심정이 어떨지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심정을 가지고 고린도 교회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드로아에서 말씀사역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의 신분에서 이렇게 십자가 생활화의 실패를 고백하는 것은 결코 자랑일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담담하게 십자가 생활화의 실패를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이기시고,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냄새를 풍기게 하신다.”라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사도 바울이 마케도니아로 왔을 때는 속에서 일어나는 근심과 걱정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마케도니아에 와서 정신을 차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디도와 고린도 교회에 관련된 일들로 인해 근심과 걱정에 끌려가던 마음을 하나님이 이기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자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몸을 통해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셨다면 하셨을 말과 행동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냄새를 나타나게 하셨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가 구렁텅이에 빠질 것 같은 위협을 느꼈고 마음이 다급해졌습니다. 그 결과 드로아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다급해진 마음으로 마케도니아로 가게 됩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냄새가 아닌 사도 바울의 인격의 냄새가 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과거에 있었던 두 차례의 실패를 회상하며 다시는 십자가 생활화에 실패하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이 두 차례의 실패를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실패는 고린도 교회에 거짓 사도들이 들어와서 사도 바울의 사도권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한 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조차 의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태에 무척 놀라게 됩니다. 마치 멀리 떨어진 자식의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의 심정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근심을 가득 안고 고린도 교회로 갔으나 그러한 상태에서는 그리스도의 냄새를 풍길 수 없었고, 교회를 걱정한다는 자신의 인격의 냄새만을 풍기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목사님들의 경우 교회나 교인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은 괜찮은 것인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이 세상을 내려다보시던 하나님의 마음이 성령님을 통하여 이전됩니다. 이럴 때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근심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세운 교회”라는 생각을 가지고 교회나 교인의 상태에 대해 근심 걱정을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목사님들께서 교인을 사랑하고 계신다면 어떤 마음으로 사랑하고 계시는지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세운 교회라서 사랑하신다면 그 목사님은 교인들과의 모든 만남에서 그리스도의 냄새가 아닌 인간의 냄새를 풍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없는 인간의 냄새는 전부 악취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조차 이러한 실패를 경험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바로 세우겠다고 해서 갔지만 사도 바울에게서는 그리스도의 냄새가 아닌 인간의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루어진 방문은 소기의 목적을 전혀 달성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눈물의 편지”를 쓰게 됩니다. 이에 대해 4절의 고백을 보면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마음이 이전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사랑이었습니다. 눌림과 걱정을 언급함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방문했을 때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회개의 역사가 편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이 편지를 쓸 때 사도 바울에게서는 고린도 교회를 향한 인간적 근심과 불안이 정복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루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기뻤고 그 기쁨에서 고린도 교회를 보았습니다. 그러자 고린도 교회에 이러한 기쁨이 없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면서 교회를 보고 슬퍼하는 것과 마음이 교회에 사로잡히고 불안에 정복당한 상태에서 교회를 보고 슬퍼하는 것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생긴 기쁨으로 세상을 볼 때 슬픔이 생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 나와 하나님 사이에는 기쁨이 생깁니다. 먼저 기쁨이 있고 세상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마음으로 슬퍼함도 가능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첫 번째 실패였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보자 마음속에 그 상황이 훅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들어온 근심과 불안을 가지고 달려갔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 기쁨이 없었기에 기쁨의 능력과 힘을 전도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이 인간적으로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에서 갖게 되었던 근심만을 전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입장에서는 찾아온 사도 바울이 무엇인가 열심히 하려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 전달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악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디도에 대한 걱정에서 생겼던 사도 바울의 두 번째 실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안에 들어가서 디도와 고린도 교회로 인해 생긴 걱정을 하나님께서 정복하셔야 했고, 그리스도께서 이기셨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케도니아에 와서 디도를 기다리는 중에 그러한 깨달음을 얻었기에 14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기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사이에 있었던 “눈물의 편지”를 쓰기에 앞서 급하게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그 방문에서 사도 바울은 인격의 냄새를 풍기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냄새가 아닌 인간의 냄새를 맡았던 교회는 나아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디도의 문제에 있어서도 같은 실패를 저지르고 맙니다. 영적인 자식들의 문제가 있으면 자꾸만 십자가 생활화에서 실패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말씀사역의 길이 열렸는데도 하지 못한 채 마케도니아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일은 결코 자랑일 수 없으며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는 말씀사역을 위해 부름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고백을 하는 이유는 이로부터 십자가 생활화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이 불안과 걱정을 이기십니다. 그리고 이제 나의 몸으로는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셨다면 하셨을 말과 행동을 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향기이고 냄새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장군들이 황제의 명령을 받아 전쟁에 나가서 이기고 돌아오면 주피터 신전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그때 주피터 신전을 향해 갈 때 포로들도 끌고 갑니다. 이 개선행렬은 전쟁을 마친 병사들과 포로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안 좋은 냄새가 날 수 있었습니다. 