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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현실 외면하고 천국현실만 직시>의 줄거리:
무슨 일이 벌어지든 어떤 문제가 주어지든, 만약에 그런 사태가 발생하는 상황보다 하늘 아버지 계시는 천국을 더 강하게 현실로 느낄 수 있다면 그 일과 문제에 대해서 절대로 오류를 범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현실을 직시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래야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현실은 직시할수록 오류가 커지고 속게 되고 거짓을 자아내게 됩니다.
세상 현실 외면하고 천국 현실만 직시
(고린도후서 4:1~6)
1.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상 현실 외면하고 천국 현실만 직시>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상 현실 외면하고 천국 현실만 직시”
우리는 흔히 “현실을 직시해야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 혹은 “문제를 우회하지 말고 정면 돌파하라.”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실제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에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문제나 과제나 일들을 우회하려 해서는 이루거나 해결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직시하여 그것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뚫고 나가려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직시해야 할 현실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몸이 놓여있는 이 세상 삶의 현장을 현실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생각한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무의식중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내가 처해있는 삶의 현장을 나의 현실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만 보더라도 현실은 상당히 선택적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직장에 있는 동안 집에서 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딸이 수학경시대회에 나가서 1등을 했다고 합니다. 이때 몸은 직장에 있지만 마음은 집에 있는 딸을 현실의 대상으로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현실은 수없이 많은 대상들 중에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택된 현실감 속에서 행복하거나 불행하고 기뻐하거나 슬퍼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이나 대상을 현실감의 대상으로 선택하는지가 문제가 됩니다. 여러분께서 행복하든 불행하든 기쁘든 슬프든 그 모든 감정은 현실감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현실로 선택한 대상의 상황에 따라서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하며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합니다. 아무리 불행하게 느껴지더라도 현실을 바꾸면 지옥에서 천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 천국같이 행복하게 느끼더라도 다른 현실을 선택하게 되면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제가 상담을 할 때 느끼는 바도 이와 같습니다. 저는 상담을 할 때 현실감을 바꿔드리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표현들을 기다립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을 통하여 현실감이 바뀌면 지옥을 경험하던 분이 천국을 느끼게 되는 개벽의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처럼 중요한 것은 무엇을 현실로 선택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천국을 선택의 대상으로 우리 앞에 제공해주셨습니다. 이 천국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선택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천국을 현실로 선택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현실감은 선택적입니다. 어떤 하나의 대상이 현실감으로 선택되고 나면 다른 모든 대상들은 사실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외면당하게 됩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면들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모든 사실들을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내게 주어지는 상황이 현실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이 세상이 주는 상황이 나의 현실이 되지 않도록 외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제시되는 천국을 현실로 직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통하여 얻는 구원이 바로 천국 현실감이고 천국 현실감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거짓 사도의 문제를 논하며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거짓과 참의 문제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사도의 직분을 수행하심에 있어서 왜 낙심하지 아니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긍휼하심을 입는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요?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몸을 내 몸으로 붙잡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의 마음은 예수님의 부활을 따라 이 세상을 빠져나가게 됩니다. 출애굽처럼 출세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승천을 따라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의 사도 바울은 천국의 현실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국을 현실로 느끼더라도 이 세상에서 살아야 되기에 천국을 강한 현실로 느낄수록 이 세상에 대해 낙심하게 됩니다. 조선시대에 대역죄를 지으면 머나먼 오지로 유배를 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사도 바울이 왜 낙심하지 않겠다고 말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일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달을 때 사람은 낙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천국 현실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천국에 가지 못하는 현실에 낙심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4장은 천국 현실감의 문제를 가지고 거짓과 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천국 현실감이 없는 자들입니다. 낙심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사도 바울에게도 바라는 것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의 바람이란 지금 당장이라도 현실로 느끼는 천국에 가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으로 느끼는 현실감은 천국에 대한 것인데 몸이 살아서 이 땅에서 해야 될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원하는 천국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낙심하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낙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아, 내가 하늘에서 정한 뜻을 땅에서 이루기 위해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하늘로 오지 못한 채 이 세상에서 머물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천국의 좋음을 알고 계시고 사도 바울도 그 좋은 천국을 현실로 느끼고 있기에 세상은 유배지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사도 바울에게 늘 전달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앞서 구원은 이 세상을 유배지처럼 여기며 사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형태로만 주어진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상황을 다시 언급하며 낙심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라는 일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천국 현실감을 느끼는 사람으로서 천국으로 가는 것을 제일 좋게 여겼습니다. 다만 당장 그럴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루고 싶으신 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이 세상에서 살겠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위로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위로하심은 동시에 우리의 천국 현실감을 더욱 강화시켜 줍니다.
