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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행위충동과 행동강박을 벗는 자유>의 줄거리: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그 마음이 내몰리고 있습니다. 즉 행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과 충동에 쫓기는 거지요. 우리는 과연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구약의 율법 조항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행동 강박과 행위 충동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 일체에서 벗어나 삶을 살 수 있는 자유입니다.
행위 충동과 행동 강박을 벗는 자유
(고린도후서 3:12~18)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행위 충동과 행동 강박을 벗는 자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행위 충동과 행동 강박을 벗는 자유”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정말로 가능할까요? 본문의 요지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면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면 일절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내가 행동을 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인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 지구에 살고 있는 80억 명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자발적인 의지를 통해서 행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행동으로 마음이 내몰리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과 충동에 쫓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른 채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자발적으로 결정해서 행동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과연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에서 벗어남은 단지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 조항을 지키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행동원칙 중에 대표적인 행동원칙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곧 행동원칙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행동하는 길을 찾는 이유는 행동 강박증 때문입니다. 심리적으로 행동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압박을 주고 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 행동이고 행동원칙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 조항을 그대로 기억하며 따라 해야만 율법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대표적인 행동원칙입니다. 따라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란 이 세상의 모든 행동원칙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행동원칙을 찾지 않는 이유는 내 마음에서 행동 강박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자신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문제나 과제가 주어졌을 때 “내가 행동하겠다.”라는 생각이 없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이 있다면 아직 예수님을 따름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의 요지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대하면서 잊지 말아야 될 포인트는 앞선 내용들과의 연결성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들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거짓 사도들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주의적인 그리스도 교인들에게 사도라는 증명서를 받아 각처에 있는 모든 교회에 가서 구원을 위해서는 율법 준수가 필수불가결함을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이 거짓 사도의 핵심적인 문제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이러한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현혹되고 있었습니다. 본문을 살펴봄에 있어서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사도 바울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짓 사도들이 율법을 강조하는 이유와 사람들이 거짓된 진리를 쉽게 받아들이는 이유를 함께 생각해볼 것입니다. 다만 오늘은 이해를 돕기 위해 본문을 뒤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17절을 보면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참 멋진 말씀이지만 주가 영이시라는 내용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살덩어리로 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은 영으로써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주로 믿고 따른다는 것은 영이신 분을 믿고 따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당연한 말씀을 왜 했던 것일까요? 말씀드렸듯이 거짓 사도들은 율법이라는 행동원칙을 강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러한 거짓 사도들을 염두에 두고 이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자들을 위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성경의 율법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 행동을 해야 된다는 강박증을 앓고 있다면 영이신 주님을 따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우리가 처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말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이상적으로 보이는 말씀으로 점점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말씀이 뜻하고 있고 포함하고 있는 진리의 기준과 동떨어져 있다고 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맞출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어도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말씀이 이상적이거나 추상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관념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말씀을 그대로 놓고 지켜야 말씀 쪽으로 다가가는 변화가 생길 수 있습니다. 말씀을 붙박이로 놓고 내가 움직여가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실제 상황을 붙박이로 놓고 말씀을 적용하고자 한다면 말씀을 변질시키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된다는 생각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주는 영이시다. 그리고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라고 합니다. 주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려고 할 때는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살덩어리인 우리의 육체를 통해서는 영을 따르기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육체로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영이신 주님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영이시라는 점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보편적으로 잊히고 말았습니다. 영이신 주님은 오직 우리의 영으로만 따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영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오직 우리의 영 안으로 모셔 들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를 모셔 들일 수 있는 크기의 공백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공백의 영인 마음으로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육체를 움직이는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은 주님을 따름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육체를 움직이는 행위를 통해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육체를 움직여 행위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셔야 될 행위를 내가 하면서 주님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영이신 주님은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3차원 세상을 출애굽 하셨습니다. 출세상 하셔서 4차원 천국으로 가시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의 길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이러한 영이신 예수님을 따름은 영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존재하는 우리의 영인 공백의 마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마음의 행위로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따름은 지속돼야 하는 일입니다. 일주일 중에 주일과 수요일과 금요철야 때만 따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름은 매일 24시간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한 번 예수 이름으로 세례 받고 “나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고 나서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 따름을 자유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이상할 정도로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24시간 365일 따라야 되기에 육체로 하는 행위 자체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예수님을 따름에 대해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 합니다.