승리의 기쁨이 악취에 의해서 훼손될까 길거리에서도 향을 피우고, 주피터 신전에서도 제사를 드리기 전에 향을 피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선행진이 이루어질 때는 온 로마 시가 향기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피터 신전까지 행진이 끝나고 나면 포로로 잡혀온 자들 중에서 몇몇 중요한 자들을 골라내어 목을 쳤습니다. 로마 시민들과 병사들과 장군에게 이 향기는 개선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이었습니다. 악취 나는 전장에서 뒹굴다가 돌아왔다는 기쁨을 더욱 크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반면 포로들에게는 이 향기는 죽음의 향기였습니다. 이들은 로마 군인들이 포로를 어떻게 대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던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의 향기에 대한 언급은 로마군의 개선의 향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가 무슨 문제를 보든지 마음에 근심과 염려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불시에 방문했을 때나 드로아에서의 말씀사역을 포기하고 디도를 만나러 갔을 때와 같습니다. 이럴 때 세상일 때문에 생긴 근심과 걱정을 가지고 움직이면 내게서는 나의 악취가 나게 됩니다. 그렇게 악취가 날 때는 아무런 영적인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진짜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걱정과 근심이 있을 때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은 그것이 아무리 급한 일일지라도 먼저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가장 귀하고 급한 일은 교회와 교인들이었습니다. 교회와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자식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자식이 있고 소중한 무엇인가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것에 문제가 생길 때 십자가를 바라봄을 포기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서 일어났던 실패를 우리에게 담담한 심정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 생활화에 실패했을 때 세상일에서 생긴 근심과 마음을 품고 그 일에 임하면 백발백중 성과도 없고 진전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냄새가 되어야만 합니다. 내 인격의 냄새 덩어리가 되면 안 됩니다. 무엇이든지 이 세상에서 내 냄새를 풍기고 접근하는 것들은 다 실패라고 보면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냄새를 풍겨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와의 만남 전에 십자가를 다시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랬더니 그리스도 안에서 고린도 교회와 디도에 대해 생겼던 불안을 하나님이 이기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불안을 이기고 디도를 만나자 드디어 고린도 교회가 회개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기쁜 소식을 듣고 마음이 벅차오름을 느낌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길 때에만 영적인 결과들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회개의 움직임이 일어나기만을 바랐지만 갑작스런 방문을 통해서도 그것을 이룰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붙잡고 쓴 한 통의 편지로 회개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집필함에 있어서 다시는 이러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이는 곧 나의 인격의 냄새를 풍기는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향하여 영적인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근심과 걱정을 안고 그대로 나간다면 영적으로 무력한 상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악취를 풍기며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밖에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근심과 걱정이 생길 때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붙잡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세상 때문에 생긴 나의 근심과 걱정을 이기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몸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셨다면 하셨을 말과 행동을 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날 때 하나님의 뜻이 땅을 향하여 이루어지는 실질적인 열매들이 눈에 보이게 맺힐 수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내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더라도 나를 튕겨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바로 내가 풍기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적국 포로의 입장에서 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영적으로 본질적으로 싫어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길수록 한쪽에서는 영적인 열매가 맺히는 대신에 다른 한쪽에서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것을 너무나도 싫어합니다. 로마군에 잡혀온 포로들이 시내와 주피터 신전에서 풍기는 향기를 무섭고 끔찍한 죽음의 향기로 느끼고 오히려 전쟁터의 악취를 더 안심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친한 사람들 중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겼더라면 떨어져 나갈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지 못하고 나의 냄새를 풍기기 때문에 붙어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의 악취를 더 편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끔찍한 일입니다. 반대로 소홀하고 몰랐으나 내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낼 때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실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인격의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떨어져 나가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이야기를 한 것은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 있던 거짓 사도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거짓 사도들을 이기는 길은 사람 대 사람으로 대적함이 아닙니다. “너희들은 나쁘다!”라고 말함으로 승리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과 떨어져 있을 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생긴 염려와 근심에 대해 그리스도가 이기셨을 때 승리는 주어지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어떤 문제로부터 근심과 염려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는 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염려와 근심으로 생겨나는 악취를 풍기는 상태로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길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염려와 근심에 대해 승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승리의 기쁨을 알리는 향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면 내가 손대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으로써 하나님의 승리는 연장되어 갈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세상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는 일들에 대하여 끊임없이 반응이 일어납니다. 이 반응을 그대로 노출시키면 나의 인격의 악취입니다. 이 악취를 풍기는 동안에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장악된 나의 근심과 염려를 이기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말하고 움직일 때마다 진짜 사망과 생명의 영역이 분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생명의 승리가 개선행진처럼 진행되는 가운데 그 승리를 알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상과 접해 살고 있는 동안에 세상에 의해서 생긴 마음의 근심 걱정에 대한 반응을 그대로 안고 행동함으로써 내 냄새를 사방에 퍼트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무리 다급할지라도 더욱 더 강하게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의 승리의 행진이 계속 유지되게 하시고 우리는 승리의 행진을 사방에 알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