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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2

녹취문: 마음이 직면한 것이 밀어 보냄의 법칙_태승철 (고린도후서 3:1~5)

작성자제로원|작성시간22.09.30|조회수50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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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이 직면한 것이 밀어 보냄의 법칙>의 줄거리:

팔레스타인에서 온 거짓 사도들이 유대주의적 성향을 띠는 교인들로부터 무슨 자격증이나 추천서 같은 것을 들고 고린도 교회 안으로 들어왔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사도 됨을 증명할 아무런 문서 같은 것을 지참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점 역시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 바울의 사도권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교인 입장에서 사도나 목사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을까요?

 

마음이 직면한 것이 밀어 보냄의 법칙

(고린도후서 3:1~5)

 

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마음이 직면한 것이 밀어 보냄의 법칙>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마음이 직면한 것이 밀어 보냄의 법칙”

내 마음이 직면한 것이 있으면 그것이 나를 일상의 삶으로 밀어 보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법칙입니다. 예를 들어 점심때가 되어서 메뉴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때 자장면이 떠올랐다면 마음과 자장면이 직면하게 된 상태입니다. 직면한다는 것은 직접 얼굴을 대한다는 뜻입니다. 직접 얼굴을 대하기 때문에 직면하는 상황에서는 아무도 그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얼굴로만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직면합니다. 점심때 마음이 자장면을 직면하였다면 그것이 나를 자장면이 있는 곳으로 밀어 보냅니다. 그래서 자장면을 먹으려고 중국집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옆 테이블의 사람이 짬뽕을 먹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장면을 직면했던 마음이 이번에는 짬뽕을 직면하면서 자장면과 짬뽕에 의해 밀어 보냄의 싸움이 벌어지게 됩니다. 자장면을 밀어 보낼 것인지, 짬뽕을 밀어 보낼 것인지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분쟁을 돕기 위하여 중국집에서는 그릇을 반으로 갈라서 자장면과 짬뽕을 같이 담는 메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마음이 직면하게 되면 밀어 보냄의 법칙이 발동합니다. 대상과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로 바라보게 되면 그 마음이 직면하고 있는 대상이 나를 밀어 보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손으로 밀어 보내려면 먼저 접촉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접촉이 이루어지려면 미는 자와 밀리는 대상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든 인간이 자기의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바로 “마음이 직면한 것이 밀어 보냄의 법칙”과 연관되어서 사도 바울이 사도권이 의심받는 상황을 설득력 있게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예루살렘이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부터 사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구약의 율법도 다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유대주의적인 성향을 띄고 있던 교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방인들이 구약의 율법을 등한시함이 못마땅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구원을 받으려면 구약의 율법도 같이 지켜야 한다는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서 교사나 사도를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진정 예수님의 사도이자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임을 보증해주는 추천서와 같은 것을 손에 쥐어 보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와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추천서를 보여주니 고린도 교인들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이들이 받은 추천서는 베드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중심으로 한 그룹에서 준 것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이들을 거짓 사도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파피루스에 적힌 증서를 보여주며 사도이자 교사임을 자칭하였습니다. 그 증서에는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지역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인들에게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보낸 사도임을 증명한다.”라는 식으로 쓰여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도 바울은 그런 식의 추천서를 지참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 사건으로부터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청년이 회심하여 사도 바울이 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에 열두 제자는 열두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도들의 부름을 받은 자도 아니었고 교회라고 하는 조직의 부름을 받아 사도가 된 자도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면한 상태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사도로 보냄을 받은 자였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추천서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우고자 할 때는 안디옥 교회에서 안수하고 파송을 했습니다. 그때 안디옥 교회에 부탁해서 추천서를 써달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보냄 받은 사역자가 된 경위를 살펴보면 이 세상에 있는 어느 단체에 대해서도 추천을 부탁할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을 한다면 너무 편의주의적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문제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도임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의 내용과 관련된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점에 답하기 전에 “마음이 직면한 것이 밀어 보냄의 법칙”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밀어 보냄”이라는 말을 구태여 쓴 이유는 접촉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손으로 누군가를 밀려면 접촉을 해야 합니다. 