예수 따름은 정말로 통쾌한 자유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 주체가 되어서 내 몸을 움직이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괜찮기에 자유입니다. 오히려 그래야만 됩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다는 것일까요? 이 세상에서 말하는 모든 법은 내가 행동의 주체라고 인정하기에 죄와 벌과 칭찬을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개는 뛰어가도 행위 하는 것이 아니고 짖어도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에게는 인격적 주체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만이 인격적 주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행동과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실상은 좀 다릅니다. 영이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따를 때만 마음으로 내 육체를 붙잡고 움직이는 행위의 책임과 강박과 행동의 충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평강을 깨뜨리는 거의 모든 이유는 행동에 대한 강박에 기인합니다. 상황과 문제와 과제 앞에서 내가 행동을 해야 된다는 강박 때문에 마음의 평강은 깨집니다. 내가 행동을 해야 된다는 강박감만 없어도 평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강박감 없이도 이 세상 삶은 이루어져 나갈 수 있고 오히려 그래야만 진짜 평강은 주어질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고 이보다 더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 없기에 사도 바울은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주님에 대한 믿음은 영이신 주님을 따름입니다. 그것도 일시적인 따름이 아닌 24시간 지속되어야 하는 따름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을 따를 것인지 세상의 행동 강박에 시달리며 살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 자체가 행동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내가 행동해야 된다는 책임의식과 의무감과 강박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영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있어서 내가 나의 육체를 움직여서 행동함이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주장하고 있고 사람들도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이신 예수님을 따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율법이라는 행동원칙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삶에서 자꾸 행동원칙을 찾는다면 영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내 행동을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라면 예수를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제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말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말씀이 포함하고 있는 메시지를 그대로 노출시켜 보면 우리의 영적인 처지와는 너무나 거리가 동떨어진 것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실제 상황과 거리가 떨어져 있는 이상적인 상황을 고집하고 인정하고 선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붙박이로 두고 나를 맞추어 나갈 때에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진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상황으로 접근해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행동 강박증에 시달리는 것일까요? 아담의 후손은 누구나 유전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유전 죄가 행동 강박증을 불러일으키고 행동원칙을 찾게 합니다. 서점에 나가서 책들을 보면 행동원칙에 대한 책이 거의 전부입니다. 돈을 벌고 싶으면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 건강을 유지하고 싶으면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 자녀를 서울대에 보내고 싶으면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 모든 것이 행동원칙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행동원칙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면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않습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면 행동원칙을 찾을 수밖에 없게 하는 행동 강박증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시는 것은 단순히 구약의 율법 조항을 안 지켜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일상의 과제 앞에서 문제 앞에서 스스로 행동을 취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두려움과 강박에 대한 자유가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일상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가정과 사회에서 “내가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두려움과 강박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며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것도 아닙니다. 영이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따름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조차 이 행동 강박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모세의 일화를 통해서 가르쳐줍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야를 하나님과 함께하며 두 돌판에 계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내려왔는데 모세의 얼굴의 피부에 빛이 나서 백성들이 마주할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30절에서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하더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일화를 통해서 사람들이 행동 강박증에 시달리면서 행동원칙을 찾아 헤매는지에 대해 말해줍니다. 이로부터 거짓 사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행동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왜 그렇게 쉽게 행동 강박증에서 행동원칙을 찾아 구원받지 못하는 상태를 그대로 재현하고 받아들이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빛나는 얼굴에 주목하는 것을 염려해서 수건을 썼습니다. 그리고 양손에는 십계명 돌판을 들고 있었고 얼굴에서는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성들이 먼저 보는 것은 빛이 나는 모세의 얼굴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13절에서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상황은 결국 없어질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율법을 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행동원칙을 의미하는 율법과도 연관이 됩니다. 