우리는 현실감 속에서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위로와 긍휼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소원과 바람을 갖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 마음에 계속해서 위로와 긍휼을 베푸십니다. 나의 마음이 머물 장소가 되는 현실감을 천국 현실감으로 강화시켜 주십니다. 천국 현실감이 강화되고 있기 때문에 당장 몸이 죽어 주와 함께 거할 수 없을지라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보냄 받은 자로서의 직분을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거짓 사도들의 문제는 천국 현실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 현실감이 강하면 강할수록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의 양심에 더럽고 수치스럽게 여겨지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일이 사도 바울에게 더럽고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부끄러운 일이었을까요? 천국 현실감을 갖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세상을 살다 보면 세상의 상황과 일과 대상들이 마음속으로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자기 자신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다만 천국 현실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마음에 세상이 들어온 상태를 묵인하거나 덮어두거나 유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숨은 부끄러움의 일”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위로는 한 일이 없을지라도 마음에서 음욕을 품었다면 천국 현실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부끄러운 일로 여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천국 현실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 “내가 돈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면 어떨까요?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숨은 일입니다. 그러나 천국 현실감을 가진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을 부끄럽고 창피하게 여깁니다. 세상 사람은 아무도 모를지라도 나 자신의 양심이 돈의 바람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여겨서 창피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내 마음이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외부에서 말씀을 전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맞으면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만 말씀을 마치고 떠날 때는 대부분 강사료를 주십니다. 그러나 저는 강사료를 받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에 특별한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마음에서 거부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담배를 권한다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저는 도저히 못할 일로 여겨서 거부반응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고자 해서 강사료를 거부하는 훌륭한 인격 상태인 것이 아닙니다. 강사료를 담고 있는 봉투가 마치 담배를 권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그 자리에서 담배를 피워야 되는 것과 같이 느껴지기에 말씀을 전하고 강사료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천국 현실감이 조금씩이라도 생기면 나타나는 변화들이 있습니다. 세상 것을 가지고 담고 하는 일들이 마음에서 거부됩니다. 내가 인격적으로 훌륭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표현은 맞지 않습니다. 천국 현실감이 세상을 밀어내도록 나를 만들어갑니다. 거짓 사도들의 특징은 이와 반대입니다. 마음에 세상을 담고 가지는 상황이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세상의 가치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두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두시는 차원에서 재벌 총수의 자리에 앉히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 현실감을 가진 사람은 재벌일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재산들을 마음으로 갖지 못합니다. 돈이 마음에서 겉돕니다. 천국 현실감을 가진 사람은 돈에 둘러싸여 있어도 마음에서 돈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업무나 일로써 재벌이라는 위치에서 일할 뿐이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는 천국이 현실로 느껴지는 사람도 재벌이 될 수 있고 대통령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 현실감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재벌의 위치에서 주어지는 세상 것이든 대통령의 위치에서 주어지는 세상 것이든 마음 안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세상의 현실감을 크게 느끼는 경우입니다. 4절을 보면 “그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라고 하였습니다. 혼미하게 하였다는 것은 천국 현실감에 대해서 혼미해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세상에 대해서는 굉장히 또렷한 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현실로 직시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세상이 또렷한 현실로 보이는 혼미한 상태에서는 우리 마음이 천국 현실감에 도달하게 해주는 십자가는 절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세상이 너무나 또렷하게 현실감으로 포착될 때 나타나는 일이 거짓이고 오류라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현실로 직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로부터 나타나는 모든 말과 생각은 거짓이고 오류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경우에는 질적으로 더 나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생기는 오류와 거짓은 고치지 못할 정도로 깊어지고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을 현실로 직시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이 확실한 현실로 느껴지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은 다 오류이고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6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만이 홀로 있으시고 홀로 좋으시고 홀로 주권자 되시며 모든 면에서 1등이신 상태입니다. 