접촉한다는 것은 밀리는 대상과 미는 주체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면하는 상태를 강조하기 위하여 “밀어 보냄”이라는 표현을 사용해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직면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자면 신비주의적인 일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하나님의 직면은 신비주의적인 일이 아니라 인격적인 일입니다. 인격적인 일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람은 삶의 자리로 보내져서 살게 됩니다. 마음에 직면한 것이 나를 삶으로 밀어 보내기 때문에 삶이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로미오의 마음이 직면한 대상은 줄리엣이었습니다. 줄리엣이 로미오를 살도록 밀어 보내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줄리엣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에 로미오와 줄리엣은 상대방이 죽은 것을 확인하자 더 이상 삶으로 밀어 보내는 대상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나를 살 수 있게 밀어 보내는 대상이 없어지자 자살을 하게 됩니다. 다른 것은 직면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 마음이 직면하고 있는 대상이 돈이라면 어떨까요? 돈이 나를 밀어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직면하고 있는 대상이 가족이라면 가족이 나를 삶으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살아야 될 이유가 없다는 것은 내 마음이 직면하고 있는 대상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마음이 직면하고 있는 대상이 없으면 내가 살아야 될 이유가 없게 됩니다. 같은 이유에서 마음이 직면한 대상이 불확실하거나 없다면 우울증에 빠져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이 직면한 것이 밀어 보냄의 법칙”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고 듣고 만질 때 마음은 어떤 대상과 직면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대문 밖에서 들리는 벨소리에 직면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 벨소리는 나를 움직여서 문을 열게 만듭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직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직면할 대상을 찾는 과정이 패턴처럼 정해져 있습니다. 보이는 것을 직면하려 하고, 들리는 것을 직면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되는 대상을 직면하려고 하기에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대상 또한 오감으로 포착되는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감으로 포착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에 마음으로 직면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십자가 안으로 들어갈 때 일어나는 일은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이는 곧 마음이 직면할 대상에서 이 세상 것들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내 마음이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떤 것도 직면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이 세상 것에 대해서 어떤 것도, 어떤 사람도 직면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직면할 때에도 “마음이 직면한 것이 밀어 보냄의 법칙”은 똑같이 작용합니다.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직면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이 나를 삶으로 보내시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되다 보니 사도 바울로서는 자격증이나 추천서나 천거서를 들고 “이게 사도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상당히 곤란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2절에서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고린도 교인들이여 너희가 나의 추천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셈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라고 해봐야 믿음을 제대로 가진 사람은 적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견실하게 십자가 복음을 붙잡고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사람들이었다면 사도 바울이 진짜 사도임을 증명하는 교인들이 되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직접 보내신 사도임을 증명하는 일에 대해서는 교인들의 신앙상태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이들은 사도 바울이 보낸 “눈물의 편지”를 보고서야 겨우 회개하기 시작한 단계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도라고 증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인들을 자신의 추천서로 여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지금 고린도 교회의 상태가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증명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인들 스스로가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보낸 사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결정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현재에도 문제가 되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저 같은 경우는 태어나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했던 모든 시절이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교단에 속해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교단에 소속되어 교단에서 운영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음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교단 소속이 아니면 목사 안수를 받기 어렵다는 것이 실제 상황입니다. 본문의 내용에 이런 실제 상황을 적용해봅니다. 교단에서 정해놓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때가 되면 목사 안수를 받게 됩니다. 노회장님으로부터 여러 목사님들이 강단에 올라와서 무릎을 꿇고 있는 저의 머리에 안수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은 교단이나 교파와 같은 인간 조직에서 목사라는 자격을 준 것입니다. 교단이라는 인간 조직이나 단체에서 준 자격증을 갖고 있다고 해서 과연 저는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맞을까요?