마음이 반짝거리며 빛을 내는 것을 바라볼 때 행동 강박증에 붙잡히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모세가 빛이 나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일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15절을 보면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도 수건이 덮여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반짝거리는 것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마음에서 반짝거리는 대상이 일시적이어서 없어질 것이라면 그것을 바라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빛나는 얼굴을 바라보지 않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모세가 얼굴을 가리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의 시선을 가리면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마음에서 반짝거리게 보이는 대상은 정해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벌려고 하는 이유는 마음에서 돈이 반짝거리게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이성들이 있지만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는 이유는 마음에서 그 사람이 유난히 반짝거리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왜 사람들이 율법을 좋아하고 행동원칙을 좋아하며 행동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를 마음의 봄을 통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 마음에서 반짝거리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에서 보고 있는 반짝거림의 대상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장차 없어질 것인데도 반짝거리니까 그것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태풍이 부는 밤에 항해하고 있는 배의 상황과도 같습니다. 바다를 헤매다가 멀리서 반짝이는 등대의 빛을 발견하면 무조건 등대를 향하여 가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눈으로 많은 것들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들 중에 마음에서 빛을 발하는 대상을 발견하면 그것을 향하여 가게 됩니다. 마음에서 반짝거리며 보이는 것을 갖고 싶어 하고 이루고 싶어 하고 손에 쥐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행동이 나타납니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일시적으로 반짝거리는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끊임없이 행동해야 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행동해야 된다는 강박증이 찾아오면 그 다음에 하는 일은 행동원칙을 찾게 됩니다. “어떻게 행동해야 내 마음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것을 손에 쥘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를 때는 이와는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인정합니다. 내 마음에 세상 것들이 반짝거리게 보일지라도 그것이 일시적인 것들이기에 바라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행동원칙을 찾는 이유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 어떤 것이 일시적으로 마음에서 반짝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반짝거리는 것을 향해 가기 위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돈 문제가 생긴 상황에서 내 마음에서 반짝거리는 대상은 돈 문제의 해결입니다. 이제 돈 문제가 해결된 상태로 가기 위해서 행동하고자 하고 행동원칙을 찾게 됩니다. 행동원칙을 찾고 행동하려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영이신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영이신 예수님을 따르려면 내 마음이 이 세상에서 반짝거리는 모든 것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반짝거리는 것들에 대한 죽음이 출세상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반짝거림의 대상이 바뀌게 됩니다. 일시적으로 반짝거리는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통하여 영원히 반짝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영원히 반짝거리는 하나님을 향해 가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다만 이 길은 육체로는 갈 수 없습니다. 육체의 행위로는 무엇을 해도 영이신 예수님을 따라 내 안에 반짝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오직 영이신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까지 이르신 길을 따라서만 우리의 영인 공백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자리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의 반짝거림을 영원히 바라보고 소망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렇게 될 때는 행위의 주체도 바뀌게 됩니다. 본래 행위란 마음이 육체를 움직여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나의 마음이 영이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하늘로 따라갔기에 더 이상 육체를 움직일 주체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행동할 주체가 없는 세상을 사는 자유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행동은 여러분이 아닌 성령께서 오셔서 하시는 일이 됩니다. 행동 강박증으로부터 행동원칙을 찾으려 하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 스스로 이 자유를 꼭 경험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자유를 경험해야만 영이신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상태입니다. 아직도 행동 강박증에 시달리며 육체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더욱 더 철저히 주님의 십자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영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데 전념하시다 보면 저절로 내 몸이 성령에 의해 움직여야 될 타이밍이 올 것이고 내 몸이 움직이게 되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이신 예수님을 따르느라 세상에서 반짝거리는 것들에 대하여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정으로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영원한 반짝거림이신 하나님만을 보게 하시고, 내 몸은 행동 강박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통쾌한 자유를 날마다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