바로 이렇게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분이신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 천국이기에 우리는 천국 현실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좋음과 주권을 현실로 인정하는 상태가 천국 현실감입니다. 이 천국을 현실로 느끼면서 하나님의 현실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계속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에 대해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순서를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천국의 있음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론적으로 받아들인 천국과 하나님이 내게 현실감이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봐야만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을 지속할 때 이론적으로 알던 하나님의 있음과 천국의 있음이 현실감으로 바뀌어 갑니다.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는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있을 때만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기 시작하고 하나님이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현실로 직시하려는 나의 시선이 죽으면 죽을수록 하나님의 현실감은 커집니다. 세상에 대한 현실감은 절대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할 때 세상에 대한 현실감은 점점 작아지다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천국에 대한 현실감은 점점 더 커집니다. 처음에는 천국이 이론적 사실로만 느껴지는 상태지만 이윽고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하고 점점 더 커져서 절대적인 현실로 느껴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1등이라고 하는 현실,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의 현실이 내 속에서 커지면 커질수록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에서 오류는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그것이 현실일 수 있습니다. 이때 내게 주어지는 현실감은 불행함입니다. 마음이 몸을 현실감으로 직시하는 동안 불행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절대적이고 강한 것으로 느껴질지라도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이 어떠하든지 내가 느끼는 현실감은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 돈이 하나도 없는 상태라면 어떨까요? 그 현실감 속에서 불행하다면 돈이 없는 상황을 현실로 선택한 결과입니다. 돈이 없는 상황이 사실이라면 천국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것도 사실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사실입니다. 돈이 없는 상황이 현실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천국도 현실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돈이 없는 현실과 몸이 아프다는 현실을 선택한 것이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모든 일은 거짓이 되어버립니다.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만이 유일한 참 현실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현실로 직시할수록, 세상에서 발생한 문제를 깊이 볼수록 그로부터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은 거짓과 오류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는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이 있다는 것을 이론으로라도 믿기 때문입니다. 이론으로라도 알고 있다면 하나님만이 현실이심이 제시된 것입니다. 이제 그 하나님을 현실감으로 느껴야 되고 천국을 현실로 직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천국 현실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만 생길 수 있고 커져갈 수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의해 혼미한 상태에서는 십자가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을 혼미케 한 자는 세상 신입니다. 세상 신은 이 세상의 상황을 유일한 현실로 느끼게 합니다. 여러분께서 몸이 처한 상황을 현실로 느끼신다면 아직도 세상 신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모든 거짓이 발생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입에 담고 있으면서 마음으로는 이 세상을 현실로 직시하고 있는 상태라면 거짓의 최고봉의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유일하게 스스로 있는 분이심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계신 천국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과 천국이 현실로 느껴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세상의 현실을 직시하려는 나의 죄적 체질은 계속 죽어야 합니다. 이 죽음이 반복될수록 여러분에게 천국 현실감은 커질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 현실감이 커질수록 여러분은 오류와 거짓과 속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거짓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으신 모든 은혜는 쌓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을 현실로 보고 있고 세상을 현실로 직시하고 있는 상황은 그 자체가 거짓의 옹달샘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짓이 솟아나는 옹달샘 주변에 은총의 숲을 만들어 주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한 있음이심을 믿고 천국의 있음을 믿는다면 그 있음이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천국에 대한 현실감을 키우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붙잡습니다. 십자가만을 붙잡고 세상을 현실로 보려는 나를 끊임없이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인정해나갈 때 깜짝 놀랄 정도로 천국과 하나님이 현실감의 내용이 될 것입니다. 그 현실감 속에서 점점 더 하늘의 위로를 받고 구원의 기쁨과 평강 속에 거하는 동안 이 세상은 유배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 유배지에서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 여러분의 울타리가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신에 이끌려 몸이 처한 상황을 현실로 직시하는 일이 중단되는 것이 반복됨을 통하여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천국과 하나님 아버지가 나의 유일한 현실감의 내용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