 

이 세상에는 수많은 목사님들이 계십니다. 그 목사님들 중에는 한눈에 봐도 그 마음이 직면하고 있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 세미나에 갔는데 교회의 수적 부흥이 주제입니다. 그 세미나에 참여한 목사님들의 마음이 직면하고 있는 대상은 목회현장에서 교인들이 많아지는 상황일 것입니다. 교인들이 많아지는 상황을 직면하고 있으니 그 상황이 목사님을 삶의 현장으로 밀어 보냅니다. 수적 부흥을 주제로 하는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하도록 밀어 보낸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혹시 내 마음이 직면하는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다른 예로 마음이 가족을 직면하고 있는 가장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가장이 열심히 회사에 나가서 일합니다. 사장님께 굴욕적 취급을 당하고 상사들에게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면서도 참고 견디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족이라고 하는 직면한 대상이 나를 밀어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 가족을 위해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직면하는 대상이 나를 삶으로 밀어 보냅니다. 그리고 마음이 직면하는 대상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이것은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단에서 안수를 받고 목사 자격증을 줬어도 마음이 직면하는 대상은 하나님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목사 자격증과 목사의 마음이 직면하는 대상은 상관이 없습니다. 목사님의 마음이 교인의 수적 부흥이나 넉넉한 재정이나 훌륭한 예배당에 직면해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외제차나 골프에 직면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들의 마음이 직면하는 대상은 일반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다만 목사님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용어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천국, 구원, 믿음과 같은 기독교적 단어들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앞선 2장 17절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혼잡하게 한다는 것은 어지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악한 장사를 하다”라는 뜻입니다. 악한 장사가 무엇인지는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과일가게에서 바구니에 과일을 담아 파는데 밑에는 썩은 것을 놓고 위에는 좋은 것을 올려놓습니다. 포도주를 만드는데 물을 섞어서 양을 늘립니다. 이런 식의 악한 상행위를 지칭하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목사의 직함을 가지고도 마음은 하나님을 직면하고 있지 않고 다른 것들을 직면할 수 있습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용어를 사용할 뿐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겉에만 좋은 사과를 두고 속에는 썩은 사과를 담고 있는 바구니와 같습니다. 그 말씀은 어지러운 말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가 결정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자면 “나는 하나님을 마음으로 직면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인지는 내가 전하는 말씀을 들어보면 알 것이다. 너희가 듣고 결정하라.”는 뜻입니다. 파피루스에 쓴 추천서가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서 사도 바울을 사도로 받아들이고 있는가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어떻게 해야 사도나 목사님이나 선교사나 전도자가 하나님께서 보내셨음을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직면한 상태에서 보냄을 받은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직면하게 하는 말씀을 전합니다. 스스로 하나님과 직면하는 일을 위해서 몸부림을 칩니다. 모든 말씀은 마음이 하나님과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거짓 사도나 거짓 목사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이 직면한 일들을 그대로 바라보게 합니다. 어떤 교인은 마음에서 가족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교인은 은퇴자금으로 하고자 하는 사업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교인들이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직면하고 있는 상태를 묵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전하는 이유는 이러한 상태가 죽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자아의식을 가져야 마음이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직면하고 있는 상태가 바뀔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관점에서는 마음이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직면하려는 모습이 마치 길거리에 떨어진 똥을 집어먹는 것처럼 보이기에 그대로 놔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아이가 아니더라도 어린아이가 길거리에 떨어진 염소똥을 주워 먹으려 한다면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더럽다고 피해가지 않고 말릴 것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먹을거리를 주려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하나님과 직면한 상태에서 보냄을 받은 사도나 목사나 전도자라면 마음이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직면하는 모습을 보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잠깐 돌려놓고 다른 이야기를 하려야 할 수가 없습니다. 과민하게 반응한다고 여길 정도로 십자가만 전합니다.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한순간이라도 놓친다면 마음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맛보고 코로 냄새 맡는 것들과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면 삶은 하나님이 보낸 삶이 아니라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귀신이 이끌어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과 직면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왔다면 다른 신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것들이 이끄는 대로 살아간다면 마귀가 이끄는 삶이 되어버립니다.

십자가는 결코 장난일 수 없습니다. 사도나 목사님이나 전도자의 말씀을 듣는 교인들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을 통해 “너희가 스스로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해야 함을 안다면 말씀을 들어보면 알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마음이 하나님과 직면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십자가를 이야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십자가 복음과 십자가에서 연합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을 생활화함에 있어서 나에게로 오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식으로 자신을 포함시킨다면 의심해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교인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직면하는 상태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그 사이에는 자신도 배제되어야 함을 압니다. 그런데 “나 아니면 안 된다. 내게로 와야만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짓 사도이자 거짓 목사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나온 교인들로부터 그 교회의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교회의 목사님께서는 “2000년 역사 속에 구약에서 예수님을 발견한 자는 나뿐이다.”라는 말을 하셨다고 합니다. 사실 그렇게 말하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착각일지라도 스스로 그렇게 믿으실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후에 이어지는 말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나한테 오지 않는 자는 모두 미혹을 당하는 자이고 구원을 받지 못한 자다.”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목사가 교인들과 하나님이 직면하는 상태를 방해하고 그 사이에 끼어드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목사가 전하는 말씀은 무조건 거짓말이고 가짜일 수밖에 없습니다.

루터나 캘빈에 대한 아쉬움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이 정말로 교인들 각자가 하나님과 직면하는 상태를 원했다면 교파가 갈라질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배제되기를 원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배제되기를 원치 않았기에 교파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의 교회로써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으로 들어갈 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 남아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저런 생각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안에 들어가 세상에 대해서는 다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교파가 생겨났다는 것은 본의였든 아니든 자기가 교인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저는 그분들의 신앙이 올바르다고 믿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본의 아니게 교단과 교파가 갈라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결과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교인들 스스로가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말씀을 들으면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려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교인들이 기독교라는 종교적 울타리를 굉장히 신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조직이 권위를 가지고 인정한 사람만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종교 속에 들어가서 종교를 신뢰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리에 종교가 들어간 사람은 하나님을 직면하려 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직면한 사람을 받아들이고자 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가 이와 같았습니다. 추천서를 요구하고 이 세상에 있는 기관의 인정을 믿고자 합니다. 세상이 인정해주는 사람을 목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목사님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단에 속하지 않으면 목사 안수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교단에 속해서 목사 안수를 받는 것까진 좋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목사의 자격이 충분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 거짓 목사가 생겨나게 되고 거짓 목사가 목회를 하게 되면 결국 거짓 성도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교단에서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다면 자신이 진짜 하나님께서 보낸 자인가는 스스로 감당해야 될 일입니다. 날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직면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본인이 가장 잘 압니다.

기도하며 십자가 붙잡고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한 성도들은 자기 앞에 있는 목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가려냅니다. 그것을 가려낼 수 없다면 성도들의 마음 자체가 하나님을 직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직면해야 됨도 모르며 그럼으로써 십자가 생활화의 필요성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세월이 백 년이 흘러도 자기 앞에 있는 목사가 거짓 목사임을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저는 누가 잘났다 못났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1+1=2”라는 수학 법칙과 같은 너무나 단순하고 간단한 원리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2장 17절 하반부에서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순전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일리크리네이아(εἰλικρινεία)의 원형을 보면 태양빛과 판단하다는 말이 합쳐진 형태입니다. 순전함이란 태양빛 아래에서 볼 때 모든 사물이 분명하게 분별이 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하면 보냄을 받은 자의 특징은 분명합니다. 모든 교인들이 자신과 똑같이 하나님과 직면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서 세상에서 직면하고 있는 모든 것들의 자격 박탈을 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는 중에 말씀을 전하는 자신까지도 하나님과 교인 사이에서 배제되어야 함을 알고 그러기 위해 애를 씁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것을 알고 스스로 결정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순교하면서까지 붙잡고 가야 될 진리가 들어있는지 없는지를 스스로 판단해야지 종교의 울타리를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수의 의견을 믿습니다. 수가 많으면 그곳에 진리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외견의 화려함을 믿습니다. 이번에 서울에 올라갔다가 말씀을 전하고 가까이에 있는 친한 목사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사랑의 교회에서 하는 세미나에 참석중이셨는데 저를 만나느라 세미나에 가시는 것도 도중에 포기하시고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사랑의 교회에 처음 방문했는데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라셨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저는 그 어마어마함이 영적으로 보자면 그저 높이 쌓아올린 똥더미는 아닌가 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직면해야 될 마음들이 화려한 건물과 빌딩을 직면하고 그것을 신뢰합니다. 하나님과 직면해야 될 마음이 예배당 빌딩과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수를 의뢰하고, 화려한 빌딩을 의뢰하고, 종교의 울타리를 의뢰하는 기독교 종교 안에 구원이 있을까요? 마음이 하나님을 직면할 길이 없는데 구원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목사나 지도자들이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직면하도록 내밀고 있습니다. 건물을 아름답게 지어서 성도들의 마음을 끌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직면해야 될 성도의 마음에 아름다운 건물을 들이대며 직면하게 합니다. 그 건물이 마음속으로부터 육체를 예배당 안으로 가도록 밀어붙이기를 원합니다. 목사나 지도자가 이러한 바람을 가지고 있고 교인들도 끌려갑니다. 이 정도 화려한 건물을 지을 수 있을 정도의 재정이라면 진리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운집하는 곳이라면 의뢰해도 되고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그런 예는 없습니다. 숫자가 진리를 보장해준 예는 없습니다. 오병이어 때 떡 먹고 고기 먹고 배부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좇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오병이어 사건을 지금 하나님께서 와 계시다는 하나님의 있음을 표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부름에 따라옴을 아시고 흩어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보냄을 받으셨다는 증거가 이러한 사실로부터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그 많은 군중을 먹이시는 일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당신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직면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하여 지긋지긋한 세상으로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직면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누가 어려분의 사도이며 목사이며 전도자입니까?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과 직면하도록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삶을 살도록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리고 무엇이 진리입니까? 이미 여러분은 여러분의 목숨을 걸고 지켜야 될 진리가 무엇인지를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냐 아니냐는 여러분이 편지가 되어서 판단하시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심정을 담아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직면하기만을 바랐습니다. “마음이 직면한 것이 밀어 보냄의 법칙”을 따르자면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임을 증명하는 자들은 바로 고린도 교인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주의적인 경향을 가진 교인들의 집단에서 준 증서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은 하나님을 직면해서 밀려 보내진 사람입니다. 그렇게 보냄 받은 사람은 말씀을 듣는 성도 하나하나가 자신과 똑같이 하나님과 직면하기를 목적으로 합니다.

설교자가 다양한 말씀을 전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렇게 말씀을 전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다양한 계획과 뜻을 가지고 그 사람의 삶을 밀어 보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자가 삶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삶의 다양함은 오직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그 다양한 계획을 갖고 계신 하나님과 어떻게 해야 직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역자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사는 성도들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각자가 이 세상의 어떤 조직이나 단체의 권위를 믿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현상도 믿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직면하여 하나님을 당면하는 것만 과제로 삼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를 붙잡아 주셔서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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